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앙굴리말라와 두 길악하지 않다는 착각(신 28:20-22)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5.12 18:49
20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 21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마침내 너를 멸하실 것이며 22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하게 할 것이라

“우리는 선한 사람들인가?” “우리는 의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인가?” “우리는 의로운 사람들인가?”

오늘은 이런 생각을 함께 나눠보았으면 합니다. 최근에 초대 교부들에 대한 공부를 하다보면, 초대 교부들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영성에 대해서 상당히 강조하였고, 그 영성을 쫓는 길에서 만들어진 장소가 수도원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자신들에게 당연히 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영성이라고 불렀습니다.

말씀의 시작부터 우리의 생각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영성’이라고 말하면, 보수적인 기독교를 떠올리게 되고,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는 부흥회를 상상하거나, 알 수 없는 말로 기도하는 방언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를 영성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바에서 중세 전까지, 이런 예배 문화는 영성이라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영성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는 태도입니다. 이때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를 갖게 되는 전제가 중요합니다. ‘나는 완전하지 못하다.’ ‘아직 구원에 합당하지 못하다.’ 이런 생각이 영성의 출발 단계입니다.

우리는 의로운가?

이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들입니까? 구원에 합당한 사람들입니까? 왜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욥의 고난을 보면서, 의로운 사람의 고난이라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신에게 처한 현실을 이입시킵니까? 당연히 자신이 의인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도 의인이지만, 지금은 단지 욥처럼 고난을 받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나에게 욥과 같은 복을 내리실 것이다. 이런 생각을 우리는 분명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의롭다’라는 표현과 ‘의인’이라는 표현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1절에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말에 약간의 오해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믿으면 천국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 복과 저주를 놓으신 야훼 하나님 ⓒGetty Image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선교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이방인입니다. 당시 이방인은 구원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해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더 심할 경우 태생이 유대인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시대에, 이방인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당신들도 유대인들과 동일한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이방인이 유대인과 동일한 자격을 얻었다고 해서 바로 구원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삶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초대 교부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하나님께 조금 더 가까이 가려고, 구원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항상 노력했습니다. 

어쩌면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구원의 자격을 얻었으면 이제 끝난 거 아닌가? 자격이 있다면 구원 받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이미 구원의 자격을 갖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끊임없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습니까? 자격은 있었지만, 그들의 삶이 바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들이라는 칭호와 자격을 받았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아직 아니라는 말입니다.

악에서 벗어나

우리가 참된 의인으로 향해갈 수 없는 이유는 지금까지의 교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도님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왔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모호한 추상적 개념으로 만들면서 우리의 눈을 가려왔습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 말씀은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선포되는 축복과 저주의 말씀에 바로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에발산에서 선포된 것인지는 말씀 속에서 명확하지는 않습니다만, 27장과의 흐름 속에서 에발산에서 선포되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복과 저주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복에 대한 내용은 엄청 좋은 내용이고, 저주는 엄청 끔찍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저주를 받게 되는가 입니다.

복을 받게 되는 요인은 28장 1, 2절에 나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어찌보면 간단하고 어찌보면 어려운 조건입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면 복을 받게 됩니다. 구체적인 행동이나 태도가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저주를 받게 되는 요인은 오늘 저희가 읽었습니다.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악한 일을 하거나,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악’이 무엇입니까?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니까 불교 예화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석가모니가 활동하던 때에, ‘앙굴리말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앙궁리말라는 재상의 아들로, 유능한 스승 밑에 들어가서 수도를 닦게 됩니다. 그런데 이 앙굴리말라에게 성경 인물인 요셉과 동일한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스승의 아내가 그를 유혹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과 마찬가지로 앙굴리말라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지만, 앙굴리말라의 경우에는 어쩌면 더 가혹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스승의 아내는 보디발의 아내와 동일한 태도를 취합니다. 앙굴리말라가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스승은 앙굴리말라를 감옥에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재상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승은 그에게 잘못된, 거짓된 수련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사람 100명의 목을 자르고 그 손가락 잘라서 목걸이로 만들어 걸면, 도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쳐줍니다.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도를 닦던 앙굴리말라는 그 이야기를 듣고 세상으로 나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닙니다. 이야기의 결론은 그가 100명 째의 사람을 죽이러 다닐 때에 석가모니가 그의 앞에 나타나서 그가 참된 도를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래 이 이야기는 선과 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석가모니는 그의 본성에 담긴 선한 마음을 보았기에 그의 악한 행위도 돌이킬 수 있다고 보았고, 그의 앞에 나타나 그를 변화시켜주었습니다. 불교 쪽 강론 찾아보면, 어떤 스님은 이 이야기를 ‘악인 앞에 담대히 나타나신 부처님’이라는 이야기로 풀어가던데, 기독교나 불교나 어떤 점에서는 비슷하게 흘러간다는 생각도 듭니다.

완전하게 선한 의도와 의지를 가지고 행한 악행은 악이 될 수 있을까? 이게 앙굴리말라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악’이라는건 이렇게 정의 내리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이런 본문을 이용해왔습니다. 우리가 ‘악’을 행하지 않는다면, 저주를 받지 않는다. 역으로 ‘악’을 행하지 않는다면, 복을 받게 된다.

그러면 악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교회는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교회에서 지정한 몇몇 가지가 바로 악이다.” 과거 청교도들은 딱 세 가지만 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춤, 게임, 도박’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를 악이라고 규정하고 금지했던 것입니다. 지금 시대에 우리나라 개신교회가 지정한 최대의 악은 아마도 동성애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농담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성경 말씀 중에서 자신들이 절대 범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게 동성애라서, 동성애를 이렇게까지 악으로 규정하고 규탄하는거 아닐까라고. 모호한 개념은 이러한 오류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성경 말씀은 왜 이렇게 모호한 개념을 전해주어서 우리가 잘못된 생각을 하게 만들까요? 사실 그 문제의 원인은 성경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고 싶은 곳만 읽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최소한 우리가 바로 앞 장인 신명기 27장 15절 이하만 읽어봐도 저주를 받게 되는 ‘악’은 명확하고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명기 27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결코 우리에게 추상적인 개념을 전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행위를 전합니다. 전체적인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악’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 행위들입니다.

‘악’의 내용은 물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악행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아닌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이 여성들에게 머리를 가리라고 한 일이 과거에는 머리를 드러내는 것이 잘못이었기에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이를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악에 대한 구체적 현실 행위의 본질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누군가를 향한 파괴, 수탈, 폭력, 모욕입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이런 일들을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떠나는 일, 마찬가지로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우상을 쫓는 일이 악입니다. 그리고 악한 행위들의 목적은 대부분 자신만의 쾌락, 부, 명성을 위한 것들입니다.

악하지 않다는 착각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니까, 내가 과거에 잘못한 일들을 ‘회개합니다’라고 말했으니까 이제는 죽으면 천국 갈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의 착각일 뿐입니다. 정말로 기독교인이라면, 평생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나님 말씀에 맞게 살아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나는 의인이라는 생각, 나라면 당연히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을 예비하셨다는 믿음의 확신을 갖는 일과, 나는 교회 다니면서 예수님 믿는다고 했고, 대충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들 고백했으니까 당연히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착각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 뿐입니다.

“난 천국 갈 자격이 있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판단하는 일이기에 인간의 교만이고 오만이며, 하나님을 향한 불경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신앙적으로 이런 생각, 악하지 않다는 착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그런 착각을 범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보면 너도나도 “나는 확실히 옳다”라는 생각을 갖고 사는 듯 합니다.

오늘이 5.18 민주화운동기념주일입니다만, 아직도 이 땅에는 많은 사람들이 5.18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당시 광주 사람들을 단순한 폭도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만약에 이 사람들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대부분의 사실관계를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베를 비롯한 극우사이트의 어린 아이들은 그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며 말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렇기에 자신들이 진실을 외치는 일이, 또 세월호 당시 단식투쟁하던 사람들 앞에서 햄버거와 피자를 먹는 일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해버립니다. 이 정도가 되면 착각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됩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은 처벌하고 거짓을 드러내면 그만이지만, 그들의 거짓에 선동되어 이를 진실이라고 믿으며 행동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거짓임이 드러난다 해도 결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불교의 앙굴리말라를 생각해보면, 그는 석가모니를 만나고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앞에 나타난 상대가 석가모니였기 때문입니다. 앙굴리말라가 지금까지 죽였던 99명의 사람들은 그를 깨닫게 하고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석가모니는 했습니다.

석가모니를 띄우는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석가모니를 네팔에서 태어난 한 명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믿은 것도 아니고, 예수님보다도 먼저 태어났기에 예수님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고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상이라고 말하는 그 사람도 그렇게 했는데, 왜 우리는 못하겠습니까?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예수님의 구원의 길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왜 못하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께서 이 세상 속에서 혹시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생각이 있어야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게 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야 비로소 대화가 됩니다.

평화는 귀를 막고 있는 사람들, 내가 옳기에 너의 주장을 듣지 않겠다는 사람들 속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혹시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틀렸을지 모르니까 너의 말을 살짝이라도 들어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가 시작되고, 그 곳에서 폭력이 아닌 평화가 생겨납니다.

구체적인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성경을 바르게 읽어나가시게 되기를 바라고, 난 의인이라고 굳게 ‘믿고만’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말씀 따라서 행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런 사람들에게 허락됩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을 통해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충만하길 바라고,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조금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로 인해서, 기독교가 조금이라도 바르게 서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