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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논, 뱀을 들다!(겔 11:14-20; 롬 6:3-14; 요 3:1-15)부활절 둘째주일(4월28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4.26 17:27

1. 수직 폭력과 수평폭력

우리는 일반적으로, 같은 고통을 받는다든지, 혹은 함께 갇혀있다든지 하는 사람들은 서로 연대하고 협동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령, 가난하고 힘없는 군중들은 동료들과 함께 연대하지 않고 서로에게 폭력을 가합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민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쳤죠? 일본인 보다, 친일파 조선 사람이 더 조선인들에게 폭력을 가했습니다. 을들은 갑의 폭력에는 저항하지 않고, 같은 을이나 병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최저임금 반대하는 중소상공업자들의 의견은 존중하지만, 존경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왜 그럴까요?

유대계 이탈리아인인 프리모 레비(1919~1987)는 독일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 감옥에 11개월 동안 감금됐지만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당시 수감자의 평균 생존 기간은 고작 3개월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끔찍한 경험을 한 레비는 감옥에서의 처참한 경험담을 기록한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0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수용소에서 처음 받은 위협과 모욕, 첫 구타는 나치 친위대원들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유대계 수용자들, 즉 동료들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나치로부터 억압받는 유대계 수감자들은 감옥 안에서 서열을 정했고, 그 안에서 약자를 괴롭혔습니다. 동족끼리, 그것도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들 사이에 그러한 폭력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군중들이 왜 동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지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 연구한 정신과 의사이자,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프란츠 파농(1925~1961)은 이렇게 말합니다.

“굶주림, 집값을 못내 집 주인에게 내 쫓김, 어머니의 말라붙은 젖가슴, 해골이 앙상한 아이들, 폐쇄된 작업장, 시장 곁을 까마귀 떼처럼 따라다니는 실업자들, 이 속에서 원주민은 매일 살인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몇 파운드의 밀가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가?”

프랑스 국적이지만 알제리에 정착한 파농은 알제리에서 일어난 수많은 폭력 사건을 분석합니다. 가령, 하루 14시간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천막에 돌아온 사람이 옆 천막에서 아기가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그 천막에 들어가 아기를 흉기로 찔러 죽였습니다. 외상을 주기를 거부하는 상점 주인을 야밤에 찾아가 찔러 죽인 사람도 있습니다.

당시 알제리를 지배했던 프랑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천적으로 저열하고 폭력적이며, 이유 없이 살인하고 범죄 성향이 강하다.” “깜둥이들은 원래 폭력적이야.” 그러나 의사였던 파농은 자신이 치료한 환자들의 진료기록(1954~1956년)을 바탕으로 이렇게 분석합니다. “알제리 국민들이 폭력적인(수평폭력) 이유는 바로 프랑스인들이 가하는 수직폭력 때문이다.”

▲ 프란츠 파농 ⓒGetty Image

파농은 폭력을 수평폭력과 수직폭력으로 구분합니다. 같은 위치, 곧 을들끼리 행하는 폭력이 수평폭력이고, 갑이 을에게 행사하는 폭력이 수직폭력이며 강대국이 약소국에 행하는 것입니다(지난 2019년 4월 25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만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제재 해제’ 대신 ‘체제 안전’ 카드를 꺼낸 것을 보면 나라 간의 힘의 격차를 읽을 수 있습니다만, 아무튼). 힘 있는 지배계급이 힘없는 피지배 계급에게 행하는 폭력이지요. 교실 안에서 학생들끼리의 폭력도 수평폭력입니다(이러한 측면에서 ‘학생인권조례’는 수직폭력을 반대하는 것으로 강화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파농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수직폭력으로부터 피해를 크게 입을수록, 수평폭력의 유혹에 빠진다. 자신을 곤궁한 처지로 몰아넣은 것은 지배계급이지만, 정작 그 일을 당한 민중들은 자기보다 못하거나 약한 사람을 죽이고 두들겨 패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한과 고통을 푸는 것이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러한 을들의 이야기(유다 백성)와 을들의 아픔을 깨닫지 못하는 갑(니고데모)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서신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다시 살아난 이들이 살아갈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구약의 말씀은 에스겔서입니다. 에스겔은 구약 최고의 조직신학자로 간주되는 유다의 제사장이자 선지자입니다. 바벨론의 2차 침공(B.C 587년)때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 앉아 있다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던 70년 동안, 포로의 땅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비탄에 빠진 백성들을 향하여 예언을 합니다. 이러한 에스겔의 예언은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전반부는 예루살렘 파멸(겔 1-24장)을, 중반부는 이방에 임할 심판(겔 25-32장)을, 후반부(겔 33-48)는 소망을 예언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전반부에 해당 되지만,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처럼, 심판 속에 희망을 보여줍니다. 전반부는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한 말씀이라고 했죠? 유다가 멸망당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뒤, 예수살렘에 남은 주민들은 포로로 끌려간 이들을 비난합니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이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같이 볼까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예루살렘 주민이 네 형제, 곧 네 형제와 친척과 온 이스라엘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겔 11:14-15)

무슨 말씀입니까?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주민들이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이 땅은 우리 땅이니, 너희는 포로 생활이나 잘해라.”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포로로 끌려가 비참한데, 남아 있는 사람들이 위로는 못해줄망정 비난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을들이 갑인 바벨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을을 욕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합니다.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에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의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겔 11:16-18)

놀라운 말씀입니다. 비록 포로로 잡혀갔으나, 그곳에서 잠시 살면서 그 바벨론 사람들의 성소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소(聖所)는 거룩한 장소죠? 곧,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 바벨론 사람들에게 ‘거룩함의 기준’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잠시 생활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와서, 모든 가증한 것과 미운 물건을 제거한다는 말입니다. 18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이리로 돌아와서 구역질나는 우상, 보기에도 역겨운 신상을 모두 몰아낼 것이다.” 무슨 말씀인가요? 이것은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먼저 우상 숭배입니다.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너희 제단들이 황폐하고 분향제단들이 깨뜨려질 것이며,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겔 6:3-4)

그러나 우상 숭배를 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성소를 가증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에스겔서 7장과 8장에 나오는 말씀을 연속해서 보겠습니다.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 인자야 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땅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나타내어 네 행위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겔 7:1-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니, 제단문 어귀 북쪽에 그 질투의 우상이 있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겔 8:5-6)

하나님의 성전을,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을 우상의 소굴로 만들어 가증한 장소로 만든 것입니다. 특별히 에스겔 8장 말씀에서 에스겔은 4가지 우상을 지적합니다. ‘질투의 우상’(3-6, 다산을 상징하고 성적 부도덕을 상징하는 가나안의 아세라신을 말합니다), ‘각양 곤충과 짐승’(7-13, 악어, 뱀 등 동물들과 곤충들의 형상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던 애굽의 가짜 신들입니다), 담무스(14-15, 바벨론의 신 두무지로, 아내 이난나에게 쫓겨 지하 세계를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를 어머니와 여동생이 애곡하게 되었는데, 바벨론 여인들은 이를 기념하여 애곡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태양신(16, 태양은 바벨론의 가장 힘 있는 신으로, 당시 하늘의 태양과 별과 달에 대한 제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이 그것입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돈과 맘몬으로 치장하여 바벨탑으로 세우고,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영적 타락, 성적 문란함으로 하나님의 집을 구역질나는 우상과 보기에도 역겨운 신상들로 가득 채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소를 떠나시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잠깐 ‘거룩함의 모범’을 보이고, 고향에 돌아와 유다 땅을 거룩한 성소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한 마음으로 모으시고, 새 영을 주실 때 가능한 것입니다.

3. 거듭남의 비밀은?

그러나 신약 복음서 말씀에는 그 새 영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요 3:1).”는 말씀처럼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을 대표합니다. 선생이며(요 3:10), 바리새인이었으며 유대 공의회인 산헤드린의 관원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결단과 로마의 식민 통치 아래, 유다인들의 시민법에 대해 책임을 지는 기관입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대표 70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유대종교의 최고 의결기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심문하기도 했습니다(눅 22:66). 아무튼 산헤드린 관원인 갑중의 갑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신약성경에는 오직 두 명의 산헤드린 회원만이 호의적으로 묘사됩니다. 아리마대 요셉(요 19:38)과 랍비 가말리엘(행 5:34-39; 22:3)입니다. 니고데모 역시 부정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정죄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요 7:51)” 아무튼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화를 이어갑니다. 대화의 내용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3-13)

니고데모는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돌 같은 마음이 부드러워지지 않았기에 성령으로 거듭나는 비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생의 비밀을 알고 싶었으나, 예수님은 율법이나 공로가 아니라, 그 비밀을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내주십니다. 이것을 바울은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서신서의 말씀을 볼까요?

4. 연합한 자가 되라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3-5)

구원받은 이후의 성도의 생활에 대한 설명인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성화(聖化)적 구원’을 이야기 합니다. 즉 구원받은 성도가 죄악 된 세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6-11)

기준을 제시하고 있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한 새 생명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삶과 그의 죽음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5. 기준: 뱀을 든 것 같이

따라서 요한복음은 우리 삶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뱀을 들었다’는 말은 ‘기준을 세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집합하고 모일 때 손을 들고 “기준”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 기준, 곧 캐논, 정경이라는 말씀입니다. 핵심이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그 기준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풀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2-14)

서두에 언급한 레비는 수용소에서 여러 종류의 ‘인간들’을 보고, 인간의 본질이 어떻게 부정 당하는지를 기록하고, 인간의 본질을 묻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가 뭔가를 다 쓰고 나자,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그 시선은 두 명의 인간 사이에 흐르는 시선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두 존재 사이에 놓인, 수족관의 유리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 같은 그 시선의 성질을 속속들이 설명할 수 있다면, 나는 제 3제국의 그 거대한 광기의 본질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19년 4월 17일 진주의 한 아파트에서 불을 지른 뒤 대피하는 주민들을 상대로 흉기를 휘둘러 18명을 죽거나 다치게 한 방화, 살인 사건은 ‘묻지마 살인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국가, 혹은 한 지역 내 수직폭력에 희생된 한 사람의 수평폭력입니다. 이 범죄에서 ‘조현병(Schizophrenia, 증상으로 무논리증, 화해된 행동, 망상이 있음)’에 원인을 묻는 것은 국가가, 언론이 본질적인 원인을 외면하기 위함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수직폭력을 보아야 합니다. 갑의 구조적 폭력에 희생당한 을이 을에게 행하는 폭력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원인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수용소는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 동물로 격하시키는 곳입니다. 레비의 말을 들어볼까요?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 기준을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거듭남의 비밀입니다. 지금 갑의 조직적 폭력에 지친 을들이 서로 수평적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어쩌면 모두 존재론적으로 갑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이 땅에 태어나 자랐고,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 사회에 살면서 수직폭력을 알게 모르게 행사해 왔습니다. 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아우슈비츠 그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레비는 30년 가까이 지난 뒤, 1987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가 우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도대체가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요?

바울은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일찍이 단테는 『신곡』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타고난 본성을 헤아려 보시오. 짐승으로 살고자 태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덕(德)과 지(知)를 따르기 위함이라오.” 예수님의 기준도 단테의 말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과 희생의 십자가를 따르십시오. 십자가에 삶의 기준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부활의 새 소망이 있습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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