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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학창시절과 종교개혁에로의 급격한 회심칼빈의 삶과 신학 (3)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19.05.11 18:19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파리 북쪽 노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제라르 코뱅)는 노용 성당의 참사회의의 공증인이었으며, 그러므로 성직자들 가운데서 평신도로서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었습니다. 12살 무렵부터 칼빈은 대성당 입구에 위치한 제진느 제단 수입의 일부를 성직록으로 받았습니다.

인문학자로서의 길을 닦은 학창시절

1523년까지 칼빈은 고향에 있는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가 14살 되던 해 마튀렝 코르디에(Mathurin Cordier)가 라틴어 교수로 있던 유명한 기숙학교인 파리의 마르슈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칼빈이 코르디에에게 라틴어를 배운 기간은 매우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그의 생애 내내 그를 존경하였습니다. 나중에 코르디에는 칼빈에 의해 제네바와 로잔의 교육 기관의 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마르슈 대􏰁학에서 짧은 기간을 보낸 칼빈은 1524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다른 기숙􏰁학교인 몽테귀 대학으로 갔습니다. 로마 가톨릭 정통주의의 요새였던 그곳은 학생들이 매우 두려워􏰀는 곳이었습니다. 칼빈은 여기서 유명론 철학을 접했고, 1527년경에 문학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528년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기 위해 오를레앙 대학에 갔습니다. 이 대학에는 독일 출신의 인문주의자이며 복음주의자인 벨키오 볼마르 교수가 있었습니다. 칼빈은 그에게서 헬라어를 배웠고, 그를 통해 루터의 사상과 첫 접촉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볼마르 교수의 집에서 칼빈은 당시 9세였으며 후에 동료이자 후계자가 된 ‘데오도르 베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1530년에 볼마르는 부르쥬 대학􏰁으로 갑니다. 칼빈도 그를 따라 갔습니다. 그곳에서 칼빈은 인문주의 정신으로 로마법을 가르쳐온 유명한 법률가 알시아(Alciat) 교수에게서 법률 자격증을 획득하고, 1532년 그 대학교를 졸업합니다.

1531년 5월 26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칼빈은 이제 자유롭게 자신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직업에 뛰어드는 대신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프랑수아 I세는 소르본 대학교의 오랜 전통에 맞설 대안으로 인문주의적 성향을 띠는 대학교를 설립하􏰀였고(후에 프랑스 대학이 됨), 칼빈은 그 대학에 등록하였습니다. 유명한 히브리어 학자 ‘프랑소아 바타블’이 히브리어를 가르친 이 대학에서 칼빈은 인문주의 교육을 철저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1531/32년 겨울에 칼빈은 세네카의 관용론<De clementia>에 관한 주해서를 집필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고 그를 프랑스의 가장 유력한 인문주의자들에 속하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오를레앙에 돌아가서(1533) “법학사와 박사”를 취득하고 그의 법학 공부를 끝마쳤습니다.(미주 1)

▲ 파리 대학의 총장이었던 니콜라 콥(Nicolas Cop). 그의 개학 강연에 칼빈이 관여했다는 이유로 칼빈도 유랑 신세가 되어야 했다. ⓒWikipedia

종교개혁에로의 회심

칼빈이 언제 종교개혁에로 회심했는가를 알고자 하는 질문은 수 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구의 주제이나, 기록에 의한 증거는 흔하지 않습니다. 칼빈 자신은 1557년 시편 주석의 서문에서 “갑작스러운 회심”(subita conversio)을 경험했다고 단언합니다. 그의 회심은 아마도 1534년 5월 4일 이전에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 칼빈은 그의 성직록을 포기􏰀기 위해 노용에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심은 이미 1533년에 일어났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가설은 칼빈이 니콜라 콥(Nicolas Cop)의 강연 원고 작성에 참여했다는 것을 토대로 합니다.

1533년 11월 1일, 칼빈이 공부했던 파리 대학교의 총장였던 의사 니콜라 콥은 마튀렝 교회에서 개􏰁학강연을􏰀 하였습니다. 이 강연은 산상설교의 팔복에 대한 해설이었는데, 복음사상의 선포와 같았습니다. 그것은 가톨릭의 핵심 장소에서 행한 복음 강연이었습니다.

그 교회의 프란치스코파 수도사들은 즉각 콥을 이단으로 고발했고 강연을 한지 몇 주 후에 콥은 그의 고향 바젤에서 살기 위해 파리를 떠났습니다. 콥의 강연의 적어도 일부가 칼빈에 의해 작성되었는지 하􏰀는 물음에 관해서는 매우 논쟁적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칼빈은 1533년 가을에 이미 종교개혁에 호의적이었고, 복음에로의 전향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34년 10월, 파리에서는 “벽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미사를 반박하􏰀는 글이 그 도시에 나붙었습니다. ‘루터교도’들(종교개혁적 신념을 지닌 사람들을 일컬었던)이 공공의 질서와 신앙에 반􏰀는 이 음모에 책임이 있다고 고발되었습니다. 칼빈 또한 파리를 떠나야 했고 그의 연구를 계속 수행􏰀기 위한 조용한 거주 장소를 찾아야 했습니다.(2)

미주

(미주 1) 이재천 편집, 『칼빈의 신앙유산과 오늘의 개혁교회』(서울: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2009), 90-92
(미주 2) Ibid., 9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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