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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주지 않을지라도” - 知不知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71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 승인 2019.05.13 15:49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은 숭상할 만하고, 아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병이다. 대저 오직 병을 병이라 함으로써 병이 들지 않는다. 성인이 병들지 않는 것은 병을 병이라 함으로써 병들지 않기 때문이다.”
- 노자, 『도덕경』, 71장
知不知, 上, 不知知, 病, <知不知尙 不知不知病> 夫唯病病, 是以不病, 聖人(之)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노자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알려고 했던 지식은 무엇인가? 제자백가들은 저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신하들을 거느리는 지식, 세금을 계산하고 부역을 관리할 수 있는 지식, 전쟁에서 이기려는 방법, 식량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고 애썼다. 그러한 지식을 활용할수록 나라는 부강해지지만 백성들의 노역과 세금은 더 무거워졌다. 노자는 지식의 가치를 이익의 여부에 따라 판단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Getty Image

첫 구절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은 숭상할 만하고, 알아주지 않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병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당장 부국강병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노자의 도를 알아주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노자는 자기의 도가 당장 부국강병이나 사람들의 부귀에 무익하다고 생각하여 알아주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노자는 지식으로 재물을 구하는 태도는 병이 든 것이라고 한다. 성인은 지식으로 부귀를 구하는 것이 병임을 알기 때문에 병이 들지 않는다.

창문은 닫으면 창이 아니라 벽이다
창문은 닫으면 문이 아니라 벽이다
창문이 창이 되기 위해서는
창과 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창문이
닫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다

지금까지는
창문을 꼭 닫아야만 밤이 오는 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창문을 열었기 때문에
밤하늘에 별이 빛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제 창문을 연다
당신을 향해 창문을 열고 별을 바라본다
창문을 열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다
- 정호승, “창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생명과 평화의 알짬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자기의 부귀와 명예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정의와 모든 생명을 위한 정의를 위해서 바친다. 유다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배신을 위해 팔았다.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신뢰와 존경의 인사가 아니라 배신과 팔아넘김의 신호가 되었다.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그 뒤에 숨긴 배신의 음모 때문에 예수님의 발등을 찍은 도끼가 되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겉과 속이 다른 행동에 대한 것이다.

어떤 행동과 말 속에 좋지 않은 의도가 숨어 있다면, 그 의도를 스스로 알든 모르든 그것은 가룟 유다의 입맞춤과 유사하거나 같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자기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예수의 다른 제자들도 배반하고 도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함께 했던 사람들 모두가 도망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예수를 중심으로 모였던 제자들이 모두 도망갔다. 예수가 죽임 당하는 자리까지 함께 하겠다고 맹세하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자기가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에 진정으로 예수의 길을 다시 걷게 되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예수를 따라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였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산헤드린(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 장로들)이 보낸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새로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민중의 편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활동한 지도자가 지배자들에게 검거되었습니다. 그들은 지도자 예수님을 죽일 것이 뻔합니다. 절망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자들이 로마 군인들의 검거망을 무사히 빠져나와 탈출했다는 사실은 제자들의 공동체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희망을 암시합니다. 또한 청년이 삼베옷(세마포)을 벗어버리고 탈출한 것은 앞으로 있게 될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체포로 절망하여 스스로 포기하거나 부활의 희망을 예견하고 바라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버리고 도망한 일에 절망할 수도 있고, 로마 군인들의 검거망을 뚫고 탈출한 것에 희망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처형을 위한 체포 이야기 속에 부활과 탈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절망과 희망은 서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만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입니다.
희망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생겨나는 것이 희망입니다. 희망은 희망을 갖는 사람에게만 존재합니다. 희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고, 희망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도 희망은 없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이 존재함을 가르치며 사랑은 하느님이 선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지만, 희망은 하느님의 섭리를 보여줍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보는 사람은 자기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고 희망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모두가 버리고 도망쳤다”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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