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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 동양 종교, 무(없음)에서 만나다허무주의 시대 신(神)의 자리-베른하르트 벨테의 종교경험에 대하여(8)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 승인 2019.05.05 17:57

서양인들로서의 우리가 허무주의라는 시대의 근본 경험 속에서 신성의 빛남을 함께 경험할 수 있다면, 즉 우리들의 시대에서도 어떻게든 “종교적 경험”의 가능성이 성립하고 있다면, 이러한 존립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서양의 종교적 경험에만 국한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러한 종교적 경험은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벨테는 “아무것도 없음”을 통해 “신”에 이르는 “길”이 모든 종교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크게 보아 서구 종교에 속하는 그리스도교에서는 “부정 신학”이, 유대교에서는 “침묵함”이, 이슬람교에서는 “이름없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동양 종교 경전인 리그베다에서는 “캄캄함 속에 캄캄한 것을 숨기는 것”이, 도덕경에서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이, 불교에서는 “니르바나”가 그러한 “길”을 증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1)

서양 종교의 무(없음) 전통

우선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니사의 그레고리는 “암흙을 통해 신에 대한 본래적 인식에 도달한 자”로서의 모세를 말한다. 이때 말해지고 있는 “암흙”이나 “구름” 등은, 그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모세에게 “암흙”은 “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위디오니소스는 신이 “이름-없음”으로서, 즉 “이름이 없기에 아무것도 아닌 자”로서 만나진다고 한다. 이러한 부정 신학의 대표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우리의 영혼이 받아들여야 할 신은, 좋은 신도, 진리인 신도 아닌 황야 내지 황무지로서 나타나는 신이라고 본다. 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 풍경 속에서 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신은 표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직접적으로 “느끼고 경험될 수 있을 뿐”이다.(2)

그리고 벨테는 유대교와 이슬람교도 한 뿌리로부터 난 것이기 때문에 비슷한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다고 본다.

동양 종교의 무(없음)의 역사

마지막으로 벨테는 불교에서 “없음의 길”로서 “니르바나”를 꼽고 있다. 이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는 <수소와 소치기>라는 선시(禪詩)를 인용하고 있다. 그 시 속에서 소치기로서의 사람과 신으로서의 수소는 사라지고 만다.

▲ 죽국 도가에서나 불교에서 자주 등장하는 십우도는 대표적인 무(없음) 가운데 진리나 신을 찾는 과정을 나타내는 가르침이다. ⓒWikipedia

그것의 사라짐은 마치 “불꽃 위에 떨어지는 눈”과도 같다. 그리고 거기에 남는 것은 “넓고 파란 하늘뿐”이다. 우리는 하늘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니르바나”, 즉 “아무것도 없음”을 통해 “마지막 자리”에 도달한다. “아무것도 없음”에 대한 경험 내지 깨달음은 우리를 신적인 자리, 즉 하늘 자체로 이끌어 준다.(3)

다석 유영모, 없이 계시는 하느님을 말하다

모든 것이 의미-없음의 나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허무주의 시대에 이렇게 무에 대한 경험에서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경험은 만나고 있다. 없음이 일으키는 바람에 귀를 기울이고 그 없음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은 채 신이 떠나버린 ‘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인간은 ‘무의 자리지기’로서 마지막 남은 ‘성스러움’의 영역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이 낳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영성가 다석 류영모의 말을 들으며 우리의 논의를 마치도록 하자.

“하느님이 없다면 어때, 하느님은 없이 계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언제나 시원하다. 하느님은 몸이 아니다. 얼[靈]이다. 얼은 없이 계신다. 절대 큰 것을 우리는 못 본다. 아직 더할 수 없이 온전하고 끝없이 큰 것을 무(無)라고 한다. 나는 없는 것을 믿는다. 인생의 구경(究竟)은 없이 계시는 하느님을 모시자는 것이다.”(4)

미주

(미주 1) Bernhard Welte, Das Licht des Nichts (아무것도 없음의 빛), Düsseldorf 1980, 61 이하.
(미주 2) 참조, 같은 책, 58 이하.
(미주 3) 참조, 같은 책, 62 이하.
(미주 4) 박영호,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 하권』, 문화일보, 1996, 321.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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