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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야 올라가라, 대머리야 올라가라”무엇을 가르칠까?(왕하 2:23-25)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5.05 17:51
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4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25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오늘은 5월 5일 어린이날입니다. 어린이주일이기도 합니다. 저도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기에 요즘에는 아이에게 어떤 세상을 이어주어야 하는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무엇을 전해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우리 어른들의 잘못을 고백하고 우리의 잘못을 뉘우쳐야 한다는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좋은 세상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점이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주일에 아이들에 대한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아이들이 나오는 성경 말씀들을 찾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어린이주일에 걸맞지 않는 본문으로 보입니다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전해야 할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엘리야를 계승한 엘리사

오늘 본문은 사실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하기 꺼려하는 내용입니다. 어쩌면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종을 모욕하면 이렇게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사용할지도 모를 본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은 설교할 때에 본문의 내용을 약간 각색하기는 합니다. 엘리사가 아이들을 저주해서 죽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니까, ‘작은 아이들’이라는 부분을 ‘젊은 청년들’로 고치기도 합니다. 또, 벧엘에는 여로보암 때에 만들었던 금송아지가 있기 때문에 우상숭배의 산지였고, 이 아이들은, 또는 젊은이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먼저 이 ‘저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보고, 이 저주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의미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엘리야가 승천할 때가 되자, 엘리야와 엘리사는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으로 이동합니다. 엘리야는 요단에서 승천하였고, 엘리야가 승천하기 직전에 엘리사는 자신에게도 엘리야와 같은 능력이 주어지기를 간구합니다.

엘리야가 승천한 후에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들고 엘리야가 요단에서 행했던 기적인, 물을 갈라지게 하는 기적을 행합니다. 다음으로 여리고로 와서는 농업 용수로 쓸 수 없는 물을 고쳐서 쓸 수 있게 만듭니다. 그 후 벧엘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오늘의 본문이 나옵니다.

전통적으로 열왕기하 2장의 이야기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정통성을 이어받았고, 그의 능력을 이어받았음을 설명하는 본문으로 읽혀집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와 같은 이적을 행할 수 있었고, 엘리야와 같은 저주를 행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경우에는 아하시야가 보낸 병사들을 저주하여 죽게 만든 일이 있습니다(열왕기하 1장 참고).

엘리사의 저주

우리는 분명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엘리사에게 기적과 저주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게 되었음을 볼 수 있고, 이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에게 능력이 주어졌다고 해도 그가 아이들을 향해서 저주를 내리고, 또 아이들 42명이 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요즘 시대의 감성으로는 조금 꺼려지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의 내용을 조금만 더 자세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 엘리사를 조롱하던 어린아이들을 엘리사가 저주했다는 본문은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많은 시서점을 던져주는 본문이다. ⓒGetty Image

우선 작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향해서 조롱하며 외칩니다. “대머리야 올라가라, 대머리야 올라가라”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많은 분들이 이 ‘아이들’이라는 히브리어 ‘나아르’가 성인식을 거친 12세 이상의 젊은이를 뜻하기 때문에, 이 ‘아이들’은 철없는 아이들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청년들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엘리사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옹호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분들은 어린이들(네아림) 뒤에 붙어 있는 ‘작은(께따님)’을 무시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이들은 ‘젊은 청년’이라기보다는 ‘작은 아이들’이 맞습니다. ‘작은’을 의미하는 ‘까딴’은 말 그대로 작다는 뜻이고, 영어에서 ‘the old’가 ‘나이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처럼 ‘까딴’도 ‘어린아이’를 지칭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또 성인식을 거쳤다고 해서 철이 들었다고 말하는 데에도 무리는 있습니다.

이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를 향해서 외친 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대머리’이고, 다른 하나는 ‘올라가라’입니다. 새번역이나 공동번역개정 성경에서는 ‘올라가라’를 ‘꺼져라’로 번역하여서 모욕의 정도를 심화시켜 놓았습니다만, 사실은 ‘올라가라’로 번역해야 더 큰 모욕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엘리사는 자신의 스승인 엘리야가 하늘에 ‘올라감’을 보고 왔습니다. 여리고에서 이를 지켜본 제자들은 엘리야의 시신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음’을 굳게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확신은 다른 이들에게는 조롱거리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소리칩니다. “너도 네 스승처럼 하늘로 올라가봐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앞을 지나가던 이들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했던 조롱과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엘리야가 분노했던 첫 번째 이유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자신의 스승인 엘리야와 그를 하늘로 이끄신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볼 말은 ‘대머리’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몇몇 분들의 설교도 보고, 글들도 읽어봤는데, 솔직히 이해를 못하겠던 지점이 이 ‘대머리’에 관한 설명입니다.

대부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대머리는 문둥병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기에 대머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사람들이었고, 죄인과 동일시되었다.

이 말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그러면서 ‘이 아이들은 벧엘에 있었던 우상숭배자들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서로 모순된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엘리사의 대머리를 보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죄인이라고 여겼다면, 그 아이들은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에 충실한 아이들입니다.

또한 엘리야와 엘리사가 벧엘을 거쳐 갈 때에 선지자의 제자들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보면, 벧엘이 우상숭배와 연결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해보자면, 엘리사가 엘리야를 떠나보내고 벧엘로 가고 있을 때에, 율법을 충실하게 배운 어린 아이들이 그에게 와서 조롱합니다.

“이 저주 받은 죄인아! 네 스승이 하늘로 올라갔다던데, 너도 하늘로 올라가봐라!”

이 아이들에게 엘리사가 기적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외형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죄인이 일으키는 기적은 경이의 사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하는 사건이 아니라 그저 조롱거리였을 뿐입니다.

아이들은 왜 그랬을까?

이쯤되면 대충 제가 어떤 이야기를 전해드리려는지 아실 것 같습니다. 이 아이들은 왜 하나님의 선지자를 향해서 이런 행동을 취하게 되었을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누군가 그들을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대머리는 죄인이다.’
‘부정한 것은 전염되기에, 부정한 자의 모든 행위는 부정하다.’
‘부정한 자는 죄인이기에 인격적 대우를 하지 않아도 좋다.’

아이들은 아마도 이런 식의 교육을 받으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잘 생각해보면, 이 아이들은 자신이 배워온 상황 속에서 잘못된 이야기,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배운 이야기를 엘리사 앞에서 외쳤을 뿐입니다. 배운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배운대로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을 가르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어른들입니다. 당시의 율법을 가르치던 사람들이며, 그들의 부모들이며, 그들의 조부모들이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가르쳐왔습니다.

얼마 전에 중고등학교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어떤 분이 강의하시는 내용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데, 남녀공학에 다니는 한 고등학생 남자아이가 옆에 있는 여자아이들의 허벅지를 자꾸 만져서 성폭력으로 신고 당했다고 합니다.

상담사가 그 남자아이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물어보니까, 아빠가 그렇게 가르쳐줬다고 이야기했답니다. 어떤 이상한 부모가 자식에게 여자아이들 허벅지 만지고 다니라고 가르쳤겠나 싶어서 상담사가 아이에게 묻습니다. 아빠가 도대체 뭐라고 가르쳐줬냐고, 그러자 아이가 하는 이야기가, 아빠와 TV를 보면서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이 나오면 아빠가 항상 그렇게 말했답니다. “저거 다 만져달라고 저렇게 입고 다니는거야.”

어쩌면 아버지의 눈에는 요즘 여성들의 짧은 치마가 좋아 보이지 않았나봅니다. 사실 저도 어렸을 적에 많은 분들의 입을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소위 보수적이라는 남성 어른들이 흔히 하던 이야기입니다.

보수적인 아버지의 입장에서 여성의 짧은 치마는 사회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도구였기에 이런 도구를 경계하면서 이야기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아이는 오히려 사회의 풍기를 문란하게 만드는 성범죄자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율법을 통해 배워온 대로 저주받은 사람을 모욕하고 조롱하며 엘리사에게 대머리라고 놀리던 아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저주를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녀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왔는지, 어떻게 살도록 이끌어왔는지, 무엇을 전해주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사회 속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전해준 내용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전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가르쳐온, 성장시켜온 아이들이 이 사회 속에서 어떤 사람으로 자랐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요즘 본회퍼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참 많은 감명을 받고 있는데, 그의 윤리학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거짓말쟁이의 입에서 나오는 진실보다는 차라리 거짓말이 낫고, 인간을 적대시하는 자의 형제사랑의 행위보다는 차라리 증오가 더 낫다.”

거짓말쟁이는 더 큰 거짓말을 위해 때로 진실을 말하고 인간을 적대하는 자는 그 행위를 위해 때로 형제사랑을 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진실과 그들의 형제사랑은 모두 헛된 것이며, 오히려 악으로 이어지는 일입니다. 물론 본회퍼 목사님의 글에서 ‘거짓말쟁이’와 ‘인간을 적대시하는 자’는 아돌프 히틀러입니다만, 지금의 우리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온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참된 사람의 거짓말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증오는,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거짓과 증오이기에, 비록 우리가 그 행위, 거짓말과 증오에 대한 죄의 고백은 해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가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그는 참된 진실은 현실의 관계 속에서만 발현된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머리가 나쁜 사람에게 “넌 머리가 나빠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진실은 아닙니다. 그 사람을 향한 폭력이면서 그 사람을 좌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 “넌 머리가 나쁘지 않아,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게 진실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에디슨의 어머니가 에디슨을 그렇게 키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현실의 모든 관계, 상황은 무시한 채, 우리의 가르침, 교회의 가르침만을 믿고 따르면서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현실 속에서 때로는 거짓말을 할지언정, 진실을 말하며 살라고, 또 때로 세상의 악한 사람들을 증오할지언정,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현실을 무시한 사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사실만을 가르치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아이들을 이끈다면, 이는 보수적인 가르침이 아이를 성범죄자로 만들고, 율법적인 가르침이 아이를 저주받을 존재로 만드는 일과 같습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생각은 현실 속에서 거짓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의 올곧음도 사람의 관계 속에서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이 참된 현실을 인식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안에서 선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가르치고 아이들을 키워갈 때,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하나님 나라에 조금 더 가까워져 있으리라 믿습니다. 적어도 지금 시대만큼 슬픔과 아픔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지는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런 시대를 열어 가시는,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세상을 선물해주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라고 믿으며 축원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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