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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기쁨(누가복음 15:11-24)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5월 26일)
테오 순더마이어 명예교수(하이델베르크 대학교) | 승인 2019.05.29 17:08
독일의 저명한 선교신학자인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테오 순더마이어 명예교수가 강연 차 한국을 방문 중입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 5월26일(일)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채수일 담임목사)에서 예배 설교를 진행했습니다. 이날 테오 순더마이어 명예교수의 설교는 채수일 경동교회 담임목사가 통역을 하셨습니다. 테오 순더마이어 명예교수님의 설교문 원문은 제일 마지막에 위치해 있습니다. 설교문의 게재를 허락해 주신 테오 순더마이어 명예교수님과 채수일 목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 주

몇 해 전에 나는 아프리카 나미비아 교회지도자들과 함께 그 나라 남부에 있는 한 농장을 점검하러 나섰습니다. 그 농장은 수도로부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초원지대에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기위해서 우리는 작은 비행기를 전세 냈는데, 그 비행기는 조종사 곁에 단지 두 사람만이 앉을 수 있었습니다. 절반쯤 왔을 때, 갑자기 조종사가 이 건조한 초원지대에서 길을 잃은 것 같다고 말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길 위에 이정표가 있는 것을 발견한 조종사는 될수록 낮게 비행하며 그 이정표 주위를 선회한 후에 말했습니다. “아, 이제 알겠다. 어떻게 가야할지” 그 말을 들은 우리는 모두 마음이 놓였고, 안전하게 그 농장으로 향했습니다.

 

성경은 종종 그러한 이정표가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상황들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새로운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우리는 다만 가까이 날아가서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종종 성경은 전혀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고, 새로운 성찰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상황을 통해서 새로운 빛이 그 성경말씀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인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세계문학에서도 가장 깊은 의미를 가진 작품에 속하는 이 비유는 ‘비단길’(실크로드)을 넘어 먼 동쪽에까지 와, 이른바 대승불교(마하야나) 경전에 자리 잡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 비유는 불교의 교리에 따라 변형되었습니다.

▲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 “방탕한 아들의 귀환(Return of the Prodigal Son)” ⓒWikipedia

이 비유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그리고 성경에 제시된 제목이 이미 어떤 해석을 암시하기 때문에(예컨대 새번역의 제목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라고 되어 있음), 우리의 시야가 단지 집을 나간 작은 아들에게만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비유를 새롭게 깨닫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1609년에 태어나 올 해 탄생 500주년이 되는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는 우리로 하여금 시야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합니다. 러시아의 성 페터스부르크(St. Petersburg), 에르미타주 미술관(Eremitage)에는 이 비유와 관련된 렘브란트의 대작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탕자의 귀향’이라고 알려진 이 작품의 가운데에는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는 몸을 굽혀 아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의 두 손은 아들을 보호하듯이 그의 어깨 위에 놓여 있습니다.

돌아온 아들이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그림에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곤고했던 그의 삶이 어떠했었는지는 다만 그의 커다란 거친 발바닥만이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지금 아버지의 위대한 사랑의 포옹 앞에서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우리는 아버지의 두 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 손은 남자의 손이고, 다른 한 손은 여자의 손입니다! 우리 시대에 많이 강조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버지이자 동시에 어머니처럼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렘브란트는 수 백 년 전에 이미 이것을 작품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손 부분만 확대

이 비유의 핵심은 “잃어버린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중심인물이자, 행동의 주체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비유의 제목은 ‘하나님의 기쁨에 대한 비유’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기쁨과 행동이야말로 이 비유의 주제입니다.

이 비유를 천천히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같은 아버지가 있고, 함께 자란 같은 집에서 삽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도 같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집에서 살아야 하고, 함께 일해야 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짧게 말해, 그들은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가 말하듯이, 아버지에게 속한 모든 것은 또한 아들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아들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는 바깥세상으로 나가길 원했고 – 모든 권리에 반해서 – 그의 아버지의 소유의 반을 요구했습니다. 당시의 법에 따르면 둘째 아들은 – 아버지 살아생전에는 – 아버지 재산의 삼분의 일 밖에는 받을 권리가 없었습니다.

오직 선물로만 받을 수 있는 것을 권리로 요구하면서 자신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작은 아들과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주장하는 길은 언제든지 다른 사람의 삶과 자기 자신의 삶을 대가로 치러야 합니다.

우리 한번 작은 아들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봅시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나게 합니다. 아버지가 진 것입니다. 아버지는 불평하지도 벌을 주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만나게 될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들이 스스로 선택한 자유에 자신을 맡기게 합니다.

아들이 스스로 선택한 인생에로의 대단한 상승은 세상에 빠져들어 가는 가파른 하락의 시작이라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들에게 큰 시험이 될 돈을 줍니다.

아버지는 어떤 조건을 내세워 돈의 일부를 유보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주는 돈을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하고, 선하게 살면, 후에 나머지 돈도 다 받게 될 것이라는 조건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아버지는 아들이 그냥 가게 둡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멈춰야겠습니다. 어떤 하나님 상(像)이 여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일까요?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면, 하나님은 적어도 자기의 아들에게 경고했어야 합니다. 아들을 막거나, 최소한 얼마라도 돈을 되돌려 받으려고 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아들에게 모든 것을 줍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곤경과 어린아이들이 당하는 고통에 직면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고통 받는 사람들의 현실에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면 왜 세계의 권력가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결정하도록 인도하지 않으시는가? 그런데 이 비유는 우리의 하나님 상(像)을 교정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롭도록 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하셨다는 것이 기독교 믿음의 비밀입니다. 우리 세계의 고통은 자유의 결과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남용한 결과인 것입니다. 자유를 좋아하는 인간이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행동도 할 자유를 선사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고집대로 버려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가게 하였다.”(시편 81:12). 불행, 자기신격화의 교만, 불화, 돈과 지구자원 사용에서의 무분별함이 그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이 모든 불행의 책임을 전가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며, 이를 통해 우리 짐을 벗으려 해도 안 됩니다. 아니, 우리는 우리 가슴을 쳐야 합니다.

자기의 모든 부와 함께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던 한 젊은이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젊은이를 잊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들은 비록 아버지를 떠났어도 아버지는 언제나 아들에게 신실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악으로 갚으시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참을성이 많으시고 인내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놓은 일 사이를 구분하십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우리 눈을 열어준 위대한 깨달음입니다. 인간이 전적으로 자신의 업보에 매인 불교와 달리,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자신의 피조물로서, 자신의 자녀로서 바라본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처럼, 우리의 실수나 잘못된 행동,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비유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기억합니다. 그의 기억 속에 먼저 떠오른 것은 아버지의 집에서 있었던 상태입니다. 이제 자기 인생의 부조리가 분명해집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아버지는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임금을 지불했고, 그래서 아버지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풍부한 생활을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선함을 기억하고, 비록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리라는 희망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는 회개합니다. 회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회개하라 하신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회개란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귀향은 기쁨을 줍니다. 나는 어린 아이로서 겪은 제2차 세계대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고향휴가를 받아 집으로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나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도 별로 즐거워하지 않았던 청소년 수련회에서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수련회가 끝나는 마지막 날이 되면, 내일은 드디어 집에 간다는 기쁨에 들떴던 경험이 그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 집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를 가집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찾는 자유는 우리를 부자유에로, 숨 막히는 자기중심적 자아에로 인도할 뿐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둘째 아들이 혹시 아버지로부터 천둥 같은 벌을 받으리라고 예상했는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가까이 올수록, 그의 마지막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진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기뻐서 집안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을 아들이 있었던 본래의 자리에 앉힙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 옷을 선물하고 인장 반지를 선사합니다. 단지 누더기 옷만 바뀐 것이 아닙니다. 옷과 인장 반지는 그 당시에 법적 권리의 표시였습니다. 이제 아들은 다시 이전처럼 상속권자가 된 것입니다. 아들의 법적 신분이 다시 세워진 것이지요.

▲ 독일의 저명한 선교신학자 테오 순더마이어 교수가 한국 방문 중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에서 주일 예배 설교를 진행했다, 그리고 경동교회 채수일 담임목사가 통역했다. ⓒ이정훈

이제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됩니다. 즉 ‘칭의’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신학적, 그러나 매우 중심적인 개념은 마틴 루터(M. Luther)가 우리에게 밝혀준 것인데, 단순하게 말하자면, 칭의는 하나님이 나를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받아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다시 하늘에 있는 모든 성인들과 동일한 권리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수용”입니다. 이것이 칭의,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기뻐할 수 있고 또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배우는 세 번째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기뻐하신다는 것,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기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롭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평화이며 기쁨이라고 말합니다(롬 14,17).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떤가요? 내가 볼 때 특히 기독교인들은 이 기쁨을 잊은 것 같습니다. 적어도 독일에서는 말입니다. 특히 경건하다는 기독교인은 너무 쉽게 독선적이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와 같지 않다고 즐겨 비판합니다. 사람들이 다른 생활 스타일을 가지고 있고, 다르게 믿고, 다르게 산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마치 아버지 집에 남아있던 큰 아들과 같습니다.

큰 아들은 동생의 죄목을 짚으면서, 동생의 잘못들을 들추어냅니다. 아버지는 벌써 잊고 덮어버린 잘못들을 말입니다. 우리도 경건한 의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덧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한 일을 잊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배우는 세 번째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에 함께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기뻐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정리해보겠습니다. 비유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세 가지 다른 면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군주도 아니고 이슬람 경전인 꾸란이 말하는 것처럼, 계산이 가장 빠른 분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자유의 종교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과 그의 행위 사이를 구분하시고, 우리와 우리의 행위를 구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의 행위에 따라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예수로부터 배웁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우리를 받아드리십니다.

셋째,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서의 말씀인 이 비유의 제목은 “하나님의 기쁨에 관하여”라고 붙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 즉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를 바라십니다.

Vor Jahren hatte ich  in Namibia zusammen mit dem Geschäftsführer der Kirche eine Farm im Süden des Landes zu inspizieren. Sie liegt  einige hundert km südlich der Hauptstadt weit abgelegen in der Steppe. Um dahin zu kommen, mieteten wir ein kleines Flugzeug, das neben dem Piloten Platz für zwei Gäste bot. Auf der Hälfte des Fluges sagte plötzlich der Pilot zu unserem Schrecken, er habe etwas die Orientierung in dieser Trockensteppe verloren und wisse nicht recht, welche Richtung er einschlagen müsse. Doch dann sah er auf einer Straße unten einen Wegweiser. Er flog niedriger und umkreiste den Wegweiser. „Da, jetzt weiß ich wieder, wie ich weiterfliegen muß!“ Wir waren erleichtert und wurden sicher zu der Farm geflogen.

Bibelstellen sind oftmals solche Wegweiser, die uns helfen selbst in Situationen, die wir zu kennen meinen, eine neue Richtung zu finden. Wir müssen sie  „anfliegen“ und genau betrachten. Oft eröffnen sie dann eine ganz neue Dimension, erschließen eine neue Einsicht, weil durch die neue Situation ein neues Licht auf sie fällt.

Unsern Text, das Gleichnis „Verlorenen Sohn“ kennen alle. Es gehört zu dem tiefsinnigsten der Weltliteratur und  ist über die Seidenstraße bis in den fernen Osten gedrungen und hat im Mahayana Buddhismus einen kanonischen Platz gefunden, dort aber verändert durch die buddhistische Lehre.

Weil der Text so bekannt ist und selbst die Textüberschrift in der Bibel  eine bestimmte Interpretation suggeriert und unsern Blick allein auf den jüngeren Sohn lenkt, ist es so schwer,  ihn neu zu uns sprechen zu lassen.

Der Maler Rembrandt van Rijn(geb. 1609), dessen Geburtstag vor 500 Jahren  wir in diesem Jahr weltweit feiern, lenkt unsern Blick in eine andere Richtung. Es gibt ein großes Gemälde von ihm in der Eremitage in St. Petersburg in Russland, da ist der Vater im Mittelpunkt des Bild, der  sich über den Sohn beugt, ihn mit seinem großen Mantel umhüllt. Seine Hände legen sich schützend den Sohn. 

Der ist kaum zu sehen. Was er durchgemacht hat, sein Weg in das Elend ist allein an den rissigen groben Fußsohlen zu erkennen. Aber das zählt jetzt nicht und wird unwichtig angesichts der großen liebenden Umarmung durch dem Vater. 

Wenn wir genau hinsehen, erkennen wir auf Rembrandts Bild, dass die Hände unterschiedlich sind, eine Männer- und eine Frauenhand! Was heute so oft betont wird, daß Gott zu uns ist wie ein Vater und eine Mutter - das hat Rembrandt schon vor Jahrhunderten uns  im Bilde vor Augen geführt.

Es geht in dem Gleichnis nicht so sehr um den „verlorenen Sohn“, sondern um den Vater. Er ist die Hauptperson. Er ist der Handelnde. Die Überschrift über des Gleichnisses  müßte heißen „Gleichnis von der Freude Gottes“! Die Freude des Vaters und sein Handeln sind Thema des Gleichnisses.

Versuchen wir das durchzubuchstabieren. Da sind zwei Söhne. Sie haben den gleichen Vater. Sie leben im gleichen Haus, in dem sie aufgewachsen sind. Das Ziel ihres Lebens ist gleich: Sie sollen im Vaterhaus leben, mitarbeiten und hier glücklich sein. Kurz, sie sollen beim Vater sein, denn - so heißt es im Gleichnis - ihnen gehört alles, was dem Vater gehört.
Der eine Sohn aber ist unzufrieden, er will hinaus in die Welt und fordert - gegen alles Recht - die Hälfte seines väterlichen Besitzes ein. Nach dem Recht steht ihm - wenn überhaupt vor dem Tod des Vaters- nur ein Drittel zu.

Jeder der sich durchsetzen will, wer fordert was er eigentlich nur als Geschenk bekommen kann, muß des Weg des jüngeren Sohnes gehen. Doch solch ein Weg des Selbstbehauptung  geht immer auf Kosten und das Leben eines anderen und des eigenen Lebens.

Schauen wir uns den Vater an, wie er reagiert. Der Vater läßt den Sohn gehen. Er gibt nach. Er schimpft und straft nicht. Er spricht auch keine Warnung vor den Gefahren aus, in die sich der Sohn begibt. Er überläßt den Sohn sich selbst und seiner selbstgewählten Freiheit. 

Daß der großartige Aufstieg in das selbstgewählte Leben der Beginn eines steilen Abstieges in die Verstrickungen der Welt sein wird, weiß der Vater. Aber er sagt nichts und gibt ihm all das Geld, das ihm zur großen Versuchung werden wird. 

Er hält nicht einmal ein Teil des Geldes zurück mit der Auflage: Wenn du das Geld, was ich dir gebe, sinnvoll anwendest und ein gutes Lebens führst, wirst du auch später den Rest des Geldes bekommen, der dir zusteht.  Nichts davon! Der Vater läßt ihn  gehen.

Hier müssen wir für einen Augenblick anhalten. Was für ein Gottesbild wird hier geliefert? Wenn Gott allmächtig und allwissend ist, dann muß er doch seinen Sohn zumindest warnen, wenn nicht aufhalten oder ihm zumindest etwas Geld zurückhalten. Nein, er gibt ihm alles.

Werden uns nicht sooft angesichts des Elends in der Welt und  dem  Leiden von Kindern diese Fragen gestellt: Wenn Gott allmächtig ist, warum greift nicht ein? Wenn er allwissend ist, warum richtet er die  Entscheidungen der Mächtigen der Welt in die richtige Richtung? Das Gleichnis korrigiert unser Gottesbild.

Gott entläßt die Menschen in die Freiheit! Das ist das Geheimnis des christlichen Glaubens, dass Gott uns die Freiheit zum Handeln schenkt.  Das Elend in unserer Welt ist ein Folge der Freiheit, des Missbrauchs der Freiheit der Menschen. Wir freiheitsliebenden Menschen sind die Schuldigen.

Gott hat uns die Freiheit zu allem unseren Handeln geschenkt. „Ich habe sie gelassen in ihres Herzens Dünkel, daß sie wandeln nach ihrem Rat“ (Ps 81,12). Unglück, der Hochmut der Selbstvergottung, Friedlosigkeit, Rücksichtslosigkeit im Umgang mit Geld und den Ressourcen dieser Erde sind die Folge. Wir sollen und dürfen das Elend nicht Gott in die Schuhe schieben und uns dadurch entlasten. Nein, wir müssen uns an die Brust schlagen!

Das tat der junge Mann, der sich mit all seinem Reichtum ins Elend gebracht hat.  Der Vater aber hat ihn nicht vergessen. Er hat ihn nie aus den Augen gelassen. Der Vater blieb dem Sohn treu, auch wenn der Sohn ihn verlassen hat.

Gott ist kein Mensch, der Böses mit Bösem vergilt. Er zwingt den Menschen nicht. Er ist langmütig und geduldig. Und vor allem: Er unterscheidet zwischen der  Person und seinem Werk.

Das ist die große  Erkenntnis, für die uns die Reformation die Augen geöffnet hat. Anders als im Buddhismus, wo der Mensch auf seine Taten festgenagelt wird, wissen wir, daß Gott uns  immer als sein Geschöpf ansieht, als seine Kinder. Und er will, das haben wir von Jesus gelernt, von unseren Fehlern und falschen Taten, von unsern Sünden absehen.

So geschieht es ja in unserm Gleichnis. Der Sohn erinnert sich an sein Vaterhaus. Bei dieser Erinnerung geht ihm erst ganz auf, in was für einer Lage er sich befindet. Nun wird ihm der Widersinn seines Lebens deutlich. Er erinnert sich an die Liebe des Vaters, der jedem Menschen, der zu ihm gehört, gleichen Lohn gibt, so dass jeder in der Vaters Haus genug hat. Und er erinnert sich an die Güte des Vaters und hofft auf dessen Liebe, auch wenn er sie selbst nicht mehr verdient hat. Er kehrt um. Umkehr heißt Heimkehr.

Jetzt können wir verstehen was Jesus mit Buße, Umkehr meint:  nach Hause kommen. Das macht Freude. Ich erinnere mich an die Kriegszeit im 2. Weltkrieg, den ich als Kind noch erlebte, wie sich die Soldaten freuten, wenn sie auf Heimaturlaub nach Hause fahren durften. Und wie habe ich mich gefreut, wenn auf einer Jugendfreizeit, bei der ich mich nicht besonders wohl fühlte, der letzte Tag kam und es hieß, morgen geht es nach Hause.

Das meint Jesus. Es gibt ein Vaterhaus. Wir sind dazu geschaffen, mit Gott in einer Gemeinschaft mit ihm zu leben. Dort haben wir wahre Freiheit, Selbstgesuchte Freiheit führt in die Unfreiheit, verstrickt und ins eigene Ich.

Ich weiß nicht, ob der Sohn damit gerechnet hat, dass ihn ein Donnerwetter oder eine Strafe erwartet. Malte er sich die letzten schweren Schritte aus, in die Nähe des Elternhauses zu kommen?

Es kam so ganz anders. Der Vater eilt ihm entgegen! Er hat ihn erwartet und kann vor Freude nicht im Haus bleiben, da er ihn von ferne sieht. Und er setzt ihn wieder ein in die alte Position als Sohn. Er schenkt ihm ein neues Kleid und einen Siegelring. Hier werden nicht einfach Lumpen ersetzt. Kleid und Siegelring sind in damaliger Zeit Rechtszeichen: Der Sohn ist wieder erbberechtigtes Kind wie vorher. Der Rechtsstatus wird wieder hergestellt.

Nun lernen wir etwas neues, nämlich was Rechtfertigung meint. Dieser schwere theologische, aber so zentrale Begriff, den uns Luther neu erschlossen hat, meint schlicht dies: Gott nimmt mich ohne Vorbedingung an. Ich bin wieder gleichberechtigt mit allen Heiligen im Himmel. Gottes Liebe ist unkonditional! „Unconditional acceptance“- das meint Rechtfertigung. Darüber darf und soll man sich freuen.

Und das ist das Dritte, was wir über Gott lernen: Er freut sich über uns und mit uns und will daß sie alle mitfreuen. Freude gehört zum Christsein. Das Reich Gottes ist Gerechtigkeit, sagt Paulus, Friede und Freude, die der Heilige Geist uns schenkt! (Röm. 14, 17)

Aber wie ist das bei uns? Mir scheint, dass besonders die evangelischen Christen das Freuen verlernt haben, jedenfalls hier in Deutschland. Gerade die frommen Christen sind so leicht rechthaberisch und kritisieren so gern die anderen, wenn sie nicht so sind wir. Wenn sie einen anderen Lebensstil haben, anders glauben und leben. Wir sind so oft wie der ältere Bruder.

Der zählt die Sünden des Bruders auf, der deckt die Verfehlungen auf, die der Vater doch längst zugedeckt und vergeben hat. So legen auch wir gern im frommen Bewusstsein noch einmal den Finger in die Wunde. Es fällt uns so schwer zu vergessen, was der andere getan hat.

Nicht so der Vater, er lädt zu Freude ein. Und das ist das Dritte, was wir über Gott lernen. Er freut ich über uns und will, dass wir an seiner Freude zusammen, gemeinschaftlich teilhaben. Wir sind zur Freude berufen.

Halten wir fest: Drei verschiedene Seiten Gottes lernen wir durch das Gleichnis kennen: 1. Gott ist ein Gott, der uns in die Freiheit entläßt. Gott ist nicht ein absoluter Herrscher, nicht der schnellste Rechner, wie es im Koran heißt. Das Christentum ist eine Religion der Freiheit.

2. Gott unterscheidet zwischen Person und Werk, zwischen uns und unseren Taten. Er sieht uns, nicht unsere Taten an. Er rechtfertigt uns, so lernen wir von Jesus, er nimmt uns ohne Vorbedingungen an.

3. Die Überschrift über das Gleichnis muß heißen „Von der Freude Gottes“. Gott will sich an seiner Schöpfung, an uns freuen. Er will, daß wir uns freuen und fröhlich s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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