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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 앞에서만 가난해지려고 하는가부자의 구원(막 10:23-27)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4.28 15:35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늘은 일전에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었던 초대 교부 중의 한 사람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면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로마의 교황인 클레멘트 1세와 구분하기 위해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라고 쓰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로마의 클레멘트’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클레멘트라고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이 사람에 대한 설명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여러분에게는 생소한 이름이기 때문에 간략하게나마 설명을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Getty Image

알렉산드리아는 지금도 존재하는 이집트의 도시입니다.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항구 도시입니다. 예수님 시대를 전후해 알렉산드리아가 유명했던 이유는 경제적 부 때문도 있지만, 그곳에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를 고대 세계 지성의 중심지로 만듭니다. 우리가 한 번 쯤 이름을 들어봤음직한 고대 수학자 ‘유클리드’도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세계의 석학들이 모여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수많은 논쟁이 펼쳐지는 지성의 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알렉산드리아에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던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입니다.

부자의 구원-클레멘트

그가 지금의 교회에서, 또 신학에서 중요한 이유는, 그가 그리스 철학을 본격적으로 인정했다는 점도 있지만, 성경 해석 방법 중 하나인 알레고리 해석 방법을 발견해냈다는데 있습니다.

알레고리 해석 방법은 간단하게만 말씀드리자면, 성경을 표면적인 글자만 읽어서는 안 되고 글자 안에, 말씀 안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읽어야 한다는 해석 방법입니다. 물론 이 방법은 극단적으로 사용했을 경우에 성경을 자의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에서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이것이 마치 초대교회로부터 전해져오는 정통적인 알레고리 성경해석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절대로 자기 맘대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이 스스로 모순된 이야기를 전할 때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알레고리를 사용합니다.

다만 알레고리 해석의 완성자로 여겨지는 오리겐의 경우, 모든 성경을 알레고리로 해석하다보니, 해석의 비약이 이루어졌고, 알레고리 해석 방법이 잘못된 방법으로 인식될 수 있게 만들기도 했습니다만, 오리겐은 그리스 철학과 성경을 융합시켜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성경을 완전히 비약시켰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일부 교회들에서 멋대로 해석해서 이야기하는 수준의 해석 방법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알레고리 해석 방법을 사용한 초대 교부들의 성경 해석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해석에는 상당한 깊이가 있으며, 우리가 한 번쯤은 진지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클레멘트의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알렉산드리아는 지성의 중심이고 항구 도시로 크게 성장한 도시입니다. 따라서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결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부를 보며 모여든 가난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알렉산드리아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 또는 공부를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부유한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클레멘트에게는 큰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읽은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부자가 구원 받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부유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만드는 일에 있어서 충분한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치던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던지 해서, 자신도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잘 알다시피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특히 예루살렘 교회는 이러한 방식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의 대부분의 재산을 교회에 바치도록 요구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클레멘트는 예수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말씀의 깊은 의미를 파악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의 본문과 누가복음 10장에 나타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연결시키면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나오는 이야기는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을 구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청년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문맥상 그 ‘한 가지’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행동’입니다. 여기에서 말씀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는 알레고리 해석 방법이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 ‘행동’과 연결되지 않을 수 있으며, 여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누가복음 10장 마지막 부분인 38-42절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신의 집에 영접한 후에 그들을 대접할 준비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할 때, 이 본문을 사용합니다. 물론 클레멘트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는 다른 지점에 조금 더 관심을 둡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10:41-42)

이 ‘한 가지’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뿐만 아니라 ‘많은 일’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많은 일’로 근심하며 염려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계십니다.

클레멘트는 ‘한 가지’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일로, 부유한 청년에게 제시하셨던 ‘한 가지’와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많은 일’은 세상적인 욕망과 관심들이라고 말합니다. 마르다를 힘들게 만들었던 ‘많은 일’은 세상적 수고, 또는 자신이 대접하는 사람들에게 얻을 칭찬과 명예였다면, 부유한 청년에게 ‘많은 일’은 부를 더욱 쌓기 위한 욕망, 부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 부에 대한 집착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적인 부유함은 사람에게 수많은 불의한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팔아버리라고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일은 그 청년이 정말로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자신을 얽매고 있는 세상적 부에 대한 집착과 열망과 불안과 두려움을 모두 떨쳐내고 오직 하나님만을,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봐야 한다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사실 이 질문은 상당히 이상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힘들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클레멘트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옆에서 많은 말씀을 들으며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말씀의 본질을 이해했으며, 그렇기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어렵다’로 이해하지 않고, “부에 대한 세상적 감정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로 이해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그렇게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부자’를 지칭하셨지만, 제자들은 분명 ‘모든 사람’으로 의미를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클레멘트는 부유함을 갖고 있는 일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만을 바라보며 사는 삶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정신을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로 돌리고, 우리가 가진 것을 올바르게,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간다면 부유한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구 그 자체는 아무런 책임이 없지만 당신이 미숙함만큼만 보여줄 뿐입니다. 부도 그러한 종류의 도구입니다. 당신은 부를 올바로 사용할 수 있고 부는 의로움에 봉사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부를 그릇되게 사용한다면 부는 불의의 봉사자로 확인됩니다.”(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 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 14, 2-3)

지금의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는가?

▲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하 ⓒGetty Image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140년경에 태어나 190년경에 활동했던 교부입니다. 그가 부자의 구원에 대해서 쓴 글인 ‘어떤 부자가 구원 받는가?’는 대략 202년, 203년에 기록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에 기록된 글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의 글 속에서 지금 사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과연 부에 대한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생각은 그때와 달라졌는가?

아마도 교회에 모든 재산을 바치라고 명령했던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지금의 우리를 본다면, 그들은 분명 우리에게 ‘부유한 사람들’이라는 호칭을 붙일 것입니다.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비해 우리는 분명 부유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부유하다고 생각합니까?

얼마 전에 같이 모여서 공부하고 얘기하는 분들과 어떤 책을 읽다가 포이에르바하가 말했던 한 문장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일이 있습니다. 포이에르바하는 인간 해방을 위해서 절대자인 신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이 절대적이고 전능해질수록 인간은 비천해지게 된다.’는 말을 통해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비천한 존재로 만들고 있는 종교 현실을 비판하고 이러한 스스로의 억압에서 벗어나자고 말합니다.

이 문장을 두고 나눴던 이야기는, 포이에르바하의 말은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던 말이지만, 지금의 개신교에서는 이 말이 당연하고도 믿어야만 하는 말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낮고 천한 존재이며, 하나님은 높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분이시라는 이야기는 당연한 이야기이고 반드시 믿어야 하는 신앙의 기초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를 낮고 천한 존재라고 인식하는가? 물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낮고 천한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낮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높아지려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분명 다른 사람 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굽실거리면서 사는 게 아니라 누군가 위에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이건 숨길 수 없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 앞에만 서면 낮고 천한 존재임을 고백할까? 정말로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나의 초라함을 보기 때문에? 목사님이 서계신 강단에서 비춰지는 하나님의 영광에 눈이 부셔서 자신의 낮고 천함을 고백하는 걸까요?

부의 문제에 대해서 클레멘트의 책을 읽고 생각하는 가운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고 천해야만 하는 이유는 반대로 하나님 앞에서 내가 부유하고 높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아주 단순한 해답을 얻었습니다.

내가 부유하다고 고백하는 순간, 나는 내 재산을 남에게 베풀어야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외칩니다.

“하나님 나는 아직 가난합니다. 나는 베풂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지,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더 많은 부를 내려주십시오. 나에게 부유함(내 부부가 노후까지 안정적으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 수 있고, 내 자식에게도 집 한 채 정도는 사 줄 수 있을 정도의, 조금 더 쓰셔서 자식이 돈 필요하다고 할 때 어렵지 않게 돈을 내줄 수 있는 정도의 부)을 주시고 여기에 ‘여분의 부’를 주신다면, 남에게 베풀며 살겠습니다.”

한도 끝도 없는 간구일 뿐입니다. 마치 “10억짜리 복권에 당첨되게 하신다면 십일조는 분명히 바치겠습니다.”라고 간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또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바치며 “우리가 가진 재산은 이거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부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만약에 우리 안에 이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을 성도가 아니라, 나의 부를 쌓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 신성모독자들이 될 뿐입니다.

잘 사용하는 삶

저는 여러분들의 재산을 모두 교회에 바치시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고, 목회자인 제가 그런 이야기는 해서도 안 됩니다. 모두가 아니라 많이 바치시라는 얘기도 하고 싶지 않고 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의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상황이 다릅니다.

다만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허락하신 부유함을 잘 사용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악한 일에 사용하시지 마시고, 선한 일에 사용하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아직까지 그 즐거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의 즐거움을 세상적인, 경제적인 이유로 즐기지 못하는 분들을 생각하시며,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시길 바랍니다. 꼭 재정적인 지원을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만, 할 수 있는 도움을 주시고, 재정적인 후원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800년전, 부자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부유함을 가지고도 구원은 가능하지만, 세상의 부유함에 향해있는 우리의 마음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한다고 말했던 클레멘트의 이야기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유함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구원은 없고 오직 현실의 고통만이 있다는 이야기, 세상의 부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도구일 뿐이지 우리가 추구할 본질이 아니라는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저 자신에게도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세상의 부를 바라보며 사는 삶은 끊임없는 걱정, 불안, 두려움, 갈증을 낳는 삶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는 삶은 기쁨과 평안, 안정, 구원에의 환희로 가득 찬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심으로 이런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또 그 기쁨과 평안과 즐거움을 세상에 전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이렇게 되리라 믿고, 또한 온 세상에 이런 기쁨과 평안을 전하시는 성도님들 되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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