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이 땅에 분쟁을운명적 단독자
오강남 명예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 승인 2019.05.08 19:20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내가 이 땅에 분쟁을, 불과 칼과 전쟁을 주러 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섯 식구가 있는 집에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서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설 것입니다. 모두가 홀로 설 것입니다.(제16절)

문자적으로, 표피적으로 읽고, 예수님을 따르면 실제로 칼을 들고 싸움을 하고 모든 식구들과 불화하고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아무튼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하는데 어찌하여 여기 『도마복음』 뿐 아니라 성경에 있는 공관복음서에서도(눅12:51-53, 마10:34-36) 예수님이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쟁을 주러 오셨다고 하는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14:27)고 했다. 평화에도 예수님이 주는 바람직한 평화와 세상이 주는 바람직하지 못한 평화 두 가지가 있다는 뜻이다.

바람직한 평화는 정의가 강같이 흐를 때, 모든 사람들이 서로 오순도순 사랑하고 도와주며 ‘근심이나 두려움이 없이’ 살아가는 밝고 따뜻한 참된 평화요, 바람직하지 못한 평화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일방적으로 피해를 주거나 억눌러도 말 한마디 못하는 상태, 불의를 보고도 ‘두려움과 근심’ 때문에 눈감거나 동조할 수밖에 없을 때 있을 수 있는 무겁고 싸늘한 외형적 평화다. 첫째 종류의 평화는 우리가 추구하고 유지해야 할 것이지만, 둘째 종류의 평화는 단연히 배격하고 깨뜨려야 한다.

▲ 십우도의 마지막인 입전수수(入廛垂手). “세속의 저잣거리로 들어가(入廛), 중생에게 손을 드리운다.(垂手)”는 뜻이다. ⓒWikipedia

한 가지 극단적인 예를 들면, 어느 살인마가 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와 교정에서 놀고 있던 어린 아이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총을 난사하고 있다고 하자. 이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가만히 보고만 서 있는 것이 평화일 수 있겠는가.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평화가 세상에 만연할 때를 상상해 보라. 예수님 당시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고 하는 것은 로마의 절대 철권 아래서 모든 민족이 꼼짝 못하고 있을 때만 가능했던 이런 식 죽음의 평화다. 예수님은 스스로 참된 평화를 주기 위해 이런 식의 평화를 종식시키려 오셨다고 선언한 것이 아닐까.

둘째,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은 새로운 안목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상식의 세계에서 보는 사람들과 의견이 같을 수가 없다. 앞에서 몇 번 지적한 것처럼, 깨달은 사람들이 갖는 공통성 중 하나가 바로 고정관념이나 일상적 통념을 ‘뒤집어엎음(subversiveness)’이 아니던가.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고정관념이나 통념을 우상처럼 받들고 거기 사로잡힌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릴 수밖에 없다. 나아가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 사이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 사이에서마저도 그 깨달음의 깊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깨달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이른바 ‘단독자’일 수밖에 없다.

이런 단독자 됨, 홀로 섬, 고독은 종교사를 통해 볼 때 선각자가 당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자기 멍에는 가볍고, 자기를 따르면 쉼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우셨다’고 했다(눅19:41). 노자님도 자기 말은 이해하기도, 실행하기도 쉽지만 사람들이 이해하지도 실행하지도 않는 것을 보고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이렇게 드믄가’(『도덕경』, 70)하고 탄식했다. 공자님도 ‘아,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하늘밖에 없구나’(『논어』 14:37)하고 한탄했다. 위대한 성인들의 실존적 고독을 말하는 대목이다.

마지막 구절 ‘홀로 서리라’는 여기 외에 23, 48, 75절에도 나오는 표현으로 이 ‘홀로’의 그리스어 ‘monachos’에서 서양말에서 독신 수도사를 뜻하는 ‘monk’와 수도원을 뜻하는 ‘monastery’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수도원에서처럼 모여 살지만 내면의 세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단독자일 수밖에 없고, 결국에 가서는 이런 단독자 됨이 영적으로 앞서간 사람들의 영적 운명인지 모른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영적으로 앞서 간 사람들이 홀로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떠나 홀로만 살게 된다고 하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덕경』 4장에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말이 나온다. 빛이 부드러워져 티끌과 하나 된다는 뜻이다. 성인들, 곧 깨친 사람들은 언제까지 고고하게 홀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그 빛을 부드럽게 함으로 일반 사람들과 섞이어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빛이 티끌과 하나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한다는 ‘임마누엘’ 혹은 ‘육화(肉化, incarnation)’의 논리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십우도(十牛圖)』에도 구도자가 소를 찾아 홀로 집을 떠나 소를 찾지만 찾은 다음에는 다시 저자거리로 나가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그 마지막 그림이다. 서양 신비주의 전통에서 자주 말하는 ‘절대적 단독자를 향한 단독자의 비상(the flight of the alone to the Alone)’이 이루어짐으로 얻을 수 있는 평화, 이 평화를 함께 나누려는 마음으로 다시 사람들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이리라.

오강남 명예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soft103@hotmai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충정로 2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생명의집 204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