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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성스러운(겔34:25-31; 행20:28-35; 요10:22-29)부활절 다섯째 주일(5월19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5.16 18:18

1.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오늘 신약 요한복음서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요 10:22).” 수전절(Hanukka, 修殿節)이란 한자로는 ‘전을 고치는 절기’라는 말인데, 성전 봉헌 축제를 말합니다. ‘빛의 축제’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2월이 되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성탄절이 있듯이, 같은 시기에 유대인들에게는 ‘빛의 절기’인 하누카(חנוכה, Hanukkah)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봉헌하다(하나흐)에서 유래된 하누카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웃간에 선물을 교환하며 “사메아흐 하누카”, 곧 “즐거운 하누카 되세요.”라는 인사를 건넵니다.

▲ 세계 최대의 하누카 촛대. 예루살렘 시는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사이 고속도로에 켜진 가로등 수보다 많은 전구를 달아 만든 하누카 촛대를 예루살렘 입구에 세워 빛을 밝히고 있다. ⓒGetty Image

하누카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주전 164년경 수리아(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Antiochus Epiphanes Ⅳ)가 예루살렘 성전을 점령하여 성전 안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피를 뿌려 여호와 하나님을 욕되게 한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이때 유다 마카비가 군대를 일으켜 성전을 탈환하고, 청소하여 다시 봉헌하였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유대인들은 수전절을 지킵니다.

한반도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스라엘도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바사(페르시아),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제국인 수리아(셀류쿠스 왕조)와 프톨레미(이집트), 로마 등. 특히 수전절은 헬라문화를 숭배하는 수리아에게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고, 이방인들에 의해 각종 신과 우상으로 가득차고 더렵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정화한 날입니다.

빛의 절기로 불리게 된 것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40㎞ 떨어진 모디인(Modii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유래합니다. 헬라와 싸워서 이긴 유대는 성전을 회복하고, 수전절을 맞아 촛불을 붙이려고 했는데, 기름이 하루치 정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기적적으로 8일간이나 촛불이 타올랐습니다. 이를 기념해 하누카 첫날 해가 지면 첫 번째 촛대에 불을 붙이고, 다음날 해가 지면 두 번째 촛대에 불을 붙여 나갑니다. 이렇게 매일 하나씩 늘어나, 마지막 날에는 모두 8개의 촛대에 불이 밝혀집니다. 따라서 하누카를 ‘빛의 절기’라고 부릅니다. 마카비상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백사십팔년 기슬레우월 즉 구월 이십오일 이른 아침에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율법대로 새로 만든 번제 제단에 희생제물을 바쳤다. 이방인들이 그 제단을 더럽혔던 바로 그 날과 그 때에 그들은 노래와 비파와 퉁소와 꽹과리로 연주를 하며 그 제단을 다시 바쳤다. 모든 백성은 땅에 엎드려 그들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신 하늘을 경배하며 찬양하였다. 제단 봉헌 축제는 팔 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번제물을 바치고 구원의 제물과 감사의 제물을 드렸다. 그들은 성전의 정면을 금으로 만든 왕관과 방패로 장식하고 사제들의 방을 수리하여 문을 달았다. 이방인들이 주고 간 치욕의 흔적이 가셔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들은 매년 기슬레우월 이십오일부터 팔 일간 기쁜 마음으로 제단 봉헌 축일을 지키기로 정하였다.”(마카베오상 4:52-59)

수전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성전에서는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인 시편 120-135편을 부르면서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각 가정에서는 ‘가지가 여덟 개인 촛대’에 하루에 한 등씩 불을 밝혀서, 8일째는 촛대의 불을 모두 밝혔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 신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은 성전이 구심점이요,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성전신앙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 곳(고전 3:16)’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성전을 허물고, 삼일 만에 다시 짓는 자’라는 성전모독죄로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잘못된 신앙, 내용이 아닌 형식만을 중요시한 신앙은 참 빛이 없음을 잘 보여줍니다.

아무튼 수전절에 솔로몬 행각을 거니시는 예수님께 유대인들이 다가와서 말을 겁니다.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 하소서 하니(요 10:23-24)”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10:25-26).”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책망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복음서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말씀은 신자를 다른 길로 인도하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책망과 권면의 말씀이며, 구약 에스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악으로 인도한 거짓목자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참 목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2.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를 조심하라

사도행전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제 3차 전도여행으로 마게도냐 지역을 전도하고, 돌아가는 길레 드로아(트로이)에서 밀레도(밀레토스)까지 향해하고,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초청하여 고별설교를 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땅에서 저의 마지막 설교 본문 말씀이 이 사도행전의 말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28-32)

하나님의 교회를 쪼개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30절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좀 더 확실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진리를 그르치는 말을 하며, 신도들을 이탈시켜 자기를 따르라고 할 사람들이 생겨날 것은 분명합니다.” 장로들 가운데, 신도들을 이탈시켜, 장로들 자신을 따르게 만들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다른 길을 갈까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당부합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3-35)

이탈하고 다른 길로 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세 가지로 말합니다. 먼저,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입니다. 그리고 ‘강한 자와 결탁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지 않는 것(권력욕)’입니다. 마지막으로 ‘받기를 탐하기(명예욕)’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짓 목자와 참된 목자는 탐욕과 권력욕, 명예욕으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말’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어그러진 말(진리를 그르치는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잘 보살피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3.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에스겔 34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죄악으로 인도하고, 자신들도 범죄를 일삼았던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아니지만, 34장 2절에 나오는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겔 34:2-3)

따라서 하나님께서 목자들을 대적하고, 내 양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겠다고 하십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겔 34:10)

하나님께서 거짓목자를 대신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토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불러 모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의 뜻을 생각하면서 한 절씩 교독해 볼까요?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도 아니하고, 평안히 거주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들을 위하여 파종할 좋은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여러 나라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그들이 내가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고,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24:25-31)

‘너희는 내양, 나는 너희의 목자’, ‘너희는 사람,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는 너무나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으나, 믿지 않았습니다(요 10:26).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4. 역시, 신은?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를 믿나요? 바로 자신들의 이념과 생각과 가치관을 믿습니다. “절대자가 차별주의자라면, 우리는 그 절대성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를 묻는 작가 김보영은 『천국보다 성스러운』 (일마, 2019)에서 SF형식에 담은 페미니즘 우화로 신앙과 젠더, 종교와 페미니즘이라는 만나기 어려워 보이는 영역들을 ‘신의 강림’이라는 기이한 사건 속에서 풀어냅니다. 김보영 작가는 가장 SF다운 SF를 쓰는 작가이자, 한국 SF 팬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작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의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김보영 작가는 신을 자기 방식대로, 자기 생각대로, 자기 이념대로 믿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역시 신은 ~ ” 여기서 ‘~’이 사람들 각자, 자기의 가치관입니다.

아무튼 소설의 이야기는 두 축으로 진행이 됩니다. 퇴직한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주인공 여성 영희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영희가 잠자리에 들며 상상하는 이야기들이 다른 한 축입니다. 먼저 한 축이 되는 영희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쉰 살이던 10년 전 퇴직한 아버지가 텔레비전 리모콘을 벗 삼아 시간을 죽이는 동안, 영희는 낮이면 밖에서 일을 해 돈을 벌고 퇴근해서는 아버지의 밥을 차리는 등 집안일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가사노동은 여자 몫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루를 온전히 홀로 생존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딸을 안팎으로 착취하며 구차한 목숨을 이어갈 따름입니다. 남성가부장제의 지독한 학습으로 아버지는 결코 부엌에 들어가거나, 밥을 짓거나, 세탁기를 돌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에 이어, 소설은 주인공 영희가 ‘남자 형상으로 강림한 신과 싸우기’로 나섭니다. 소설의 두 번째 축은, 영희가 잠자리에 들며 상상하는 이야기들이라고 했죠? 이야기의 서두에는 똑같이 이런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모두 소설의 주제와 연결되는 문장들입니다. 인용해 보겠습니다. “하늘에서 신(神)이 내려왔습니다. 그 신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신은 영희 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축의 세 번째 이야기는, 유난히도 노을이 붉은 저녁, 과학이 지배하지 않는 시절이었다면 신관들이며 점쟁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신의 계시라며 호들갑을 떨 만큼 짙은 핏빛으로 하늘이 물든 그날, 광화문 광장에서 하늘의 신이 내려오며 시작됩니다. 신은 백인 할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역시, 신은 남자로구나.’ 영희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마주보았다. 어쩌면 사람이 이토록 초라한가. 초월자로서의 능력도 지혜도 교양도 후광도 초능력도 거대함도 위엄도 없는 사람이, 신과 고작 단 하나의 닮은 점밖에 찾지 못한 하찮은 피조물이, 고작 그것 하나를 두고 신이 자신과 동류라는 확신에 젖어 말한다. 제 옆에 있는 가족더러 너는 그렇기에 나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겠느냐고, 너는 나보다 열등하지 않느냐고, 받아들이고 나를 경애해달라고 애처롭게 눈을 빛내며. ‘역시, 신은 남자로구나.’ 하지만 TV를 보던 어떤 사람들은 다른 말을 했다. ‘역시, 신은 백인이었어.’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친구, 동료, 애인, 아내를 벅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신성함과 우월성을 확신하며 동시에 상대의 열등함을 확인하는 얼굴로. 말은 계속 이어졌다. ‘코카서스 인종이야.’ ‘남방계인데.’ ‘역시 노인이로군.’ ‘장애인이 아니야.’ ‘이성애자일 줄은 알고 있었지만.’ ‘얼굴에 여드름도 없지.’ ‘대머리도 아니고.’ ‘역시 키가 커.’ ‘근육질이야.’ ‘관상학적으로 태양인이네.’ ‘귓불이 넓어.’ ‘복점 있는 것 봤어?’ ‘유태인 전통 복장을 입고 있잖아! 역시 신은 유태인이었어!’”

알량한 기득권을 움켜쥔 이들은 신의 형상이 자신과 닮았다는 사실에 매달리지만, 주인공 영희와 작가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들어볼까요? “신의 의지는 언제나 신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그들은 본인 자신이 신이기에 신을 소환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이 세상에 뿌려진 신의 파편이며 지상에 내려온 신,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성별, 성적 취향, 세대, 피부색, 민족이 같은 신을 소환하여 자신의 주장과 존재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역사를 통틀어 늘 있었습니다. 따라서 신과 닮지 않은 자들의 역사는 늘 지워졌고, 그 사실은 광화문 광장의 하늘에 신이 내려온다 한들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소설의 마지막, 영희의 삶과 머릿속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기이한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삭제되지만, 영희는 무언가를 깨닫고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영희의 마지막 상상은 먼 미래가 아닌, 우리 세대의 한 순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천국’과 같은 세계가 아닌 가능한 다른 세계로서의 우리가 디딘 ‘지상’입니다. 신을 소환하지 않는, 천국보다 성스러운 지상을 만드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천국보다 성스러운 지상을 만드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온 세상에 뿌려진 신의 한 파편임을 지각할 때 가능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강팍하여, 혹은 우리가 주님의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보다 성스러운 지상을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삶과 죽음을 본받을 때 가능합니다. 그들은 차별적인 신을 자신의 형상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러한 신을 소환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차별받는 그들 자신이 신의 형상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7-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도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서 여러분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천국보다 성스러운 가정, 교회, 지역을 만드시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대,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9)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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