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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現場)의 드러난 것과 감추어진 것(顯藏)노옥신과 오재식이 함께 걸어온 길을 한나 아렌트의 시각에서 살펴보다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 승인 2019.05.04 20:21
이 글은 원래 오재식 선생이 가신 후 1주기를 기념하여 그가 마지막으로 몸담고 있던 ‘겨자씨 교회’가 마련한 추모예배에서 읽었던 글이다. <기독교사상> 2014년 2월호에 실린 글을 이번에 남편 이정배 교수가 오재식 자서전에 대한 평을 싣은 것을 보고서 이 글도 같이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제목과 몇몇 각주만 약간 수정했다. - 저자주

모든 슬픔은, 말로 옮겨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참을 수 있다.
- 아이작 디네센(Isak Dinesen)

< I >

오재식 선생님이 가신지 1년이 되었다. 다행히도 그분은 가시기 얼마 전에 『나에게 꽃으로 다가온 현장』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남기셔서 그 삶의 이야기가 계속 회자되니 그의 부재에서 오는 슬픔이 어느 정도 경감되는 것 같다.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인가? 적어도 노옥신 사모님의 경우에는 그럴 것 같다. 오 선생님의 회고록을 보면서 그 때 마다의 현장이 다시 새롭게 떠올라 더욱 그리우실 수 있고, 또 한 편으로는 그 회고록 속에 미처 서술되지 못한 숱한 이야기들, 그 중에서는 어쩌면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 때문에 더욱 슬프실 수 있다.

오늘의 이야기를 위해서 그분의 회고록을 다시 읽었다. 작년(2013년) 겨울 장례식 이후 곧바로 미국에 가게 되어서 그곳에서 처음 읽었다. 그때 노옥신 사모님이 이어서 보내주신, 2011.7.12(화)에 있었던 오선생의 강의녹취록 <Y청년운동기획연구-알린스키 조직운동과 학생사회개발단 이야기>를 추운 겨울 밤 이국의 침대 속에서 감동으로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줄을 치고 메모를 하면서 열심히 읽었던 그 책을 내가 간직하고 싶었지만, 우리 세대에 이어서 두고두고 전해져야 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듬뿍 담긴 것을 보고서 그곳에서 기독교 윤리학을 강의하는 후배교수에게 주고 왔다. 그녀도 꼭 같이 알아야하겠기에.

어떻게 20세기 한국적 삶이 한 기독교 사상가의 운동가적 삶에서 격동적으로 펼쳐져 나갔는지를. 어떻게 그 삶의 파장이 시대의 정치와 종교, 교육 등의 물살과 더불어 이웃나라와 아시아를 넘어서 전 지구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는지를. 그렇게 해서 역사가 만들어지고 인간의 삶이 변화하지만 그러나 거기서 가장 가까운 가족의 삶은 어떠했으며, 특히 그 아내의 삶에 대해서는 무엇이 말해졌는지를. 오 선생님이 반복적으로 말씀하신 ‘현장’(現場)의 삶에도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진 것들이 많이 있을 터인데, 그것이 가장 가까이에서 그 격동의 현장들을 함께 지나오신 노옥신 사모님의 경우에 제일 해당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내가 오 선생님을 통해서 한국 기독교 에큐메니즘과 그와 연결된 20세기의 역사에 대해서 배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오 선생님의 소개로 2010년 6월 기독학생 청년운동 4인방의 한 사람으로 불리던 <박상증 목사 평전출판 기념심포지엄>의 논문을 준비하면서 한국 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의 전개와 거기에 오재식을 비롯한 4인방(강문규, 박상증, 손명걸, 오재식)의 역할이 무엇이었으며, 세계교회협의회(WCC)나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한국교회협의회(KNCC) 등이 7-80년대 한국과 아시아의 민주화를 위해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을 배울 수 있었다.

▲ 노옥신 선생님께서 남편 오재식 선생님의 유품들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기증했다. ⓒNCCK

지난 10월 부산에서 열렸던 제10차 WCC 부산총회를 통해서 그간의 사정들을 더욱 실감 있게 살필 수 있었는데, 이번 총회가 WCC 역사상 처음으로 최고 실행위원회 의장으로 선출한 여성이 오 선생님이 회고록에서 이미 1993년 유능한 여성임을 알아보고 같이 일한 것을 언급한 케냐 성공회 출신 평신도 여성 아그네스 아부엄(Agnes Abuom)이라는 것을 알고서 매우 놀랐다.(미주 2) 그렇게 오 선생님은 시대를 앞서가는 안목이 있으셨고, 이번 총회가 1961년 뉴델리 총회 이후로 32년 만에 새롭게 채택한 <기독교 선교와 전도에 관한 새로운 문서(Together Towards Life: Mission and Evangelism in Changing Landscapes)>를 보면 오 선생님이 이미 살아오셨던 ‘현장’의 삶, ‘공간’의 확장에 대한 이야기, ‘생명 살리기’가 그의 모든 활동과 판단의 궁극 원리였던 것 등이 같이 잘 중첩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번 새로운 선교문서는 이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넘어서 “(성)령의 선교”(the mission of the Spirit)를 말하면서 선교를 전 우주의 생명의 차원으로 확장하고 거기서의 각 생명의 자발성과 주체성, 중심성을 그 출발점과 목표로 삼을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 II >

멀리 제주도로 가는 길목의 추자도에서 1932년 12월 5일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나신 오 선생님은 어린 시절부터 그 안의 생명체의 빛과 힘이 강렬했던 것 같다. 저항을 받으면 그 빛이 더 강해지듯이 어린 시절 집안의 묘자리 문제로 부잣집에 끌려가서 매 맞던 형님을 보고서 느꼈을 분노와 슬픔, 교회에 다닌다고 학교 입학이 안 되서 겪어야했던 좌절과 외로움, 일찍이 부모님 곁을 떠나서 낯선 외지에서 형님과 더불어 두 형제가 삶을 헤쳐 나가면서 겪었을 모든 시련과 고통, 그 가운데서도 어린 선생님은 주기철 목사의 산정현교회를 다니면서 그 신앙을 깊이 새겼다.

그래서 중학교 입학시험의 면접이 주일날 치러지는 것에 저항하면서 거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이렇게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얻어진 신앙중심의 보수적인 신앙과 이후 함석헌, 김재준, 강원룡 등의 한국 교회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그룹의 신앙과 지성을 만나 함께 흡수하면서, 그러나 그 둘이 자신 속에서 충돌하지 않고 모두 잘 받아들여져서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고 누차 말씀하신다.(3)

월남 후 중앙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당시 그 학교의 윤리선생이던 김형석 교수의 인도로 기독학생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6.25전쟁 중의 부산피난시절에도 강원룡 목사님의 인도로 모이던 성화회라는 기독학생모임에서 평생의 반려자 노옥신 사모님도 만났다고 한다. 당시 노옥신 사모님은 무학여고 대표였는데, 비록 전쟁이 나서 황폐한 조국이었지만 그것을 넘어서 새 시대의 새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선동”하는 강 목사님의 열정에 동감하면서 평생지기의 싹을 키웠다고 전한다.

수복 후 서울로 올라와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학생으로서 경동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문리과 기독학생회 회장으로서 안병무, 한철하, 박순경, 조요한, 양우석 등을 선배로 두었으며, 1953년 한국 장로교가 김재준 목사 면직사건으로 예장과 기장으로 갈라지자 오 선생님은 개혁적인 대한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KSCF)를 지키기 위해서 애를 썼다. 당시 이화여대 영문과 학생이던 노옥신 사모님도 아버지 노병희 씨가 영락교회의 한 창립멤버였음에도 불구하고 경동교회에 출석하면서 KSCM 사무실에 자주 들러서 같이 일했다고 한다.(4)

오 선생님의 삶은 이렇게 기독학생운동이라는 청년학생운동과 더불어 시작되고 전개되었고, 항상 청년운동이라는 화두와 더불어 생을 살아오신 것을 알 수 있다. 대학 졸업 후 군대, 결혼, 폐결핵 요양을 거친 후 그는 1960년 대학 YMCA, 학생 YWCA, 대한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KSCF)가 연합하여 만들어진 기구인 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KSCC)의 초대간사가 되었다. 이것은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만들어지는데 모체 역할을 했던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의 운동을 학생으로서 해왔다가 이제 직원으로 실무를 맡게 된 것을 말한다.(5)

이렇게 기독 청년학생운동을 통해서 당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한없이 낙후되어 있던 한국사회를 일으키려는 노력 가운데서 그는 WSCF에서 나오는 한 잡지를 통해 ‘프레젠스’(presence)라는 개념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개념에 대해서 당시 학생기독운동을 뒤에서 써포트 하고 끌어주던 기독자교수협의회 신학자 그룹들이 토론하는 가운데 ‘현존’이라고 하는 한국 민중신학의 핵심어가 탄생한 것을 말한다.(6)

오 선생님은 안병무 박사가 나중에 「현존」이라는 이름의 잡지를 낸 것도 지적했다. 70년대로 오면 이 현존이라는 개념은 ‘현장’으로 바뀌고, 70년대 들어와서 한국의 ‘민중신학’(Minjung Theology) 내지는 ‘민중’(Minjung)의 개념이 외국에서도 고유명사로 쓰일 정도로 알려진 데에는 이처럼 청년학생과 노동자와 농민 등의 구체적 민중적 삶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관심했던 오 선생님의 현장의식이 하나의 씨알로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7)

오 선생님의 이러한 현장의식과 민중의식은 KSCC 간사로 있으면서 함께 일했던 미국 선교사 레이니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하고 거기서 지역주민조직운동가 조지 타드(George Todd) 목사와 그들 운동의 지도자 소울 알린스키(Saul Alinsky)를 만나면서 더욱 확고해지고 깊어진다. 힘없고 가난한 지역사회 주민들을 조직하고 의식화해서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데 어떠한 조직가의 삶과 역량이 필요한지를 배우고 온 그는 귀국 후 YMCA 전국연맹의 대학생부 간사가 되었다. 마침내 1969년 KSCM과 YMCA가 합쳐져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Korea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이 새롭게 출발하게 되자 그는 초대 사무총장으로서 ‘학사단’(학생사회개발단) 운동을 전개한다.

나는 여기서 그의 뛰어난 주체의식과 민중의식이 꽃을 피우는 것을 본다. 그는 60년대의 척박한 한국적 상황에서도 미국의 평화봉사단 청년들이 한국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의 문제를 왜 미국에 맡깁니까? 우리가 맡읍시다.”라고 하면서 한국 학생들의 역량을 믿었고, 이 학생들을 “죽을 때 침대에서 죽을 생각하지 마.”라고 할 정도로 급진적으로 훈련시키는 알린스키의 지역사회 조직론으로 훈련시켜 2-3명씩 소그룹으로 조직해서 빈민들의 삶의 현장으로 보냈던 것이다.(8) 이와 더불어 오 선생님이 베이스캠프가 되어서 조지 타드와 허버트 화이트 목사의 지원으로 한국에 세워진 도시문제연구소의 도시선교의 일은 이미 감리교 선교사 조지 오글에 의해서 시작된 도시산업선교회의 산업선교와 함께 70년대 한국 기독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오 선생님이 청계천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과 맞닥뜨린 것은 바로 이러한 현장의 삶에서였다. 그날(1970.11.13) 우연히도 새문안교회에서 연세대의 서남동 교수가 주관하는 “현장과 신학계의 역할”이라는 강좌가 열리고 있었고, 거기서 “현장이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학사단의 활동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던 오 선생은 바로 22살의 노동자 청년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고서 이런 것이 바로 현장이라는 말을 던지고 그에게로 달려간다.

오 선생은 그해 「기독교사상」 12월호에 그의 죽음을 “어떤 예수의 죽음”으로 풀어내면서 예수와 한국 노동자청년 전태일을 급진적으로 등가화 시키는데, 나는 오늘날까지도 어떤 급진적인 신학자라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이러한 선언이야말로 한국이나 세계에서의 여느 신학자의 기독론보다 더 창조적이고 앞서 간 것이었다고 보고, 여기서 그의 형 오재길 선생을 통해서 만나게 된 씨 사상의 함석헌 선생의 영향을 가장 핵심적으로 생각한다. 그는 함석헌 선생의 동양사상과 민족사상, 통일사상을 김재준 목사의 혁신적인 서양 문명의 사상과 더불어 자신 사사의 “두 기둥”이 되었다고 표현했다.(9)

< III >

▲ 오재식 선생님(사진 좌), 한경직 목사(사진 가운데) 그리고 노옥신 선생님(사진 오르쪽) ⓒ한겨레

이후 이어지는 선생님의 삶은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CCA-URM)와 국제부(CCA-IA) 간사를 맡게 되면서 도쿄에 거주하며 70년대 한국과 아시아의 민주화에 헌신한 일, 80년대 초 다시 귀국해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선교훈련원과 통일연구원 원장을 역임하면서 평화통일운동에 매진한 것, 그러나 이후 50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스위스의 제네바로 건너가서 세계교회협의회(WCC) 개발국장(CCPD)과 제3국장(JPIC)으로 일하면서 한국과 아시아 등에서의 정의와 평화, 생명신학의 문제를 세계교회협의회 일의 중심에 들어오도록 한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환갑 때까지는 꼭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사모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한국에 돌아와서는 다시 당시 새롭게 일어난 참여연대의 창립대표를 맡았고, 한국크리스챤아카데미의 사회교육원장, 이어서 한국 월드비전(World Vision)의 회장을 맡으면서 대북지원의 일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71년부터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 간사로 도쿄에 사실 때 도쿄는 한국의 모든 해외연결의 센터였다고 한다. 그렇게 “사통팔달이 된 도쿄”에서 선생님은 점점 더 암울해져가는 국내 박정희 독재정치의 억압적 상황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 중에서도 선생님을 통해서 일본에 머무르게 된 지명관 교수에게 한국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민주화 관련 자료들과 정보들을 비밀리에 모아 건네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인 ‘TK生’을 쓰게 한 일이 길게 서술된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철통같은 보안으로 국내의 민주화 관련 투쟁 소식이 알려지지 않고 외국으로도 전해질 수 없던 상황에서 이 「세카이」라는 일본잡지에 무려 16년간이나 매달 원고지 70-100장에 달하는 격동의 한국소식을 싣게 한 일이 한국 정치와 사회뿐 아니라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의 변화를 위해서 어떤 역할을 했을지는 잘 상상할 수 있다. 이 일이 가능하게 된 핵심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조직의 귀재”라고 불리운 오재식 선생님의 인적 네트워킹 능력이 있었다.

오 선생은 도쿄에 터를 잡고서 CCA의 해리 다니엘, 조지 타드, 도쿄 사무실의 다케나카 교수, NCCJ 총무 나카지마목사, 제네바의 박상증 목사, 한국 NCCK의 김관석 목사, 기독학생회의 안재웅 등의 인적 네트워크를 말하고,(10) 이와 더불어 “조금씩 역사는 만들어졌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수많은 “‘개매떼’의 활동”에 대해서 서술한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 갖가지 방법으로 한국에서 자료를 빼내오는데 역할을 했던 수많은 국내외 개미떼들의 활동이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을 종식시키는데 힘을 보탰으며, 그래서 그는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연대라는 것은 약한 사람의 입장을 존중하고 그 입장을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이라는 오늘날의 패권과 경쟁위주의 삶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원리를 말한다.(11)

그에 따르면 당시 WCC 도시농촌선교회(URM)의 예산 200만 달러 중 절반이 아시아 도시농촌선교회(CCA URM)를 위해서 쓰였고, 그 중 다시 절반이 한국의 도시산업선교와 민주화를 돕기 위한 자금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대한 오 선생님의 서술에서 나오는 이름들을 보면 김용복, 권호경, 김동완, 박형규, 딕 우튼 호주 선교사(Dick wootton), 야스에 료스케 잡지 편집장, 이경배 NCCK 국장, 윤수경 간사, 신필균, 장성환, 이삼열, 독일인 폴 슈나이스, 피플스 포럼 간사 시오자와, 미국인 패리스 하비, 재일교포 인권운동가 이인하 목사, 미국 감리교 선교부 총무 페기 빌링스, 패리스 하비, 팻 패터슨, 스미야 미키오 노동경제 교수, 신카이 일본 병원장 등이 있다.

내가 오재식 선생님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알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한민족의 통일운동에서 그 결정적인 물코를 튼 사건이 되는 1984년의 일본 도잔소 회의와 이후 1986년 스위스의 글리온(Glion)에서 열린 첫 번째 남북 교회의 만남이 모두 오재식 선생님의 리더십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선교훈련원과 통일위원회 원장을 맡고 있을 때 그는 국내에서는 정부의 간섭으로 통일협의가 잘 진척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자 WCC 국제위원회에 연락을 해서 WCC가 남북한 공동의 국제회의를 열어줄 것을 요청했고, 그 요청이 수락되어서 일이 진척된 것이었다.

그 진행 가운데서 1988년 1월에 완성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은 제1차 글리온 회의가 열리던 1986년 한․북미교회협의회에서 ‘분단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쓴 서광선 교수의 통찰을 통해서 ‘죄책 고백’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다고 하셨다. 즉 그때까지의 한국 신학의 틀이 분단을 기정사실화하고, 또 그 자체에 대해서 질문할 힘을 갖지 못했으며, 분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 온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적해 주었기 때문이다.(12) 이러한 준비과정 속에서 완성된 <88선언>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한국교회의 공식입장으로 자리잡아서 작년 제10차 부산총회에 발표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선언>에서도 여전히 기본 골격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일들이 모두 오재식 선생님의 액션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1995년 해방 50주년을 기념한 한국교회의 ‘희년 선포’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을 알고서 감회가 새로웠다. 왜냐하면 내가 90년대 초부터 같이 참여해온 한국여신학자협의회나 교회여성연합회의 사업에서 이 희년사업이 큰 비중을 차지했었고, 그 일을 위해서 모두가 애를 많이 쓴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90년 서울에서 열렸던 JPIC(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정의․평화․창조질서의 보존) 대회도 1988년부터 스위스 제네바의 WCC 본부에서 개발국장으로 계셨던 오 선생님의 수고가 녹아있는 작품이고, 1991년 제7차 캔버라 WCC총회 주제강사 정현경 교수의 선정에도 오 선생님이 결정적인 에이전트였다는 것도 나에게는 매우 흥미로웠다.

오 선생님이 다시 한국에 오셔서 1997년부터 맡으신 한국 월드비전의 일에 대한 서술 가운데서 나에게 가장 감명 깊게 다가온 이야기는 그의 ‘월드비전 역사바로잡기’이다. 월드비전은 1950년 한국전쟁과 더불어 탄생했는데, 2000년 50주년이 되자 국제본부에서 50주년 행사를 준비하는데 한국은 빼놓으려 했다고 한다. 전쟁으로 1953년 휴전이 되어서야 등록을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고 하는데,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오 선생님은 강하게 반발하면서 그러한 셈은 철저히 강자와 주는 자의 입장에서 나온 판단이고, 한국이 50년부터 도움의 수혜자로서 역할한 것은 왜 계산하지 않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즉 월드비전의 시작이 왜 주는 자의 입장에서만 계산되느냐는 주장이고, 그것은 수혜를 받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제국주의적 판단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한국 월드비전의 역사를 1950년부터 정리해서 역사학자 민경배 교수에게 50주년사를 쓰게 했다고 한다.(13)

여기서도 나는 오 선생님의 삶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약자와 민중과 씨알에 대한 거룩한 주체의식과 현장의식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북한에 대한 지원사업에서도 그들의 자존감을 상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고, 지원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그들이 스스로 서는데 도움을 주는 근간사업(국수공장, 수경재배사업, 씨감자 프로젝트)에 주력했으며, 그는 어떠한 지원에서도 “도와줬다는 표시를 안 내는 것이 기본”이라는 생각으로 행할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14) 그는 “신학과 교리를 앞서가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해서 말한다. 또한 “현장이 스스로 나와서 우리에게 코멘트(comment)한다고 생각한다.”고 고백한다.(15) 이렇게 그는 일관되게 끊임없이 현장과 지금 여기의 너와 나와 약자와 도움의 수혜자가 하나님의 감추어진 거룩이 현시되는(顯藏) 바로 그 현장임을 증거한 것이다.

< IV >

그런 오재식 선생님도 진정한 현장으로 발견하지 못한 곳이 있는 것 같다. 바로 노옥신 사모님의 현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그는 사모님을 “평생지기”라고 표현했고, 자신 회고록의 한 장을 특별히 “노옥신, 그의 이름을 부르다”라는 제목으로 따로 마련해서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의 집안과 학창시절과 어떻게 그가 어렵게 결혼해서 동구여상의 교사생활을 하면서 연년생의 딸아이들을 키우며 고생했는지를 말한다. 신의주에서 금정상회라는 큰 상점을 했고, 남한으로 내려와서는 부친이 흥국생명의 사장도 했고, 지금의 대한화재 설립자이기도 했다는 부잣집 딸로서 가난한 신랑과 결혼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한 친정과 결별하며 결혼한 사모님의 가족 이야기도 그 안에 들어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재식 선생님이 그 사모님을 진정으로 사적 삶의 동반자를 넘어서 공적 삶의 동지와 동반자로도 여겼는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은 거의 사적 삶과 관계된 것이고, 그가 스스로도 고백하듯이 월드비전 회장 시절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월급봉투를 가져다 준 적이 없을 정도의 삶이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사모님이 어떻게 수고하고 노동하여 모든 가정살림을 이끌어왔고, 그에 더해서 어떻게 수많은 손님접대와 환대와 더불어 심지어는 직원들의 모자라는 월급까지도 사모님이 마련한 돈으로 썼다는 이야기들에 그치기 때문이다.(16)

물론 이러한 사모님의 역할과 일은 결코 폄하되거나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수고의 정도와 노동의 강도가 더욱 밝혀져서 그에 합당한 평가가 주어져야 한다. 오 선생님의 회고록을 보면 그의 두 번의 미국 체류에 사모님이 동반한 적이 없고, 일본이나 스위스로의 이사나 귀국에서도 사모님은 항상 아이들의 교육이나 집안정리 등으로 늦게 합류하거나 늦게 귀국하는 등의 수고가 있었다.

예일 대학교 유학 시절 사모님이 마련한 불광동의 대지 60평, 건평 10평짜리의 국민주택 이야기, 그곳에서 닭을 키워서 아이들에게 매일아침 달걀을 먹인 이야기, 도쿄에서의 생활에서 사모님이 일어교사 등으로 생활비를 벌면서도 어떤 경우는 한 달에 20일이 넘을 정도로, 심지어는 오 선생님이 외국에 나가 집을 비워도 찾아오는 수많은 손님의 교통비며 식비까지 감당하기 위해 화장품 판매까지 해야 했다는 이야기, 제네바에서는 아이들이 세 나라에 각각 흩어져있어 안타까워했던 스토리, 그런 가운데서 프랑스어까지 배우는 열정의 생활이었고, 오 선생님과 살면서 거의 70%는 떨어져서 사는 ‘에큐메니칼 과부’의 생활을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어떻게 우리가 가볍게 볼 수 있겠는가?

오히려 이런 사모님의 헌신과 뒷받침이야말로 오선생님 일의 진정한 기반이었고, 그가 오 선생님을 “믿는 마음이 99%도 아닌 100%”라고 종종 말했다는 사모님의 믿음이야말로 오선생님 활동의 참된 밑거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오선생님도 회고록의 서두에 병이 발병한 후 집에 많이 있다 보니 그때까지 자신의 삶은 시간이 지배해온 삶이었다면, 이제 거기서 해방되어 살펴보니 지금까지 그 안에 있으면서도 잘 발견하지 못했던 옆사람의 공간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고백하였다.(미주 17)

하지만 나는 이러한 인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노옥신 사모님과의 첫 만남은 그가 여학교 시절 재기발랄하고 똑똑한 기독애국 청년그룹의 동등한 멤버로서였다. 또한 사모님은 그때 경동교회 강원룡 목사님의 지도로 “인간혁명”이라는 주제로 전국웅변대회에 나가서 1등의 대통령상을 수상할 정도로 말 잘하고 똑똑한 학생이었으며,(18) 이후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3개 국어 이상을 하며 시대의 여성리더로서 충분히 자격을 갖춘 드문 경우였기 때문이다.

예전 함석헌 선생님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는 나라의 가장 미천한 사람에게서도 하늘의 씨ㅇ·ㄹ을 발견한 큰 사상가였지만 자신의 부인 황득순 여사에게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는 1978년 5월8일에 부인이 숨지자 “나의 가장 큰 잘못은 그를 내 믿음의 친구로 생각하지 못한 점입니다.”라고 고백하였다.(19) 그 부인 황득순 여사는 아이들이 “나야 뭐”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고 할 정도로 철저히 ‘자신을 버리면서 남을 따랐고’(捨己從人), “스물에 가까운 큰 가족에 밤낮 손님이 끊이지 않는 집의 맏며느리로서 불평 한 번 없이 섬김으로만 살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그토록 주장하고 강조해온 씨ㅇ·ㄹ 중의 씨ㅇ·ㄹ이었을 터이지만 함 선생은 자신의 부인을 씨ㅇ·ㄹ로서 알아보지 못했다.(20) 여기에 더해서 노옥신 사모님은 황득순 여사의 경우와는 다르게 당시 여성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결혼동반자로서의 출발에서부터 경우가 아주 달랐지만, 오선생님이 “나에게 가려 재주 많은 아내는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된 것이다.(21)

그래서 나름대로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다시 오 선생님이 그렇게 강조한 알린스키의 주민조직방법론이 생각났다. 사람들을 무대에 올리고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준비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행사가 벌어지면 조직가는 무대에서 빠져 강단 뒤로 물러서라, 절대 무대 가까이 가지 마라는 등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22) 이렇게 자기 자신과 관계해서도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버리는 방식을 고수해온 선생님이 어떻게 더군다나 자신의 부인을 내세울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오 선생님이 일생동안 삶의 굽이굽이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김정문 알로에의 창시자 김정문 선생의 삶도 그와 유사했기 때문에 일생동안 우의를 다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오 선생님은 기독학생청년운동과 사회운동, 평화통일운동을 할 때 자신은 박사도, 목사도, 교수도 아니었지만 그런 사람들을 묶어내는데 탁월한 재주와 능력이 있었다고 그의 친밀한 후배 안재웅 목사는 전한다. 그의 회고록 간행사에서 서광선 교수님도 “오재식 선생의 ‘CIA’”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즉 우리의 70년대 군사독재시대에 한국의 중앙정보부(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도 무서웠지만 오재식 선생의 CIA, 이 경우에는 Christian Intelligence Agency도 막강했다는 이야기인데,(23) 위에서 말한 사모님의 삶과 관계된 오 선생님의 한계는 이렇게 자신을 철저히 無로 돌리는 방식으로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아시아의 교회들을 한 네트워크로 묶어서 아시아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온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가지는 인식과 방식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와 같은 정도로 오선생님과 사모님은 두 분 모두 드러나는 陽의 삶에 대해서는 감추어진 陰의 역할을 담당하신 것이고, 다시 좀 더 드러나는 오재식 선생님의 陽的 삶에 비해서 사모님은 보다 감추어진 陰의 삶을 사신 것이지만 어떻게 이 음과 양, 다른 많은 경우에는 두 역할이 계속 바뀌는 음양을 따로 나눌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의 삶도 유사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 V >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삶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하고, 어떻게 하면 인간의 모여 삶이 인간다워질 수 있을까를 묻는 ‘인간조건’(The Human Condition)에 관한 진지한 성찰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태어남과 동시에 자신을 현시하고픈 욕구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인간이 말과 행위를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것은 결코 어떤 개인이 특별히 더욱 잘난 척 하려는 것이라거나 단순한 사적 이기심의 발로가 아니다.

▲ 동지이자 동갑내기 친구로, 부부로 함께 한 오재식 선생님과 노옥신 선생님 ⓒ한겨레

오히려 그것은 그 자신의 탄생과 더불어 함께 가지고 온 자신만의 새로움(newness)과 고유성을 드러내면서 그렇게 서로 간의 다양성 속에서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려고 하는 자연스러운 인간다움이며, 인간 고유의 ‘창발성’(an initiative)의 발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창발성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결코 억눌려질 수 없고, 인간이 태어나면서 모두가 선험적으로 가지게 되는 질문, “너는 누구이냐?(Who are you?)에 나름대로 대답해야 하는 내적 명(命, destiny)의 표현이라는 것이다.(24)

이러한 표현이 잘 되지 못하면 인간은 우울해지거나 냉소적이 되며, 폭력이나 쾌락에 빠지고 점점 더 껍데기가 되어간다. 그래서 인간다운 사회와 공동체란 이러한 각자의 창발성과 내적 命(명)이 큰 어려움 없이 표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이고, 정치의 역할이란 바로 그러한 현시의 공적 토대를 마련하고 보장해 주는 일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드러남은 또한 그 드러남을 함께 봐주는 사람, 같이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주인공이 되어서, 그러나 더 많은 경우는 다른 주인공들의 말과 행위를 보아주는 관람객이 되어서 서로와 더불어 함께, 그러나 다르게 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창발성과 현시의 고유성과 인간 조건성 때문에 서구적 인간 삶에서보다도 훨씬 더 ‘드러내지 않음’과 감춤, 자기 비움과 겸비를 강조하는 아시아의 문화에서도 ‘수고와 노고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함’(『역경』의 언어로 하면 ‘勞謙’)을 인간 최고의 미덕과 복의 근원으로 삼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겸비의 덕이 오래되고 쌓여서 자연스럽게 내면에서 울리고 드러나는 일, 즉 ‘명겸’(鳴謙)에 대해서 말한다. 그만큼 우리의 삶은, 아니 존재로 불리어졌다는 것 자체는 이 자기 현시의 기회를 요청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노옥신 사모님과 오재식 선생님은 오늘 우리 시대보다도 이 자기현시가 훨씬 더 어려운 시대을 사셨고, 많은 제약을 받던 시간을 보내셨다. 매우 비인간적으로 성별과 학벌과 재산의 많고 적음과 이미 견고하게 짜인 기독교회 내의 성직체제 등에 의해서 억누름과 저항이 심하던 시대였다. 특히 여성의 몸으로 아내와 어머니로서, 또한 생의 동반자의 드러남의 일을 위해서 온갖 접빈객의 일을 떠안으면서 사셨던 노옥신 사모님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우리는 많이 우울하고, 아프고, 삶의 의지와 용기를 점점 잃어버리고, 짜증을 쉽게 내고, 아니면 그런 우리의 우울과 상심을 감추려고 사이비 명랑함 속에 빠지거나 감정의 정직함과는 거리가 먼 날들을 살게 된다. 그런 삶의 상황을 나 자신도 어려서부터 잘 알았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 여기서 나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즉 그 엄마의 우울을 견뎌내야 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빠가 자주 그리고 불규칙하게 오래 부재하는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엄마가 우울한 것은 제일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에게는 부재하는 아빠 대신에 엄마가 자신들의 유일한 존재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 토대가 흔들리는 것이 두렵고 싫고, 그 아이들 중에서 특히 감수성이 뛰어난 아이, 예민한 아이, 형제들 중에서도 쉽게 치이는 위치에 있는 아이는 그 엄마의 우울함을 다른 아이들보다 더 예민하게 느껴서 더 두렵다. 그래서 그 아이의 어린아이적 명랑함은 일찍 날아가버리고,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엄마 곁을 쉽게 떠나지 못하면서 엄마의 가장 성실한 도우미가 되지만 그 아이의 우울도 깊어간다. 그래서 내면에서 엄마랑 갈등하고 아빠를 더욱 그리워하지만, 그러나 나는 이제 말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러한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삶은 이제 단지 엄마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토대가 함께 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이제 늙고 병들어서 반대로 아이가 된 엄마를 우리가 껴안아야 한다는 것을. 또한 우리는 이제 그 엄마를 단지  우리의 엄마로만 보지 말고 오히려 그 엄마도 또 하나의 시대의 아이였다는 것, 그 안에 뛰어난 창발성과 위대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것을 펼칠 기회를 잘 갖지 못해서 고통 받고 갈등하던 또 다른 시대의 여성이었다는 것,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 엄마를 껴안아야 한다는 것, 나는 이런 생각들을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엄마에게도 이제 엄마가 늙고 병들었지만 엄마는 여전히 우리의 엄마이며, 아이들은 지금도 엄마의 우울과 말없음과 부정직을 제일 힘들어 한다는 것, 그래서 엄마는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서 많이 그렇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렇게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는 날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날마다를 새로운 날과 평안한 날, 잔잔한 기쁨의 날로 만들어 달라는 것을 부탁하고 싶다.

‘삶의 행위자로서 모든 인간이 우선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그것이 자연적 필요에서든 자유의지에 의해서든 관계없이 자신의 이미지의 현시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만의 고유한 현존을 원하고, 그렇게 인간의 삶은 행위 안에서 그 존재가 더욱 강렬해지기 때문에, 거기서 삶의 기쁨이 따른다. 그러므로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감추어진 자아를 드러내지 못하는 행위는 행위가 아니다.’(25)

나는 여기 지금의 겨자씨 공동체도 오래전 인류의 스승 단테가 말한 이 지혜를 더욱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이 공동체에 속한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자신을 현시할 기회를 얻고, 진정한 관객이 되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로 떨어져 있지 않고, 그래서 서로 다르지만 어떤 인위적인 조건에 의해서 행위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지 않는 교회, 서로 돕고, 서로 주인공과 관객이 되어주고, 그 서로 다른 고유성의 현시에서 진정한 기쁨과 감사를 느낄 수 있는 교회, 여기서의 청년들과 여성들과 평신도와 가난한 사람들과 노인이 소외되지 않고 진정으로 놀이의 마당을 발견할 수 있는 곳, 그것이 진정한 에큐메니칼 운동이고, 학생운동을 그렇게 중시 여겼던 오 선생님의 뜻이고, 실제 평생을 교사로서 살림살이를 살아오신 노옥신 사모님을 더욱 귀하게 하는 길일 것이다.

내가 동아시아적 십자가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역경』의 한 구절은 “이어주고 계속하는 일은 선하고, 그것을 이루고 완성하는 일은 (우리의) 운명이다.”(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라고 했다. 나는 노옥신 사모님과 오재식 선생님의 삶이 바로 이런 길이었고, 이제 비록 여기 이 땅에는 혼자 남으셨지만 노옥신 사모님의 남은 길도 여기 도상에 있다고 생각한다.(26) 이 길에 우리 모두도 초대되었다. 행위자로서, 이야기꾼으로서, 관객으로서, 말을 전달하고 판단하는 자로서 우리는 모두 함께 있다.

미주

(미주 1) Hannah Aredndt, Men in Dark Times, A Harest Book, 1968, pp. 95-109;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홍원표 옮김, 인간사랑, 2010.
(미주 2) 오재식,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오재식 회고록』, 대한기독교서회, 2012, 305쪽.
(미주 3) 같은 책, 51쪽.
(미주 4) 같은 책, 77쪽.
(미주 5) 같은 책, 82쪽.
(미주 6) 같은 책, 96쪽.
(미주 7) 같은 책, 178-180쪽.
(미주 8) 같은 책, 113, 126, 139쪽.
(미주 9) 같은 책, 55쪽.
(미주 10) 같은 책, 185쪽.
(미주 11) 같은 책, 227쪽.
(미주 12) 같은 책, 270쪽.
(미주 13) 같은 책, 323쪽.
(미주 14) 같은 책, 342쪽.
(미주 15) 같은 책, 355쪽.
(미주 16) 같은 책, 382쪽.
(미주 17) 같은 책, 28쪽.
(미주 18) 같은 책, 375쪽.
(미주 19) 『씨ㅇ·ㄹ에게 보내는 편지 2』함석헌 저작집 9권, 213쪽.
(미주 20) 이은선, 「왕양명의 ‘良知’와 함석헌의 ‘씨’, 생물권정치학(biosphere politics)시대를 위한 존재사건」, 『양명학』, 한국양명학회, 2012.
(미주 21) 오재식, 같은 책, 394쪽.
(미주 22) 같은 책, 113-114쪽.
(미주 23) 같은 책, 8쪽.
(미주 24)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2001, 235쪽 이하.
(미주 25) 한나 아렌트, 같은 책, 235쪽의 글을 재편집.
(미주 26) 사실 이 글을 쓸 당시 노옥신 사모님은 건강하신 편이었다. 오 선생님이 가신 후 그가 남기신 많은 자료들을 보고서 나는 노옥신 사모님이 직접 그것들을 정리하고 보완해서 손수 책을 쓰시고 두 분의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시라고 자주 말씀드리곤 했다. 그리고 당시 나도 그런 일을 도와드리겠다고 했지만 그 이후 사모님은 크게 아프셨고, 나는 이후 일어났던 세월호 참사 등, 많은 일들로 병원에도 잘 찾아가 뵙지 못한 불충한 사람이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은데, 항상 말과 행위의 이분 앞에 떨뿐이다.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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