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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과 멸망망각하는 자들이 기억하는 자들을 만들었다 (3)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 승인 2019.05.02 19:12

모세의 입에서 나온 이 설교는 토라 신학의 절묘한 작품이다. 그것은 토라의 사유화 그리고 안녕과 안전의 삶 사이의 관계를 숙고한다. 그것은 토라에 대한 복종이 공적인 안녕의 필수조건(sine qua non)이라는 것이다.

두 번이나 모세는 토라에 대한 진지한 지지를 위해 엄숙한 호소를 한다(1, 5-6절). 이스라엘은 복종의 공동체이며 이스라엘의 미래 자체는 복종에 달려있다. “복종”은 권위주의적 사회적 관습과 특별히 권위주의적 종교적 전통들 때문에 나쁜 논평을 받아왔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 전통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구약성서의 그런 평이한 고정관념에 의도적으로 반대할 필요가 있다.

왜 기억해야 하나

이스라엘에게 특징적인 것으로서,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소환되고 있는 복종은 설화의 기억 속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기억에 의해 지지된다(3-4절). 이 간단한 개작한 이야기 속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기억하라고 요청한다(2절). 이스라엘은 광야를 시험하는 기간, 위험과 궁핍의 시간,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고 관대한 돌돔의 시간으로 기억해야 한다.

그때에 이스라엘이 생명의 안전보장 수단을 저장할 수 없었으며, 단지 가장 불확실한 방법으로 하늘로부터 온 빵으로서 제공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위한 매일 매일의 선물(grant)에 의존해야만 했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무서운 굶주림의 40년 동안 뜻밖의 불가사의한 생명을 유지하는 음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음식이 주어졌으며, 의복이 닳아 없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어 오르지도 않았다.

▲ 신명기는 조상들도 알지 못하는 만나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신 것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셨다. ⓒGetty Image

하나님의 생명을 유지하는 음식은 그들을 위해 충분히 족했다. 음식, 의복 그리고 발의 삼자관계는 마태복음 6:25-32에 있는 목숨, 음식 그리고 의복의 삼자관계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근심하지 말라.”

이스라엘의 기억은 하나님의 세심한 관대함이 이스라엘의 걱정스러운 궁핍을 압도하는 방법에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의 관대함은 엄청난 안녕에 관한 서정적인 진술문 속에서 이야기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미주 1)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7-10절).

그것은 모두 순수한 선물이다! 하나님은 중요한 동사들의 주어이다. 하나님께서 가져오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주셨다. 그리고 이 두 동사들 사이에는 좋은 땅-시내, 샘,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 꿀, 철, 동-즉 채우고 축복해야 할 모든 것이 있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주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풍요로운 삶의 땅으로 온다. 그러므로 그 설교의 약속은 2-4절의 옛 기억과 7-10절의 서정적 예상과 함께 나란히 놓여있다. 둘 다 토라의 복종을 위한 정황으로서 야훼의 충분함, 안전, 그리고 사치(extravagance)를 증언한다.

무엇이 망각으로 이끄는가

11절에서 설교는 명령과 경고로 변한다(11-20절). 설교는 번영이 기억상실을 야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땅의 좋고 관대한 축복은 대량의 계획적인 망각을 야기할 것이다.

잊어버리는 것들에 관한 경고들이 있다(11, 14, 17절). 연설은 서로에 대한 두 수사학적인 요소들을 다룬다. 한편으로 12-13절은 7-10절의 축복을 되돌아본다: 아름다운 집들, 소떼와 양떼, 은과 금, 모든 것이 증식된다.

다른 한편으로, 14-16절은 바위에서 물을 만드시고 광야에 빵을 보내셨던 출애굽의 하나님에 관한 2-4절의 기억을 되돌아본다. 그 병렬은 수사학적으로 현재의 풍요로움이 감사의 감수성(sensitivities)을 몰아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감사는 한없는 풍요의 가운데에서 아주 어려운 시간을 갖는다.

그 이유는 누군가 더 이상 더 작은 것을, 즉 아주 불안한 때를, 기억할 수 없을 때, 현재의 모든 은혜가 절대적인 것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감사를 불필요하고 불가능하며 심지어는 어리석은 것으로 만드는, 스스로 만들어낸(self-generated)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모세는 망각하는 백성이 자축하게 되면서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17절).

그 다음에 그곳에는 감사하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만일 감사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렇다면 조심할 사람도 없으며, 복종할 사람도 없다. 순식간에 누군가는 자율적이 되고, 자급할 수 있게 되며, 스스로 감탄하게 되고, 스스로 축하하게 되는데, 어느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되지는 않는다. 모세의 이 설교는 심리학적으로 통찰력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부와 안녕이 감사의 수용능력에 반대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멸망은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다

설교는 강력한 호소와 무서운 경고로 끝난다(18-20). 그 호소와 경고는 기억하라는 긴급한 외침(call)이다. 7-10절과 12-13절에서 제공되었던 선물의 능력을 기억하라. 너희는 생산하는 자(generator)가 아니라 수혜자임을 기억하라. 그 다음에 긍정적인 호소는 기분 나쁜 경고로 변한다: “만일 네가 잊어버리면 … 너희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그와 같은 경고는 우리 가운데 유행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경고는 어느 손쉬운 초자연론도 추방시켜야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예배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급습하여 끝을 낼 것이라는 위협이 아니다.

오히려 모세는 정치적 과정의 도덕적 차원을 이해한다. 만일 해방 중에 태어나 (출애굽) 계약 안에 위치하고 있는 (시나이) 이스라엘이 이런 기억들을 잊어버린다면, 이스라엘은 아주 빨리 이집트의 옛 권력투쟁을 연출하기 시작할 것이며, 제국의 기준들 보다 앞서 가기 위해 다시 벽돌 할당량을 실행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런 경쟁들 속으로 되돌아갈 유혹을 받을 때, 자유의 선택권과 인류평등주의 계약 공동체의 양자택일의 길은 포기될 것이다.

“멸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파괴하기 위해 행동하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세상 속에서의 대담한 사회적 실험이, 신의 강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유혹과 부식(erosion)에 의해, 사라지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현실에 대한 그들의 독특한 비전과 세상 속에서의 또 다른 방법에 대한 그들의 대담한 실천을 설득되어 행하지 않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채지 못한 채 설득되어 그것을 행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강제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주의한 태만에 의해 세상에 대한 선택(option)으로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멸망한다”는 것은 습격을 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안녕의 손쉬운 해결책을 위해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계약의 사회적 관계의 장자상속권을 한 접시의 야채와 고기를 넣은 음식과, 그리고 여러 해 계속되는 유혹을 이런 철저한 신앙과 대담한 사회적 실천의 공동체와 교환하려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번영의 땅으로 들어감으로서 이스라엘을 괴롭히게 될 선택들과 위험들을 규정한다. 모든 것은 생생한 기억에 달려있다. 모든 것은 부주의한 잊어버림에 의해 위태롭게 된다.

모든 것은 기억함과 잊어버림에 달려있다. 이스라엘이 강력히 권고를 받은 절대 필요한 기억하는 일은 아주 명백하고, 구체적이며, 축어적이고, 그리고 양식화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현재에 강력하게 들을 수 있도록 간직한 과거의 이 끝임 없이 널리 퍼지는 목소리에 달려있다.

미주

(미주 1) “아무 부족함이 없다”(lack nothing: haser)는 용어는 시 23:1의 유사한 구절 안에 있는 것과 동일한 용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want)이 없으리로다”. 그 시편의 주장은 하나님의 관대함이, 완전하게 부족이나 결핍이 없는, 풍요로움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시편에서 종교적인 단언인 듯이 보이는 것은 모세의 이 설교에서 아주 구체적인 내용을 받아들인다.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sungildab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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