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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夕과 만난 사람들, 씨알로 사는 사람들 이야기『다석 전기』, 『다석을 이렇게 본다』, 『유영모와 함석헌』을 함께 읽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9.05.14 18:45
본 글은 박재순 박사의 책 『유영모와 함석헌』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발표한 것을 근거로 이후 다른 두 책 내용을 덧붙여 함께 정리한 것이다. - 저자 주

평소 多夕을 사랑하여 그를 연구하고 그처럼 살려 하는 학자들의 책 출판을 기념하고 의미를 살피는 뜻 깊은 시간을 갖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 박영호의 『다석 전기』(2012)는 이전에 소개된 다석 생애를 광대하게 다시 풀어낸 것이고, 정양모의 『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2009)는 다석의 기독교이해에 주목했으며 박재순 박사의 저술 『유영모와 함석헌』(2013)은 다석과 함석헌 어록에서 유사한 말씀을 찾아 상호 관련시켰고 이를 쉽게 풀어낸 것으로 삶을 반추할 수 있는 명상, 영성 서적으로 손색이 없다. 출판 시점에 비해 시기적으로 본 기념회가 다소 늦었으나 다석사상 연구자들이 함께 모여 그의 사상적 깊이를 나눌 수 있음에 뜻 깊다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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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역시 多夕을 흠모하는 학자로서 향후 다석 사상이 다음 세 방향에서 연구되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 첫째는 난해하게 쓰여 진 다석의 글들을 가독성 있게 풀어내는 일로서 이는 다석의 직계제자들, 특히 박영호의 몫으로 남아있다. 이를 위해 다석 사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오늘의 책 『다석 전기』는 바로 다석을 옳게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 다석 유영모 선생님

둘째는 다석 사상을 동시대적 담론들과 마주하여 그의 진리를 보편화시키는 작업이다. 최근 차이를 강조하는 탈근대 담론을 비판하며 새로운 보편성을 강조하는 철학자들의 방한이 있었는데 이를 비롯한 서구적 뭇 시각과의 대화가 요구된다. 정양모 신부께서 다석의 신관, 기독론을 신약성서학자의 시각에서 풀어준 것은 부분적이긴 하나 이점에서 대단히 의미 깊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개인 多夕이 아닌 다석(혹은 씨알) 학파의 사상적 요체와 계보를 밝힐 것을 주장했다. 이는 소위 일본 교토학파의 철학과 견줄만한 한국적 사상의 광맥을 캐기 위함이다. <씨알재단>을 이끌고 있는 박재순 박사의 함석헌 관련 저술은 이를 위해 크게 기여할 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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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사이로 우리는 多夕의 직계 제자로 알려진 몇 분을 잃었다. 한 분은 한국의 ‘거유 유승국’ 선생으로 그는 자신의 방에 다석의 얼굴을 붙여놓고 매일 그와 대면하며 하루일과를 시작하셨던 분이다. 임종 3일전 우리 부부는 그의 병상을 찾았었는데 선생은 힘든 몸을 일으켜 세운 채로 다석 선생을 기억하며 다음의 말을 써주었다.

“하나님 뜻 받아 사람나이다.”

하늘 뜻 받아 태어나 그 뜻대로 사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남기신 것이다. 또 한분은 多夕에게서 ‘현제’라는 호를 받으신 ‘김흥호’로서 필자에게 다석을 가르치셨던 분이다. 다소 먼 곳에서 투병생활하신 탓에 자주 뵙지 못하다 부음을 접했고 달려간 영안실에서 영정과 대면했다.

그곳에는 선생님의 뜻이라 하며 절로서 조의를 표하는 것을 금한다고 쓰여 있었다. 기독교식 장례를 치르기 위함이었다. 순간 의외란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나 평생 多夕을 교회의 교사(부)로서 자리매김하고픈 의중의 표현이라 믿고 섭섭함을 접고 돌아왔다.

고인이 된 두 분을 언급하는 것은 다음 두 이유에서이다. 우선 이들은 多夕이 말했던 제소리의 化身(화신)들로서 ‘행한 것만큼만 아는 것’이란 진리를 실천하신 분들인 까닭이다. 다석 사상의 힘이 삶(실천)에서 나온 것임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다음은 이들이 진리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혼동치 않고 양자를 함께 긍정했던 종교인들이었던 까닭이다. 저마다 유불선과 회통한 다석 사상을 수용했으되, 한분은 진실된 유교학자의 길을 걸었고 한분은 기독교 목사로서의 교회 내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도 다석 사상의 핵심을 이런 차원에서 찾고 싶다.

이제 그 분들이 ‘없이 계신 하느님’에게로 돌아가 그와 하나 된 이후로 多夕을 가르치는 새로운 스승들이 우리 앞에 현존하게 된 것에 감사하며 그 세분들이 알려준 지혜에 흠뻑 취해 ‘하나님과 우리’, ‘多夕과 우리’가 ‘나너 너나’의 관계로 바뀌기를 맘껏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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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박영호님의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시대』는 다석 사상의 역사적 배경과 토대를 알리는 저술로서 다석 연구에 있어 자료적 가치가 지대하다. 비록 저자가 류영모를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깨달은 진리세계를 전달할 목적으로 썼다곤 하나 사실 이 둘은 서로 나뉠 수 있는 주제는 아닐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다석의 어린 시절, 친구관계, 혼인 시절 그리고 생업에 종사하던 모습을 알게 된 것 역시 즐거운 일이었다.

또한 우리는 이 책 속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주역들, 그들 간의 정신적 교감의 역사를 배울 수 있었다. 신채호, 안창호, 조만식, 이승훈, 정인보, 문일평 그리고 이광수 등과 다석 선생의 친분은 그를 신비적으로 때론 이상적으로만 알던 우리에게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의 모습을 보게 한 것이다. 톨스토이 그리고 간디의 삶이 다석 사상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도 선생의 위대함을 조금도 가리지 않는다.

▲ 박영호 선생의 『다석 전기』

평생 농부가 되기를 원했던 그의 소박한 꿈도 그를 더욱 앙망하게 만든다. 다석의 제자들, 특히 함석헌을 비롯한 모든 이들을 롱펠로의 詩 <화살과 노래>의 내용에 견줘 평가한 대목은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선생 스스로가 위대할 수도 있으나 역으로 제자를 통해 위대하게 되는 이치를 표현한 까닭이다.

“아주 오랜 훗날의 일이다. 나는 친구의 가슴에서 내가 부른 노래를 고스란히 찾아내었다.”

이 이야기는 예수의 제자를 만들지 못하는 교회는 그를 한갓 이념이나 신화로 만든 탓이라 질타했던 본회퍼 목사를 떠올려 준다. 결국 『유영모의 전기』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多夕에게 있어 하느님이 그 자신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존재론적 차이대신 인간 자신의 밑둥(바탈)에서 하느님을 찾은 것이다.

시종일관 강조하듯 얼나로 불리는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 씨앗(본뜻마음)이 靈我(영아) 혹은 凡神(범신)과 같은 것이기에 그에게 성서가 동양고전 속에서 동시에 동양고전이 성서의 시각에서 자유롭게 풀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四書三經(사서삼경)을 자기 마음의 각주라 여긴 양명이나 언어(말)로는 다르나 뜻으로 보면 같지 않은 것이 없다는 원효의 생각과 정확히 중첩된다.

하지만 육체(탐진치)로서의 예수와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그리스도간의 대별이 중요하듯 그리스도와 중생들 간의 구별 역시 소멸되지 않는다.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성자 천인지야, 성지자 인지도야/중용)’란 말이 바로 그것을 일컫는다. 인간 역시도 길을 가다 스스로 길이 되는 白死天難의 삶(십자가)을 살아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석 사상의 백미를 ‘未定稿(미정고)로서의 예수’ 속에서 찾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인간 역시도 예수처럼 살 수 있고 더 큰 일도 할 것이란 확신으로서 ‘完全稿’(완전고)로서의 존재론적 서구 기독론과 함께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다석의 마지막 법어가 ‘나너 너나’였음을 알리고 우리 역시도 몸성히(단식), 마음 놓이(단색)을 통해 ‘바탈’(本然之性[본연지성])을 태워 스스로 길이 되고 생명을 품은 성근 열매가 될 것을 주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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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출판된 지 4년을 넘긴 다석 학회 회장 정양모님의 『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는 여러 면에서 뜻 깊은 책이다. 신부님은 일아 변선환 학장의 종교재판과 그의 이른 죽음을 지켜보며 향후 한국 교회에 그 같은 학자들이 100명은 나와야 한국 교회가 달라질 것이라 애도한 바 있었다. 그런 저자가 본인도 비슷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급기야 多夕을 만나 어느 성서학자도 근접할 수 없는 학문적 정직함과 용기를 갖고 그를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는 것이다.

유영모에 대한 시인 고은의 혹평(만인보)을 책머리에 소개한 것은 분명 그의 어리석음을 질타할 목적에서였을 듯싶다. 책 말미에 기록된 多夕과 가톨릭 성서학자인 저자와의 범상치 않은 인연의 깊이를 생각하면 그 의도가 분명해 진다. 오래전부터 필자는 다석 연구의 반열에 성서학자인 저자의 참여가 없었다면 그에 대한 연구가 오늘처럼 신뢰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해 왔다.

이점에서 본 책은 기독교 신학계를 위해 무어보다 큰 의미가 되었다. 아울러 가톨릭과 다석의 관계를 알리는 몇몇 기도문들도 多夕의 심중을 헤아리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다석이 성모 마리아 입상을 좋아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본 책에서 저자는 대체로 다석의 예수 상에 초점을 맞춰 기술한 듯하다. 나름 정리한 다석의 그리스도론을 개념화했고 그가 썼던 예수 시편을 10수나 찾아 소개한 것이다. 이런 예수 이해의 틀로서 저자가 부정신학의 전통을 사용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싶었다.

그러나 저자가 하느님, 예수를 논할 때에 무엇보다 그의 한글적 의미를 우선시 한 것에 크게 공감한다. 우리글의 계시적 성격, 곧 그것이 正音(정음)을 넘어 ‘天文’(천문)이라는 다석의 말을 인정한 것이다. 저자가 분석한 예수는 ‘효자’, ‘얼 사람’ 그리고 하느님 뜻 받들다 순직한 자‘ 그러나 정작 하느님과는 동일 본질이 아닌 존재’ 등이다.

마지막 표현은 ‘예수가 하느님은 아니다’라는 것인 바, 대속사상을 거부하며 스스로를 非정통으로 여기는 다석의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 우선 저자는 유교문화권에서 예수를 모름지기 효자라 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였다. 앞서 감리교 신학자 해천 윤성범 역시 이미 ‘孝 기독론’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얼 사람’ 역시 인간 모두가 내재적 신성을 지닌 존재라는 동양적 에토스로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하지만 예수가 얼 사람일 수 있으나 얼 사람이면 누구나 그리스도란 것을 기독교인들이 힘겨워할 것을 걱정했다. 이는 인습화된 대속사건을 일탈하는 것으로서 저자 역시도 이런 생각이 시대상과 부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정양모 신부의 『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

오히려 저자는 하느님 뜻 받들다 순직한 존재로서 고백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이는 예수 죽음의 일차적 요인을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정에서 찾고자 하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정서와 부합될 수 있겠다. 결국 저자는 니케아 칼케돈에서 정식화된 양성 기독론(vere Deus, vere Homo) 대신 多夕의 ‘얼 기독론’ 혹은 ‘스승(순직) 기독론’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아버지께로 돌아간 예수를 우리 머리에 이자는 것이다.”

이런 사상적 토대를 저자는 다석의 歸一(귀일)사상에서 보았고 이를 神중심적 다원주의 사조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중생들 역시 자신 속의 얼(그리스도)을 좆아 작은 그리스도(길)로 사는 것이 서구신학보다 훨씬 힘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본 책의 실제적 공헌은 바로 저자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다석의 예수 시편을 정확히 선별하여 풀어 소개한 데 있다. 이들 글에서 독자인 우리는 예수의 존재론적 신격을 벗겨내고 다원주의적으로 혹은 수행적 차원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저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최근 필자는 저자의 직계 제자로부터 다석을 교회의 교사로 보려는 김흥호式의 다석觀 보다 하느님 씨앗을 깨달은 자 모두가 종교, 신분 모든 차이를 막론하고 하느님 외아들이라는 종교 다원적 시각(박영호)을 더 옳게 보았다고 전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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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순 박사의 저술은 다석뿐 아니라 그의 제자 함석헌을 더불어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보기 드문 창조물이다. 학계 현실이 저마다 이들 어른들을 뿔뿔이 제각기 연구하고 추종하는 양태인 것에 비해 <씨알 재단>을 세워 ‘씨알’이란 이름하에 한국을 대표하는-불교의 원효와 지눌, 유교의 퇴계와 율곡에 견줄만한-두 기독교 사상가를 묶어 낸 것은 크게 가치 있는 일이라 하겠다. 두 사상가의 글을 병렬시키되 이들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고 서로 같은 내용을 傳한다본 것이다.

더욱이 난해한 말씀들을 수차례 곱씹어 누구든지 읽고 느낄 수 있는 언어로 바꿔 하루 한걸음씩 자신들을 성찰할 수 있도록 명상록을 만든 아이디어와 열정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 책으로 인하여 다석 학파의 사상이 대중화 되어 이 민족을 생각하는 백성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짧은 지면이기에 1년 12달, 365일의 어록을 다 살필 수 없어 유감이나 몇몇 경우만 살펴도 본 책의 의미와 가치를 짐작할 수 있을 듯싶다.

우선 1년 첫 달을 위해 저자가 선택한 말씀 중에서 눈에 띠는 것은 ‘제소리’와 ‘스스로 함’이란 두 분 선생님의 핵심 화두였다. 뽕을 먹으나 비단 실을 내는 누에를 보며 인간 역시도 제소리를 내야 할 존재임을 각성시켰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 숨(말숨) 쉬는 자의 삶이라 했으며 그 때 비로소 씨알에게 스스로 함과 맞섬의 힘이 생긴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이 쉽지 않을 터, 모진 비바람이 몰아 칠 것인 바, 비바람을 ‘빌고 바라는 일’로 풀어낸 다석의 천재적 언어성을 잘 소개해 주었다.

독립기념일로 시작되는 3월, 저자는 함석헌의 역사이해에 주목한다. 역사란 살아서 그 뜻을 드러내라는 절대명령이란 것이다. 즉 역사는 처음이 있어 마지막이 있지 않고 마지막이 있어 처음이 있다고 했다. 역사란 의로운 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도 소개되어 있다. 이와 견줄 다석의 말씀도 분명하다. 하느님을 머리에 이어야-이마-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종교란 자신을 깊이 파 내려가 자신을 옳게 섬기는 일로서 인간을 자유케 한다고 했다.

민주 혁명의 달인 4월, 저자는 믿음이란 상식적인 것, 상식이란 세상을 아는 것으로서 세상을 앎이 곧 이웃 사랑이란 함석헌의 말씀을 강조했다. 환난을 이기는 길은 그것을 하느님 사랑으로 아는 길밖에 없다는 말씀도 눈에 띤다. 이는 자신의 몸을 잘 움직이는 사람이 남을 잘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다석의 생각과 잘 잇대어 있다.

동족상쟁의 비극을 추모하는 6월의 장에서 앞서도 언급했던 ‘나기는 너/나로 났어도 살기는 하나로 살자’는 다석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이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양편을 거부하고 개체속의 전체, 전체안의 개체를 강조하는 함석헌에게로 이어진다. 혁명은 이런 씨알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환난을 신의 섭리로 알자는 함석헌의 역사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나타난-역시 6월의 말씀으로 소개되었다.

7월에도 이와 유사한 어록들이 모아져 있다. 힘있는 자들은 좋은 날들을 즐기나 씨알들은 비바람 부는 궂은 날을 살면서도 빌고 바란다는 다석의 글과 생명의 본성은 대듦에 있다는 함석헌의 말이 중첩되어 읽혀진다. 기독교의 유입을 계급주의, 사대주의 그리고 숙명론을 타파키 위함이란 말도 덧붙여 있다.

8월 광복절을 기념하며 이 땅 민족의 고난이 세계사를 위한 의미 때문이라는 함석헌의 말을 앞세웠고 이와 더불어 ‘내가 곧 나라인 것’-나는 나라-을 알리는 다석의 주체철학 역시 소개되었다. 남에게 심부름시키지 말고 네 몸 네가 거두는 것이 독립이자 자주란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너에게 진 것은 참이 못되어 그런 것이라 했고 날 때부터 하느님 씨앗 갖고 태어났음을 아는 씨종(씨알) 한 명만 있어도 그것이 바로 ‘나라’고 ‘전체’라는 가르침을 개천절이 있는 10월의 이야기로 풀어주었다.

▲ 박재순 박사의 『유영모와 함석헌』

12월 성탄절 메시지로 저자는 하늘 소리와 땅 소리가 하나로 결합된 존재가 씨알(예수)이며 죽기위해-자신을 제사지내기 위해-온 사람이 바로 큰 사람(예수)이라 칭한 두 스승의 이야기를 창조적으로 엮어냈다. 이처럼 절기와 때에 맞추어 그리고 조화롭게 두 분 사상을 매일 양식으로 풀어낸 저자의 창조적 작업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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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필자는 간략하게나마 多夕사상의 맥을 잇는 선생님들의 최근 저서 3권을 살펴보았다. 이 책들은 저마다 특색 있게 향후 多夕연구를 위해 그리고 저변 확대를 위한 지대한 공헌을 할 것이라 사료된다. 이미 언급했듯이 박영호 선생님을 중심으로 다석의 일차적 자료들이 상당수 풀어졌고 이에 더해 준비 중인 多夕 사전이 편찬될 경우 다석 연구 전성기가 도래 할 것이다.

또한 정양모 신부님과 같은 성서학자를 비롯한 제 학자들에 의해 다석사상과 기독교 안팎의 동시대 담론들과의 조우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아울러 필자 역시도 수차례 강조했고 <씨알 재단>의 박재순 박사께서 시도하듯 다석사상을 개인적 차원이 아닌 학파의 차원에서 다뤄야 마땅한 일이다. 훌륭한 스승들의 넒은 가르침을 후학들이 좁혀 갈등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른 것은 달리 그러나 연속성을 갖고 연구하는 풍토가 요구되는 바, 본 책들을 통해 그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래본다. 이런 차원에서 필자는 소위 ‘多夕학파’ 혹은 ‘씨알 학파’의 공통된 시각을 다음처럼 정리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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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필자는 대학의 ‘民’을 씨알로 푼 다석의 혜안에 탄복한다. 이 때 씨알은 분명 주자(新民[신민])의 해석과 달리 良知(양지/본뜻마음)를 말한 양명(親民)식 관점과 닮아 있다. 개인과 전체를 아우르는 씨알 속에서 우리는 형이상/하간의 차이를 인정하나 주체적 능동(수행)성을 통해 그 간격마저 넘고자하는 역동성을 읽을 수 있다.

하여 필자는 다석 학파의 씨알 개념을 서구에 낯선 불이(不二) 적 사유의 산물이라 생각해 왔다. A=非A의 서구적 한계를 수행을 통해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人中天地一’이란 천부경의 끝말이 적시하듯 이는 본래 頓悟(믿음)의 세계가 강조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씨알’은 ‘없이 있는 하느님’(바탈)의 가시적 들어남(현존)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다석이 念在神在를 말하고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 될 것을 바라는 것도 모두 하늘씨앗(양지) 즉 本覺을 視覺화 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다석과 함석헌이 결국 기독교의 대속사상을 비정통적 방식으로 해석한 것 역시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일이다.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보그, 크로산 등)이 복음서를 비롯, 바울 서신 속에서도-최근 기존 바울을 비판하는 ‘새 관점 학파’라는 것도 등장했다-화해론의 차원에서 ‘하나’(전체)에로의 참여를 위한 원리를 제시하는 바, 씨알 사상과 잇댈 수 있는 부분이 보인다. 성서연구의 경향이 현저히 달라지는 만큼 다석 연구가들 역시 이들 두 사상가 시대의 기독교관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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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이런 시각에서 다석과 함석헌을 아우르려 할 때 이들 간의 연속성과 더불어 차이가 눈에 띠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구별이 결코 불연속을 뜻하지 않고 시대가 필요로 하는 해석(관점)의 차이라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개별적 연구보다는 사상사적 학파적 차원의 연구가 더 한층 필요한 것이다.

지면 관계상 짧게 이들 관계성을 언급 한다면 다음처럼 정리될 듯싶다. 무엇보다 삼재론에 터해 유불선을 비롯하여 기독교를 회통(不二)시킨 다석이 ‘없이 있는 하느님’을 인간의 바탈에서 찾았다면 함석헌은 그것을 민족의 역사 속에서 ‘뜻의 존재론’으로 지평확대 시켰다 말할 수 있겠다. 다석이 인간 누구게나 존재하는 개체적 차원의 本覺(본각)의 세계를 강조한 것에 견줄 때 함석헌은 그것을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훨씬 역사화 시켰던 것이다.

또한 다석이 이처럼 얼(바탈)을 강조했으나 부자유친의 종교적 수행(孝, 십자가) 역시 필연적으로 요구했던 것처럼 함석헌 역시 역사적 지평에서 ‘뜻의 담지자로서의’ 민중을 긍정했음에도 그것은 오로지 고난의 능동적 수용(섭리론)을 통해서만 역사화 시킬 수 있다고 말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씨알은 개별아를 초월하여 一卽多, 多卽一의 정신세계를 살아낼 존재이기에 미래적 희망은 이들 속에 있다 하였다. 타자를 또 다른 나로 보는 것은 오로지 뜻을 지닌 씨알의 할 일이고 이는 탐진치를 벗겨낼 때만 가능한 것으로서 끝까지 맞서 ‘스스로 해야’ 할 과제이다. 다른 말로 이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행위인 바, 전체 구원 없이는 개인 구원의 불가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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