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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상실의 값비싼 대가망각하는 자들이 기억하는 자들을 만들었다 (4)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 승인 2019.05.09 18:43

신명기 8장에서 이 본문으로 이동하면서, 우리는 설교에서 시로, 선포에서 상상력이 풍부한 신탁으로 이동한다. 모세가 신명기 8장에서 예상했던 것을 예레미야는 2:1-13에서 이제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번영하고 안전하며 종신 토지 보유권을 가졌고 자급자족으로 현혹 당하게 되었던 백성이다.

행복했는데, 왜

예상할 수 있는 결과는 이 공동체가 자신들의 기억하는 일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공동체는 그 같은 일이 이제는, 만일 어리석지 않다면,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적어도 고를 수 있는 선택과목이라고 생각했다. 성인들이 기억 활동을 진지하게 수행하기를 멈춤으로서, 아이들은 기억이 어쨌든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결과로서, 젊고 나이든 모든 사람은 기억을 글렀다고 단념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얼마간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차서 기억하는 일에 착수하셨음을 알리는 것으로 아주 조금 거슬러 올라간다(2-3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더 이상 근심하지 않는 그것을 기억할 수 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의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2절).

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거룩한 기억하는 자(Rememberer)는 좋았던 옛 시절, 즉 족장시대 사회 속에서의 신혼의 때를 되살아나게 할 수 있다. 야훼는 이스라엘이 무한한 헌신적 애정으로 가득 찬 열정적인 사랑을 가진 젊은 신부였을 때를 기억한다. “헌신적 애정”(devotion)에 기억되는 응답은 헤세드(hesed), 즉 충실한 상호관계를 신뢰하는 완전한 헌신이다.

그런 사랑은 아주 깊고 절대적인 것이므로, 이스라엘은 야훼가 인도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랐으며, 그리고 야훼가 인도하신 곳은 광야, 즉 씨를 뿌리지 못하는 땅, 경작하지 못하는 땅이었다. 시는 신명기 8장에 있는 모세의 설교에 접근한다. 계약의 여행은 너희의 빵이 주어지고, 너희의 의복이 닳아 없어지지 않으며, 너희 발이 부르트지 않았던 광야 속으로였다.

우리는 둘 다 아주 행복했다. 우리는 결코 아주 적게 소유하지 않았으나 아주 행복했다. 야훼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것을 기억하는데, 너희는 기억할 수 있니? 나는 그것을 갈망하는데, 너희는 어떠냐?”

5절에서 비약적인 급격한 동요가 시 안에 나타난다: 무엇이 잘못되어 버렸는가? 무엇인가 깊이 잘못되고 있다: 좋았던 옛 시절은 의심할 여지없이 끝났다. 야훼는 마치 이 무서운 종말이 거의 알아채지 못한 채 일어난 것처럼 말한다. 야훼께서 말하기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지만, 모든 것이 못쓰게 되었다. 너희가 기꺼이 나를 따라 갔던 것에 반하여, 이제는 너희가 나를 멀리하며, 이제는 너희가 하잘 것 없는 것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너희는 나를 좀더 현대적이고 싸고 빠르고 하찮은 그 무엇과 바꾸었다.”

그 관계에 엄청난 위기가 존재한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엄숙한 맹세를 단념했으며, 본질적으로 변덕스러운 그리고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는 새로운 상대들을 얻으려고 애썼다. 야훼는 진정으로 배신, 변절, 수치에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시인은 왜 이스라엘을 고발하는가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이 나온다(6-8절). 5절과 6-8절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마도 6-8절의 고발은 5절의 결과이거나, 어쩌면 그 반대일지 모른다.

▲ 깨진 항아리에서 물이 새어나가듯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억에서 야훼에 대한 기억은 사라져 갔다. 그 댓가는 값비싼 것이었다. ⓒGetty Image

어느 경우라도, 중심 주제는 이스라엘이 “말하지 아니 하였다”는 것이다(6절). 이스라엘은 이야기되어질 필요가 있었던 것, 즉 이스라엘이 과거에 시시때때로 언제나 이야기했던 것을 말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핵심 기억을 암송하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의 구성 성분인 설화적 정체성을 고백하지도 확인하지도 가르치지도 규정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왜 암송이 멈추어졌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야훼는 이제 암송이 실제로 멈추어졌음을 알아챘다. 암송의 중지는 아마도 잘못되어 가는 모든 것, 즉 상호관계의 이 연애관계를 쇠퇴시킨 모든 것에 대한 실마리일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야기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6-7절).

암송의 주제는 야훼이다. 야훼는 “당신”, 즉 위대한 동사들의 주어이며, 중요한 모든 것의 창시자이다. 야훼는 땅이라는 용어-이집트의 땅, 광야의 땅, 사막과 구덩이의 땅, 건조하고 깊은 흑암의 땅, 거주자가 없는 땅-로 주도되는 이 암송의 주어이다. 전체 땅이 야훼에게 관련된다.

이스라엘의 기억은-압제자들의 땅에서 살고, 의지할 것이 없는 땅에서 사는-땅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기억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와 너희가 살기 위해서 반드시 땅을 가져야만 한다는 그들의 발견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선물의 땅이다. 그러므로 그 암송은 모세의 설교와 평행을 이룬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7-9절). 그것은 선물의 땅이다.

그 다음 예레미야 2:7에서, 시는 결정적으로 변한다. 이제 야훼는 6절의 암송과 인용 이후 일인칭으로 말한다. 야훼는 이스라엘을 위해 땅의 이야기를 제정(enact)하신 분이 정확하게 야훼이셨다는 것을 기억한다;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으로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다.

야훼는 땅의 약속을 지켰다. 야훼는 땅, 열매, 좋은 것, 축복을 주었다. 그 다음에 귀에 거슬리는 반대의 뜻을 가진 말이 나온다: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 땅에 대한 이런 토론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은 동사의 주어이다. 이스라엘이 취하는 유일한 동사는 “더럽히다”와 “역겹게 만들다”이다. 너희는 단지 기억하지 못한 것만이 아니다. 너희의 기억 상실로, 너희는 땅의 선물을 거절하고 그것을 고착시킴으로서 축복 받은 땅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선물들을 수여할 수 없는 저주의 장소가 되었다.

기억을 지워버린 백성들의 흔한 변명

이스라엘의 부주의한 행동은 구체화하는 기억을 어떻게 해서든 무효로 하고 침묵시켰으며, 그래서 이스라엘은 기억하기 위해 남겨진 강력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스라엘은 그 땅을 파괴했으며, 정해진 그 땅을 지키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파괴했다. 이스라엘에게는 메마른 땅과 고갈된 땅, 그리고 완전히 의지할 곳 없이 비어버린 기억이 남겨진다.

지도자(leadership)는 태만하여 잊어버림으로 가득 찬 백성들과 꼭 같다(8절; 호 4:9 참조). 8절에서 지도자가 거명된다: 제사장들, 율법(torah)을 다루는 자들, 즉 법관들, 왕들, 예언자들이다.

그들 모두에 대하여 행해진 비판은 “그들은 야훼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고발들은 평행을 이룬다. 백성들(6절)과 지도자들(8절) 둘 다 “야훼가 어디에 계시냐?”하고 말하지 않았다. 즉 그들은 이야기를 기억하지도 되풀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기억을 폐기했다. 그들은 신명기 8장에서 모세가 예상했던 바로 그 방법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들이 잊어버렸을 때, 그들은 과거를 잊어버렸고, 그들은 야훼를 잊어버렸으며, 그들은 자기 자신들과 자신들의 역사, 자신들의 정체성, 자신들의 신앙, 자신들의 소명, 자신들의 존재이유(raison d'etre)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가짜 충성, 거짓 신들, 바알, 자기 보안의 종교적 기술을 추구했다. 그들은 거짓말, 부정직, 그리고 부인의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평화가 없을 때 서로에게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말하면서 끝냈다(6:14, 8:11).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현실을 보지 않기 위하여 믿을 수 없을 만큼 뻔뻔스러운 완곡어법을 사용했다(사 5:20 참조).

그와 같은 기억상실의 결과는 그들의 우물이 말라버렸다는 것이다.(1)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예루살렘은, 건조한 기후 속에서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언하는, 그들의 금이 간 저수지에 의지할 것을 강요당한다. 다시 말하자면, 기억상실은 죽음에 이른다. 이 통렬한 시는 세 가지의 강한 주장을 한다:

* 진정한 용인과 충성의 아름다운 시절이 실제로 있었다(2-3절)
* 백성과 지도자 모두가 기억하는 것을 망각하는 잊어버림의 오랜 시절이 있었다(4-8절); 그리고
* 잊어버림은 우물이 말라버리고 생활이 오그라들게 하는 원인이다(9-13절).

시인의 경고는 정확했다

이 두 강력한 본문, 신명기 8장과 예레미야 2장은 함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신명기 8장에서 모세는 풍요와 자급자족이 멸망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기억상실로 이어진다고 경고한다. 예레미야 2장은 신명기 8장의 위협을 결실로 가져온다. 그곳에 잊어버리는 일이 있었으며, 이제는 죽음으로까지 오그라드는 일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수사학의 전부는 대담한 종류의 시와 은유이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적 묘사와 정치적 분석이 아니다. 이런 옹호의 시들과 위급함의 진술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도시의 역사적 결과에 어울린다. 시인은 그것을 바르게 했다. 너희가 알 듯이, 모세가 예상했고 예레미야가 경고했던 것처럼, 잊어버리는 도시는 무서운 위기에 이르렀다. 침략, 파괴, 추방, 그리고 강제이주가 뒤따랐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고향 땅에서 고난과 낙담의 포로로 끌려갔거나,(2) 완전히 파괴된 도시의 인간 하부구조로 자신의 고향 땅에서 빼앗긴 채 남겨졌다.

어느 쪽에서든, 유대인들은 죽음의 상태(deathliness)로 끝났다. 현저하게, 성서는 이 무서운 종말이 바빌론의 확장주의에 의해, 혹은 예루살렘의 빈약한 정치 지도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토라 정체성을 잊어버리는 것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단언하는데 있어서 일관된다. 예루살렘의 붕괴는 기억의 상실에 기초를 둔 신학적인 것이다. (호세아 2:13의 동일한 평결을 보아라.)

미주

(미주 1) Gustavo Gutiérrez [We Drink From Our Own Wells: The Spiritual Journey of a People (Maryknoll, NY: Orbis Books, 1984)]는 영성의 원천에 대해 말하기 위해, Clairvaux의 Bernard에게서 인용한 인용구인, 우물물(water from wells)이라는 은유를 채택했다. 쿠티에레츠가 깊은 바닥의 자원을 가지고 있는 우물에 대해 말하는 반면에, 예레미야는 삶을 위한 자원이 없는 백성에 관하여 부정적으로 동일한 은유를 사용한다.
(미주 2) 바벨론 포로의 상황에 대한 대체로 부정적인 새로운 평가에 대해, Daniel L. Smith, The Religion of the Landless: The Social Context of the Babylonian Exile (Bloomington: MyerStone Books, 1898)을 보라.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sungildab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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