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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시인 정신하나님에 대한 확신(시 71:22-24)
이성훈 목사 | 승인 2019.05.19 18:52
2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23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24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왜 하나님을 믿는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가진 신앙, 믿음에 대해서 말하게 될 테고, 상대방이 그 증거를 물어본다면, 우리의 체험, 경험을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앙을 가져온 과정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자발적이던 강제적이던 혹은 수동적이던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접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경험의 내용은 너무나 다양하기에 특정해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대게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극복하게 하셨다는 ‘체험’을 꼽으시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체험을 강조하는 교회들에서는 이런 삶의 체험보다는 소위 ‘하나님을 만났다’, ‘성령이 임했다’라고 불리는 비현실적 체험을 말하기도 합니다. ‘비현실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부정적인 의미로 말씀드리는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과학적 사고 체계와는 조금 동떨어진 체험이기에 ‘비현실적 체험’이라고 표현했을 뿐입니다.

이런 체험을 가진 후에 우리는 지속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경우에는 ‘다음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리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과거의 체험이 증거가 되기에 신앙을, 믿음의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영적 체험을 통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신 분들은 현실에서 체험하지 못하는 어떠한 감각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그 감각을 더욱 느끼기 위해서 지속적인 신앙생활을 하기도 합니다만, 이는 결국 마약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들은 영적 체험만을 강조하지 않고, 삶에서의 체험 또한 강조하게 됩니다. 어떻게 신앙을 시작했는가의 차이이지, 결과적으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함께하심을 체험했기에 이것이 확신으로 발전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단계?

그러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어떠한 단계로 도식화 할 수 있을 듯이 보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접하고, 다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복, 도우심 등을 체험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언듯 보면 그럴싸해 보이는데, 과연 이 단계 설정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여러분들께서 만약에 하나님을 체험했다고 고백하신다면,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떠한 불안과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확신만 가진 채, 마음의 평안을, 우리가 잘 사용하는 히브리어 ‘샬롬’의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는 삶 속에서 아무런 근심도 없고, 걱정도 없고, 불안함과 두려움 없이 살아갑니까?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확신 속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신앙의 단계라는 것은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거나 앞선 단계로 돌아가게 됩니다. 또다시 체험을 요구하게 되고, 어쩌면 그 이전의 단계로 돌아가게 됩니다. 교회를 떠나는 불신앙의 단계까지 돌아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째서 확신했다가도 다시금 체험을 요구하게 되고, 확신했음에도 다시금 불신앙으로 돌아가게 되는지, 혹은 하나님을 체험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고민하거나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가지 못하는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인들의 확신

우리가 시편을 읽어나가면서 읽게 되는 말씀들은 우리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시인들은 때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괴로워하고 불안해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자신을 지켜달라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간구합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시편 71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은 분명하게 어떤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 이스라엘의 망루.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지키신다, ⓒGetty Image

4절과 13절을 보면 그는 누군가로부터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9절과 18절을 보면 그는 자신의 노년을 염려하며 걱정합니다. 지금 시대에 ‘나를 죽이려, 헤하려 하는 원수’라는 이미지는 조금 맞지 않아 보이지만, ‘원수’라는 이미지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게 만드는 ‘사회의 모든 현상들’로 대치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시인들이 이런 고민을 하고, 이런 고통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은, 우리도 동일한 감정을 가지고 있기에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항상 시편을 읽으면서, 시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고민하는 점이기는 합니다만, ‘그들은 어떻게 이런 고민과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시를 마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해서 하게 됩니다.

간구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간구한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들은 항상 이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을 올립니다. 영광과 찬양은 어떻게 생각하면 어떤 체험 이후에,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많은 시편의 시 속에서 우리는 그들이 도움을 받았다는 체험을 읽지 못합니다. 보통의 경우 탄식과 간구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영광과 찬양으로 끝맺습니다.

그렇다면 시편의 시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우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체험이 없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찬양을 올릴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 경외를 위한 행위

시편을 읽어가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바, 시인들이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주신 법에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구주가 되시고 복을 내리신다는 법에 그들이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바꿔본다면 ‘하나님의 정의’가 그들이 확신하고 있는 근거입니다. 시편 71편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공의’를 말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시인들이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 또는 영광을 돌리는 행위는 어떤 체험에 대한 감사나 기쁨이라기보다 그 체험을 위한 감사와 기쁨이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 행위,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을 지키고 있음을 나타내고, 이를 통해서 복을 받으려는, 구원의 체험을 하려는 의도가 됩니다.

이는 어쩌면 지금의 많은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방식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복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영광을 돌리고 찬양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생각과 방식들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끊임없이 어떠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교회에서 프로그램을 시행하게 됩니다. 속된 말로, 성도들을 쉬지 않고 돌려야 교회가 잘된다는 이야기는 교회 프로그램이 많아야 성도님들이 교회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교회를 더 잘 나온다는 현실적 교회 운영 방식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을 보여드리고 영광 돌리며 찬양 올리는 모습을 보여야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음을 증명하게 되고, 이를 통해 복을 받게 된다는 생각을 그 저변에 가지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찬양을 드린다는 표현들이 미래형으로 써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지금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이루어진 후에 찬양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해석한다 해도 나의 신앙, 믿음을 담보로 현재의 구원을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법 체계 안에 내가 들어가 있음을 표현하려는 방식이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에 대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약간의 거부감이 듭니다. 확신은 없지만, 마치 확신을 가진 것처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영광을 돌리고, 찬양을 올려드리는 행위, 마찬가지로 내가 앞으로 이런 일을 하겠으니, 지금 복을 내려달라는 간구는 마치 하나님을 속여서 복을 갈취하려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과연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행위를 할 때, 하나님에게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목회를 하면서 저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교회를 크게 성장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아닙니다. 제 삶에 대한 고민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 고민보다도 항상 앞서는 고민이 있습니다. 믿음의 확신을 성도님들께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입니다.

그 전에 저 스스로는 확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라는 문제도 있겠습니다만, 우선은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목회자라는 입장에서 어떻게 성도님들께 믿음의 확신을 가지시게 할 수 있는가는 많은 목회자들에게 가장 큰 고민일 것입니다.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그 확신을 가지고 평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셨으면 하는 마음과 성도님들의 그런 모습이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지리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 문제를 두고 항상 고민합니다.

시편의 시들은 우리에게 전해진, 과거 사람들의 고백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들은 당시 사람들의 고민과 그 고민을 해결하려고 몸부림친 흔적들이 담겨져 있고, 그렇기에 어쩌면 동일한 고민을 안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 시들은 우리에게 어떠한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이 방향성이 마치 율법과 같이 우리가 하나 하나 지켜야 할 항목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불교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흔하게 사용되는 문구 중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바라본다”는 말이 있듯이, 시편의 글자에만 연연하지 말고, 그들의 고민과 몸부림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편은 분명 하나님의 정의를 지향해 갑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분명히 도우시고 이끄시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찬양하며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복잡한 설명은 빼겠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복을, 하나님을 버리고, 악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는게 결국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믿는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 복을 받을 존재임을 믿는다는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이 말은 또한 나의 행동,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었음을 확신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리라는 확신, 내가 복을 받게 되리라는 확신은 결국 내 삶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에 이루어집니다.

삶에 대한 확신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문제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자신의 행동을 확신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기독교 신앙인들 중에서도,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기에, 분명 악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자신들의 삶에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고, 이런 행동으로 인해 복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가진 분들은 많습니다.

그렇기에 삶에 대한 무한한 확신을 갖는 일이 잘못된 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들의 확신, 그들이 가진 삶에 대한 확신은 평안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더 나아가 이 땅에 평화를 이루고 있는가?

오히려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삶에 확신을 갖고는 있지만 전혀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더욱 큰 불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삶에 더 확신을 갖고자 자신과 동일한 행태와 확신을 가진 이들을 찾게 되고, 그 속에서만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이 틀리지 않았다고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마음의 불안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 다른 삶의 형태를 보이는 이들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그런 존재가 사라진다면, 자신들의 삶의 행태가 올바른 삶의 형태가 되고, 복 받는 형태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끝없는 불안이 이들을 폭력적으로 만들게 되고, 이는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폭력과 악으로 물들이는 행태로 이어집니다.

저는 이런 모습은 거짓된 확신이라고 봅니다. 거짓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폭력을 양산하면서 자신의 불안을 없애려고 합니다. 하지만 거짓된 확신 속에서는 불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삶의 형태이며, 하나님의 정의에 전혀 맞지 않는 삶, 복을 받을 수 있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에 대한 확신, 은혜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의 삶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서 확신에 차서 행동했음에도 마음에 불안이 가득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인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득 윤동주의 서시가 떠오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 할 수 있는 삶입니까? 우리는 잎새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괴로워할 줄 알고,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향해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삶입니까? 아니면 흔들리는 잎새를 떨어뜨리고 죽어가는 것들, 괴로워하는 것들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짓는 삶입니까?

시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하나님의 정의는 분명 살아있다는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에 더욱 굳건해집니다. 그리고 그 확신의 결과는 하나님의 구원이고, 하나님의 복입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 안에서 바른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고 계신다면, 여러분의 삶에 대해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나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시리라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확신은 분명 평안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삶에서 평안을 누리시게 될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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