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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 2: 진리, 사랑, 동행과 겸손(창 28:10-22; 롬 8:33-39; 요 17:11-19)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6월2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5.31 19:54

1.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

<승천하시는 예수님>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을 지납니다. 마지막 부활절기이죠? 다음 주는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성령강림주일입니다. 두 주 전부터 복음서 세 본문 말씀의 주제는 먼저, 예수께서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한번은 ‘책망의 말씀’을, 또 한번은 ‘당부의 말씀’을 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명을 잘 보전하는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세 본문 말씀도 역시 당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당부의 말씀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이며, 서신서와 구약의 말씀도 각각 ‘사랑’과 ‘동행’을 주제로 한 당부의 말씀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라는 당부를, 구약 창세기의 말씀은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핵심은 동행, 곧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하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동행에 야곱이 겪어야 했던 겸손이 오늘 우리에게도 요구가 됩니다.

따라서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따스한 사랑의 마음을 우리는 세 본문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환경주일인데, 예수님의 당부는, 아니 세 본문 말씀의 당부는 우리 인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 세계 전체를 향한 당부이기도 합니다. 진리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라! 오늘 말씀을 통해 귀한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라!

신학적으로 요한복음 13-16장까지를 예수님의 고별설교라고 부릅니다. 이 설교에는 각각 제자들이 겪고 있는 세 가지의 위기 상황과 그 해결책이 들어있습니다. 먼저, 위기 상황은 이렇습니다.

① 첫 번째 고별설교(요 13:31-14:31): 예수께서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고 가시기 때문에 생긴 위기
② 두 번째 고별설교(요 15:1-16:4a): 요한공동체와 유대교 회당과의 갈등 위기
③ 세 번째 고별설교(요 16:4b-16:33): 요한공동체가 적대적인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소외감의 위기

그리고 이러한 위기에 관해 각각의 설교는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① 첫 번째 고별설교: 보혜사가 오셔서 영원히 함께 하실 것(요 14:16-18)
② 두 번째 고별설교: 예수님도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 당했음(요 15:25-27)
③ 세 번째 고별설교: 보혜사가 불신의 세상을 심판 할 것(요 16:8-11)

이렇게 고별 설교를 통해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다 주셨는데, 왜 고별기도가 필요할까요? 바로 요한공동체의 상황 때문입니다. 요한공동체에는 성령을 직접 경험한, 따라서 현재적으로 구원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 간에 서열과 권위를 놓고, 심각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세상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곳간 키를 누가 쥐고 있는가에 따라 서열이 구분됩니다.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왕 노릇 한다”지요?

아무튼 예수께서 떠나 가버린 상황에서 요한공동체 내에는, 예수님의 권위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단순히 과거의 인물일 뿐이며, 후계자들에 의해서 대치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인물일 뿐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떠나시고 안 계신 상황에서, 요한 공동체의 어느 누군가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권위를 행사하면서 자신이 ‘예수의 후계자’라고, 혹은 ‘예수의 권위를 대신할 자’로 자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단들이 난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별설교가 ‘아들의 우월성과 우위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난주 고별기도문에도 나오죠?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아들의 영화로움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하신 영화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별 설교는 아버지와 아들간의 독특한 관계를 강조하며, 예수님 외에 다른 후계자를 생각할 수 없는, 아들의 유일성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7장은 고별 설교에 이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중보기도’, 곧 ‘고별기도문’입니다. 기도문의 내용을 보면, 먼저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간청의 기도(요 17:1-10)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제자들이 하나가 될 것과 충성을 간구하시는 기도(11-14)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제자들로 하여금 거룩성을 간직하도록 요청하시는 것(15-19)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성도들의 연합을 위해 기도(요 17:20-26)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두 번째와 세 번째로 특별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내용이 핵심을 이룹니다. 함께 말씀을 볼까요?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1-12)

12절의 말씀이 조금 어렵습니다.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그 동안에 오직 멸망할 운명에 놓인 자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가룟 유다를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계속 볼까요?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πονηρός)’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3-15)

15절도 공동번역은 이렇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원하는 것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지켜주시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승천 이후, 이 세상을 살아갈 제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의 말씀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통해 악(마)로부터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악’으로 사용된 헬라어 포네루스는 단순히 사탄이나 마귀, 악마와 같은 것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비열하고, 악독하고, 타락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거리의 불량배’란 뜻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포네루스라는 말의 뜻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오늘 개신교회가, 목회자들이 세상에서 포네루스가 되어, 오히려 세상을 타락시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아무튼, 계속 예수님의 당부의 말씀을 볼까요? 공동번역의 말씀이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17:16-19)

결국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아버지(ἀληθείᾳ, 진리)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ἡγιασμένοι, 거룩하게 되다)’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장은 성령의 역할에 대한 소개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에 의해 믿는 자들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과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성도들이 칭의와 성화의 과정을 거쳐 영화의 단계까지 이르는 영적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γυμνότης,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3-3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가 고통과 핍박 가운데 있더라도, 지켜주시겠다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고별 설교를 듣는 느낌입니다. 계속 볼까요?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6-39)

4.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구약의 말씀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찬송가 364장 ‘내주를 가까이 하려함은’의 배경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당부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야곱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지내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인 야곱은,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밧단아람(메소포타미아)으로 도망가던 중 벧엘에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꿈속에서 사닥다리를 보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운 말씀이 아니기에, 교독해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말씀으로 읽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말씀으로 안내하는 안내자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깊이 생각하며,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구나 하고, 정신을 집중하고 읽어야 합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메소포타미아)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סֻלָּם֙)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 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 28:10-14)

사닥다리 환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잠을 깹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창 28:16-19)

 

<야곱과 꿈에 본 사닥다리>

그리고 야곱은 서원기도를 합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20-21)

이후의 야곱의 삶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겸손의 훈련입니다. 그러나 그 겸손의 훈련 가운데 늘 하나님께서 야곱과 동행하셨습니다. 따라서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동행’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하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응답하여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세 가지를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둘째, 베개로 삼았던 돌기둥으로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 것이며, 셋째,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야곱의 맹세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며, 지금 우리 삶의 고난의 자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5. 겸손의 열 두 사닥다리

야곱이 꿈에서 본 환상인 ‘슐람(층계, 혹은 사닥다리)’의 의미를 ‘겸손의 단계’로 본 이가 있습니다. 대 영성가인 이탈리아 중부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투스(분도, 480?~547?)입니다. 그는 겸손의 12단계를 야곱이 꿈속에서 본 사닥다리와 비교합니다. 야곱이 꿈속에서 본, 천사가 오르내리는 사닥다리는 교부들에게는 본질을 직관하는 하나의 표상이고, 하늘은 이 직관 안에서 우리에게 그 문을 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리스도는 우리의 사다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내려오셨고, 따라서 우리는 그를 통하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듯이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투스>

재미있는 은유인데, 중세 교부들은 사다리의 양쪽 두 기둥을 ‘구약성서-신약성서’ 또는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네딕투스는 ‘영혼-육신’을 이 사닥다리의 두 기둥으로 보았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 안에 하나의 사닥다리를 놓으셔서, 우리가 당신께 올라가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올라가기 위해서는 겸손으로 먼저 아래로 내려갈 때 다시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길은 육신과 영혼의 긴장을 거치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길이 순수한 영적인 길만이 아닌, 육신도 함께 고려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베네딕투스는 이러한 겸손의 12단계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어떠한 것도 생략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럼 그 단계를 살펴볼까요?

첫째 단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경외심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경외심이야말로, 신앙의 기초이며 겸손의 시작입니다.

둘째 단계, ‘하나님의 뜻에 복종(服從)과 순응(順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욕망을 버리고 대신 하나님의 뜻을 무조건 따르는 것을 순종이라 합니다. 순종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따름을 ‘복종’이라고 합니다. 복종은 비록 그 명령이 정의롭지 못한 명령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단계, ‘스승에 대한 존경(尊敬)과 순종(純宗)’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닌 스승과 웃어른에 대한 존경과 순종입니다. 2단계인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순응한다는 것이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3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는 도구로 ‘성경(말씀)’과 ‘스승(목회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복종하려면 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영적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겸손의 제 3단계는 나를 가르쳐 주시는 영적 스승과 나보다 인생을 먼저 사신 웃어른들을 존경하고 그분들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넷째 단계, ‘인내(忍耐)’입니다. 인내란 무조건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과 웃어른에 대한 존경과 순종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모든 내적 혹은 외적, 사회적 부조리, 모순, 곤경과 고통의 현실을 목격하고 직면할 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다섯째 단계, ‘절대정직(絶對正直)’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적 결핍이나 고민, 혹은 과거와 현재에 저지른 잘못이나 잘못된 생각, 동기까지도 다 숨기지 않고 예수님께 고백(회개)하고, 상담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완전한 자가 아니다’는 자기 한계를 인식, 자각, 인정, 반성하고 돌이키기 위해서입니다.

여섯째 단계, ‘양보(讓步)’입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수단입니다. 자기 것을 다 챙기고 자기의 이익을 내려놓지 않고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일곱째 단계, ‘자신을 무익한 종(從)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장 낮은 자로, 무익한 종으로 생각하는 마음과 깨달음과 자각과 인식입니다.(눅 17:10)

여덟째 단계. ‘타인존중(他人尊重)과 배움’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서로서로 부족한 점을 돕고 채우라고 만드신 이유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우는 것이 겸손의 단계입니다.

아홉 번째 단계는 ‘침묵(沈默)’입니다. 침묵하기 위해서는 남이 묻기 전에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을 적게 하는 것만으로도 죄 짓는 것을 멈출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죄는 말로 짓기 때문입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0:19)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1:26)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

열 번째 단계는 ‘큰 웃음을 삼가 하는 것’입니다. 분별없는 큰 웃음은 자기 자랑과 과시의 인상을 주어 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내가 크게 웃고 있을 때,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이를 갈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열한 번째 단계는 ‘낮은 소리로 말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타인과 말을 할 때 큰 소리 대신 작고 낮은 소리로 말을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큰 소리 대신에 부드럽고 인자하며 친절하고 신중하며 그리고 간단명료하면서도 사려 깊게 말을 합니다.

열두 번째 단계는 겸손의 가장 높은 단계인데, 바로 ‘완전한 사랑’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정원에서나 들판에서나, 일할 때나 여행 중이나, 기도할 때나 쉴 때나, 앉으나 서나, 걸을 때나 멈출 때나, 말을 할 때나, 생각을 할 때나, 언제나 머리를 약간 숙여 아래를 바라보며 자세를 낮춥니다. 완전한 사랑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더 겸손해지게 하며, 동시에 다른 피조물이나 사람들에게 더욱 관대하고 인자하게 대합니다. 자기를 사랑함과 동시에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전 인류를 사랑함에 있어 차별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항상 아래로 내려가며, 낮은 곳에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사닥다리 교훈을 통해 보여줍니다. 겸손의 사닥다리를 오늘도 한 계단씩 오르고, 또 오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당부의 말씀인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와 사도 바울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라는 당부의 말씀을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오늘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그 당부의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아멘.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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