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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보이는가, 무엇을 보려는가?” ⑴블라디미르 쿠쉬의 「Tree of Life」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5.24 14:13

산속 갤러리, 늦바람 난 목사

갤러리에서 작품설명을 하다보면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미술이 전공이셨어요?” “원래 미술 공부를 해오셨어요?” 목사인 것을 알면 궁금해들 한다. 목사가 산속 갤러리에서 미술작품을 읽어주니 궁금해 할만하다.

중학교 때까지 화가가 되려고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생각했었다. 혼자 화판을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나면, 골목이든 길가든 그 자리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사실 예술이 무엇인지, 그림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몰랐다. 다만 그림 그리는 그 순간의 평화로운 몰입이 좋았다. 그러나 화가의 길은 포기했다. 지금 돌아보면 어리석은 판단이었고, 또 그만큼 간절하지 않았구나 싶다.

그 뒤로 화판, 붓, 물감은 마음 한 편에 묻어둔 채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동안 가끔 낙서로 끄적거릴 뿐 그림을 그리거나 미술을 공부해본 적은 없다. 언젠가 미술에 대해 공부해보면 좋겠다 싶은 정도의 호감만 남았을 뿐 잊고 지냈다. 사실 예술 감상 자체만을 위해 스스로 미술관에 가본 적도 거의 없다. 그런데 추풍령 산속에 미술관을 준비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작품 해설과 예술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된 것이다.

짧은 시간 개관 준비만으로도 분주해서 작품을 연구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작품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초보자로서 그저 작품을 맛보고 또 맛보았다. 특히 하나님과 함께 감상하려고 했다. 성경을 묵상하고, 일상과 사건을 하나님과 함께 음미하듯이 예술 작품도 묵상했다. 아침 이른 시간이나 퇴근하기 전, 혹은 너무 피곤하고 지칠 때, 마음이 무겁고 아파올 때 하나님과 함께 그림을 읽었다. 그렇게 읽고 감동하고 깨달은 고백을 관람객들과 나눴다. 그분들과 나누면서 더욱 풍성한 이야기들로 자라났다.

늦바람이다. 요즘으로는 많은 나이가 아니겠지만, 오십을 코앞에 두고 미술 감상에 반한 것이다. 십 년 가까이 한 교회에서 사역해오면서 어느 범위 안에 갇혀 있었던 설교가 미술을 통해 돌파구를 찾았다. 한동안 미술작품을 통한 설교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실용적인 측면이 아니라도 늦바람 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삶을 바라보는 마음이 예술을 통해 얼마나 풍성해질 수 있는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싶었고, 초중고 시절 미술교육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맛보고 느끼는 미술이건만, 암기하고 답을 찾는 틀로 눈멀게 한 것이 아닌가. 초등학생이나 중고생들이 미술체험을 오면, 그래서 스스로 그 맛을 볼 수 있는 장을 열어주려 한다. 가능한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숨은 그림 찾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찾아오면 꼭 함께 보는 작품이 블라디미르 쿠쉬의 「생명의 나무」다. 이 작품에 여러 가지 숨은 그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숨은 그림을 함께 찾는 놀이를 통해서, 그림 속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는 재미를 맛볼 수 있다. 다르게 보기, 새롭게 보기, 의미로 읽기… 이것이 예술 감상의 맛이자 향이다. 그 맛과 향을 경험할 때, 사람도, 삶도, 사건도 예술적으로 보는 눈을 뜬다. 눈을 뜨면, 그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맛보면, 스스로 즐길 것이기 때문이다. 숲속 작은 교회 목사가 그랬던 것처럼.

▲ Vladimir Kush 「Tree of Life」 (60×80 inches)

작품 앞에서 바라보면 구석구석 호기심을 자극하는 숨은 그림들이 있다. 아이들에게 그것들을 찾게 한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에펠탑, 하늘을 나는 사람들, 오토바이 타고 달리는 잠자리 등이다. 아쉽지만 PC 모니터로는 그 재미를 직접 맛보기 어렵다. 그래서 확대해 몇 개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Vladimir Kush 「Tree of Life」 부분 / 에펠탑 오토바이를 타는 잠자리(좌측 하단)

마지막으로 찾게 하는 최종 단계가 대략 30cm 크기의 달려가는 여우다. 사실 이 여우를 그림 안에서 발견한 것은 갤러리를 개관하고도 삼사 개월이 지나서였다. 많은 관람객들에게 수없이 그림을 설명하고도, 해설을 위해 연구하고 묵상하면서도 보지 못했다. 어느 날 함께 일하던 화가가 발견해 알려준 것이다. 그만큼 찾기가 어렵다. 한참 만에, 힌트를 받고서야 찾게 되면, 놀라워하고 재미있어 한다. 그러면 아이들에게 그 부분을 보면서 이제는 여우를 보지 말아보라고 한다. 그렇게도 찾기 어려웠던 모습이 한 번 보이기 시작하면 안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이든 성인이든 이 여우를 찾는 경험이 눈을 열어줬으면 했다. 본다고 다 보이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보면 안 볼 수가 없는 묘미다. 삶이든, 사람이든, 사건이든 잘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봤다고, 본다고 다 보이지 않는다. 이미 안다고 더 볼 것도 없다고 결론지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제대로 보고, 깊이 알면 사랑을 막기가 어렵다. 한 사람이 겪어온 상처와 아픔을 속속들이 알게 되면, 그 사람이 얼마나 아프고 불안하고 두려운지를 알게 되면, 다르게 보인다. 아이들에게도 이렇게 말한다. “옆에 있는 친구도 그 친구가 얼마나 착한지, 좋은 친구인지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보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렇게 보이지 않니?” 신앙인들에게, 자신에게도 말하고 싶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보듯, 부조리와 고통 속에 함께 계신 하나님을 보면, 어디에서든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쿠쉬가 추구하는 예술은 ‘은유로 새롭게 보는 멋’이다. 일상 속 익숙한 사물들을 비유 삼아 아름다움에 눈 뜨게 하는 은유다. 그래서 초현실주의 작가로 불리지만, 스스로는 “은유적 사실주의”로 불리길 원한다. 사실 예수님께서 수없이 들었던 비유들도 그렇지 않았던가?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익숙한 것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등불, 소금, 동전, 씨앗, 씨 뿌림, 밭… 성경을 모르셔서 그러셨겠나. 일상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열어주시려는 뜻으로 보인다. 일상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려는 마음 아니었겠나. 신앙의 눈은 은유적 사실주의이자 계시적 일상주의가 아닌가. 사실을 하나님의 은유로 보는 눈, 일상 모두를 계시로 보는 눈뜸이 아닌가.

연출에 갇힌 하나님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게 되는 지점이다. 교회학교부터 성인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세팅은 일상과 얼마나 가까운가? 곧 여름이 다가올 것이다. 그러면 교회마다 성경학교, 수련회를 개최한다. 요즘은 캠프 형식의 단체 프로그램이 적지 않다. 그 안에서 전문적인 찬양팀이 잘 연출된 조명과 악기, 음악으로 분위기를 만든다. 강사 역시 웃기고 울리는 전문가다. 부흥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잘 준비된 집회 속에 휩쓸려 한껏 눈물을 흘리고 나면, 뭔가 하나님을 진하게 만난 것 같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오면, 음악도, 노래도, 조명도 없다. 감동적인 간증들 역시 자기 삶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찬양 속에서만 하나님을 경험하면, 일상의 냉혹한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로 오해하기 쉽다. 비일상성의 감동이 크면 클수록 일상성의 허무도 깊어지기 쉽다.

기타와 드럼이 교회에 들어오고 가스펠송이 사랑받기 시작하던 때 청소년기를 보냈다. 부흥회와 수련회의 감동에서 하나님을 경험했고 그렇게 성장했다. 그것이 없었다면, 지금의 신앙이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을 함께 경험하고 자란 친구들, 함께 울며 밤새 기도한 친구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교회를 떠났다. 이런 흐름이 어떤 한 가지 원인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일상의 사건, 만남, 대화에서 하나님을 보는 눈을 뜨고, 그 시선이 일상 깊이 배어들었다면 어땠을까? 전문캠프나 부흥집회 등의 무용론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미 지난 일에 대한 덧없는 후회도 아니다. 다만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성찰과 분별의 물음이다.

아담, 하와, 아브라함, 모세… 그들은 하나님을 어디에서 만났던가? 삶을 살아가던 일상이었다. 들판, 일터, 집, 정원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대신 만나주길 바랐다. 그 이후 레위인들이, 제사장들이 대신 만나기 시작했다. 중계인, 중계체계가 곤고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성전체계가 권력과 이데올로기로 굳어지고 말았다. 주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해서 결국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다. 바로 그 성전체계 안에 갇혀버린 하나님과의 만남을 해방시키는 길이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대화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9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20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2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 23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24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복음 4:19~24)

예루살렘 성전에서 해방되는 예배, 하나님을 영과 진리에서 만나는 해방이다. 그것은 일상 모든 곳으로 열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 열어주신 그 길이 다시 막힌 것이 아닌가? 다시 잘 연출된 예배 안으로, 감동적인 설교 안으로, 어느 특정한 목사를 통해서만 만나려 하지 않는가. 부흥사의 간증 안으로, 뜨거운 찬양집회 안으로 하나님을 가두는 형국이 아닌가.

부활하신 주님의 행보 역시 일상을 향한 해방을 더욱 분명히 보여주신다. 주님께서는 놀라운 신비나 기적으로 부활을 보여주지 않으셨다. 고기 잡는 바닷가 모닥불 앞에서 만나신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포도주와 빵을 나누는 식탁에서 자신을 보여주신다. 특히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경우가 인상적이다.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낯설게 보이던 한 남자가의 이야기가 이상하게도 가슴을 뜨겁게 했다. 그가 식탁에서 빵을 뗄 때 그 낯선 얼굴이 드디어 주님으로 보인다.

쿠쉬가 일상의 소품들을 은유의 예술로 사용하듯, 주님께서도 일상 모든 것들을 통해 말씀하신다, 보여주신다. 예배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면, 그 손가락은 분명 일상을 향해야 한다. 일상 도처에 함께 계신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일상을 가려서야 되겠는가. 지금 눈앞 일상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무엇을 보려 하는가? 자신의 생각과 판단, 욕망과 불안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 모두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을 보려 하는가? 볼 눈 있는 자, 들을 귀 있는 자를 일상에서 기다리신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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