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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의한 조선인 교육거기에도 교육주도권 다툼이 있었네 (2)
이이소 | 승인 2019.05.15 18:54

처음에 중국은 망명 지사들에 의한 조선이주민 민족교육을 묵인, 지지하였다. 그들의 항일교육이 중국의 일제 침략 방어정책에 대한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 침략이 연변에 미치면서 일제 관할 하에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고 오지의 조선사립학교가 조선총독부의 관리를 받는 ‘보조학교’로 바뀌는 일이 점차 늘어났다.

따라서 중국지방관청은 관립학교를 세워 ‘동화정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조선인을 핑계 삼은 일제의 동북침투를 저지하고자 했다. 조선사립학교를 직접 감독과 관리하며 법을 위반하는 학교를 폐교시키기도 했다. 즉 강경정책과 교육비를 지원하는 적극적인 정책을 동시에 취하였다.

중국인이 세운 조선인 관립학교

1928년 5월에 나온 통계에 의하면 중국 관청이 조선인 교육을 위해 세운 관립학교가 174개, 교원 수는 190명, 학생 수는 7,810명이었다. 최초의 관립학교는 1910년에 세워진 ❰화룡현 관립 제2학당❱이다. 이 학당은 이동춘이 광제욕 광소사 상천평에 세운 ❰양정학당❱을 지방정부가 접수하여 관립학교로 편입하였다.
 
1911년 연변지역에는 조선인학생을 전문 모집하는 중국관립학교가 9개 있었는데 학생은 모두 1,289명이었다. 그 중 조선인 학생수가 1,122명으로 87%를 차지하였다. 교원은 총 41명이었고 조선인 교원 수는 19명이었다.

일본 침투에 직면한 조선사립학교에 대한 중국의 대응

1907년 일제는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 설립한 날부터 보통학교와 보조학당을 세워서 조선인 교육에 침투하였다. 1908년 일제는 통감부간도파출소 산하에 간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20여개소의 조선인이 운영하는 서숙(서당)에 운영비를 보조하였다. 1909년 일본간도파출소가 철회되자 중국지방정부는 일본의 보조를 받은 서숙(서당)들을 폐교 조치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방법을 바꾸어서 간도보통학교 졸업생으로 하여금 개인 명의로 서숙을 설립, 운영하도록 하였다. 비밀리에 운영비를 지원하였으며 조선총독부 발행교과서를 무상으로 제공하였다. 또한 서당에서 보통학교용 교과서를 사용하여 수신, 한문, 조선어, 산술, 일본어를 가르치게 하여 조선인 교육에 대한 일본의 침투를 강화하였다.

조선인 교육에 대한 일본의 침투를 저지하기 위하여 1912년 연길도교육행정회의는 조선인 교육에 대하여 “교육에서는 동화를 내세워야 한다. 가장 좋기는 중국인의 자녀와 조선인의 자녀를 한 학교에서 함께 학습시키면서 똑같은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동화정책을 추진하였다. 1915년 8월 연길도윤 도빈은 ❰획일간민교육방법❱을 제정하고 조선인 사립학교를 중국학교체제에 편입시켰다. 이 교육법 또한 동화를 강조하였다.

▲ 통감부 간도임시파출소 사무청사 전경. 1908년(메이지 41년) 10월 준공했다. ⓒ통감부 간도파출소 제작 <간도사진첩>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제5조: 매주일에 중국어를 12시간씩 교수함으로써 동화를 촉진시켜야 한다. 이 동화는 무엇보다도 먼저 언어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그러나 초급소학교 1학년과 2학년은 학생들이 아직 어리고 중어로 교수를 받기도 어렵기 때문에 번역하여 가르쳐야 하고 3학년부터는 전부 중어로 교수하여야 한다.”, “제8조: 각 학교는 각기 제 나름으로 하지 말고 중화민국의 5색 국기와 자기 학교의 교기를 준비하여야 한다.”, “제 9조: 각 학교들에서는 개학식, 졸업식 등에서도 반드시 상술한 국기를 게양하고 중화민국의 국가와 자기 학교의 교가를 불러야 한다.”, “제13조: 사립학교는 학생이 20명 이상이 되어야 꿀릴 수 있고 교수는 학교와 꼭 같게 진행해야 한다.”, “제 14조: 상술한 규정을 위반하면 해산시킨다.” 등이다.

이와 동시에 연길도윤은 각 조선인 사립학교와 서숙(서당)에 관원을 파견하여 설립일자, 기본재산, 유지방법, 학생반급, 학생 성명, 및 연령, 학부형 성명, 교과서종류, 교육방법, 교원성명, 교원 노임 등을 조사하였다. 교육방법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연길도윤은 각 현의 권학소에 “일방으로는 국어를 가르쳐 동화의 효과를 기하였다. 한편 타방으로는 암중 감시함으로서 외인의 간섭을 차단하여야 한다”고 훈시하였다.

또한 중국지방정부는 적극적으로 조선인교육비를 지원하였다. 1917년에 연길, 훈춘, 왕청, 화룡 등 4개 현에 지불한 연길도서의 조선인교육보조금은 2,700원이었는데 1919년 11월에는 1만원으로 증가하였다. 1921년에는 경신대토벌로 일제 군경에게 무참히 파괴된 많은 조선 학교의 사정을 감안하여 길림성공서는 ❰간민교육비보조방법❱을 제정하고 연변의 4개현에 2만원에 달하는 교육보조비를 지원하였다.

중국지방정부는 조선인 교원양성을 중시하였다. 1915년부터 여러 차례 교원양성반을 기획하여 조선인교원을 양성하였다. 1918년에 지방당국은 연길 도립사범학교에 개척민정교원강습과를 부설하여 개척민 부교원을 모집하여 교육시켰다.

중국 교육 방침에 대한 조선인들고 일제의 대응

❰획일간민교육방법❱의 제정은 일관적으로 민족교육, 항일교육을 견지해온 조선인 사립학교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위기를 감지한 사립학교 교원들이 모여서 협의하며 대응책을 세웠다. 큰 물의가 없는 한 중국의 학제에 동조하기로 의견일치를 보았고 몇 가지 요구사항을 올려 중국 측과 교섭하기로 하였다.

요구사항은 “관청에서 지정한 학교구역 내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자녀를 소속관할학교에 입학시키게 만들 것”, “학교에 소요되는 경비는 지정된 구역 내에 거주하는 사람이 부담하도록 할 것”,“교과서는 전부 조선어로 번역하여 교수하게 할 것”, “중국어의 교수시간은 매주 6시간씩 할 것”, “관청에서 중국인 교원을 파견하는 경우 그 경비를 전부 관청에서 부담할 것” 등등과 조선역사와 조선지리 수업에 대한 것이었다. 중국관청은 모든 요구사항을 승인하면서 조선역사와 조선지리 교수에 대해서는 공공연히 승인하지는 않으나 적당히 교수하는 것은 묵인하기로 하였다.

일제가 유인, 매수, 탄압 등의 방법으로 조선인 사립학교를 친일교육의 보루로 만들려고 하자 조선인 사립학교를 둘러싼 중일 두 나라 관청 사이에 알력과 갈등이 첨예해졌다. 1917년 훈춘현지사가 쓴 ❰간민학교와 간민의 실태에 대한 조사보고❱는 그런 일본의 교육침투를 잘 보여준다. “최근 일본영사관은 간민교육을 극력 유인, 매수, 파괴하려 하고 있다. 그자들이 하는 대로 놓아둔다면 간민의 마음이 우리 쪽으로 쏠리지 않을 뿐 아니라 정중한 교육의 목표를 그르치게 될 것이다.”

1921년 길림성교육청은 일제의 조선인에 대한 교육 침투를 막기 위하여 조선인 학교를 증설하는 적극적인 대책과 조선 사립학교에 경비를 보조해주고 장려하여 회유하는 양면책을 실시하였다. 학급을 증가시키고 학교를 증설하나 중국의 교육정책을 따라오지 못하는 조선인 사립학교는 정돈하기로 하였다. 1924년 6월 봉천성 정부는 ❰동변도소속 각 현 조선인학교폐지조례❱를 공포하고 각 지방의 현 지사들에게 조선사립학교를 폐쇄하라고 명령하였다.

1925년 2월에 유하현 경찰소와 교육분소에서 삼원포의 동명중학교 폐쇄를 명령하였다. 1925년 말에는 한족 교장을 세울 것, 자비로 한족교원을 채용하라는 요구를 지키지 못한 흥경현의 12개 사립학교가 강제로 문을 닫았다. 통화, 무순, 안동, 개원 등지에서도 유사한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연길도윤은 연변 4개 현에 조선사립학교의 문을 일제히 닫을 것과 조선 학생들을 한족 학교로 보내어 공부시키도록 강요하였다. 개척민교육회는 조선사립학교에 한족교원 초빙, 중국교재 채용과 당국의 교육 감독을 따를 것을 엄히 경고하였다. 그 결과 적지 않은 조선 사립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다.

중국과 일제의 쟁탈 대상이 된 조선사립학교는 항일의 기치를 버리지 않고 존속하기 위하여 ❰획일간민교육방법❱의 명시된 대로 중국인교원을 초빙하였다. 중국정부가 편찬한 교재를 사용하며 조선인교육독찰원을 두고 학교를 공립 방향으로 고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조선사립학교가 사활에 직면하여❰획일간민교육방법❱을 수용하자 새로운 교육정책을 수립하였다. 1930년 8월 길림성정부 교육청에서 작성한 ❰연변간민교육통방법❱은 조선인들의 특수교육을 보장하였다. 조선 아동들에게 알맞은 교과서 편찬을 허락한 것이다.

조선인 사립학교는 매주 마다 하급학년에서는 조선어를 정규수업시간에 4시간씩 가르치고 상급학년에서는 조선역사와 조선지리를 정규수업시간에 매주 2시간씩 가르치도록 허락하였다. 공립학교는 하급학년에서는 매주에 조선어를 과외로 4시간 가르치고 상급학년에서는 조선역사와 조선지리를 과외로 2시간씩 가르치는 것을 인정하였다. 연변 4개현의 교육국에 중국인 교육위원이 없을 때, 그 자격에 맞는 조선인을 선발하여 조선인 학교를 독찰할 임무를 주었다.

이런 조선인들의 특수성에 대한 배려로 말미암아 조선 청소년 중에는 중국정부가 세워서 운영하는 관립, 현립, 향립 등의 학교에 입학하는 자가 급증하였다. 그러나 1년 후, 만주국이 세워지면서 동북지역 내 모든 교육 주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서 조선인의 민족교육은 식민지 백성의 황민화교육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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