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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멸의 대상은 이스라엘 자신이었다적을 무찌르는 신앙(민 21:2-3)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6.02 16:42
2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넘기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과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요즘 사회의 모습이나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갖게 되는 생각이 있습니다. 왜 자신의 반대편에 서 있는 상대편을 만들고, 그 상대편이 사라져야만 자신이 바르게 선다고 생각할까? 하는 점입니다.

사회적인 현상도 상당히 이해가 되지 않고 보는 일만으로도 지치긴 합니다만, 교회가 이러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점, 교회가 ‘적’이라고 지정한 대상을 향해 당연하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고, 오히려 이를 장려하고 있다는 점은 목사이기 전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예전에 한국교회사를 가르치시던 서정민 교수님이 기장교회의 멋있었던 모습 중 하나라고 얘기해주셨던 내용이 있습니다. 일제시대 이후, 일본 개신교회의 목회자들은 한국에 사과해야 한다는 결정을 하였고, 이를 위해 한국에 와서 각 교단 총회에 참석하여 자신들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고개를 숙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사죄를 한국의 교회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교단들에서 사죄를 거부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모든 교단을 다 돌며 사죄를 합니다. 그들이 왔을 때, 기장 총회에서도 갑론을박이 펼쳐졌다고 합니다. 사과를 받아야 한다, 말아야 한다. 언성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그때 한 노(老)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 개인의 감정으로 이들의 사죄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나는 그리스도인이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이라, 아무리 미워도 이들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밖에 없다.”

이후 총회 장소에는 숙연함만이 가득했고, 기장 교단은 한국 개신교 교단 중 처음으로 일본 교회의 사과를 받아들인 교단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장이라는 교단이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저 노목사님의 말씀에 반박을 할 수 없습니다. 반박할 수 없어야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들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한 번 ‘적’이라고 지정한 대상에 한해서는 그 대상이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교회 안에 가득 차 있는 듯 합니다.

진멸하라

교회는 왜 어떠한 상대에게 적의를 갖고 그 상대가 파멸할 때까지 가차 없는 폭력을 휘두르고 있을까요? 교회가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신앙의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아마도 교회가 평소에는 잘 읽지도, 말씀으로 나누지도 않는 구약성경, 특히 민수기나 여호수아에 나타난 말씀들에 그 근거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Charles Le Brun, “The Brazen Serpent” ⓒBristol Museums, Galleries & Archives

제가 간혹 ‘한국 교회는 구약성경을 거들떠 보지 않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제 생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2011년도에 한세대 차준희 교수가 한국구약학회에서 발표한 내용이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 교회 설교 본문 분포도를 조사했는데, 전체 설교 본문에서 신약이 63.5% 구약이 35.6%였습니다. 여기에서 구약 본문도 시편, 창세기, 이사야, 출애굽기에 편중되어 있음이 나타났습니다.

평소에는 신약 성경, 특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이라던지,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 말하고, 사도 바울의 이야기들, 특히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정도만을 이야기하면서, 누군가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순간에는 구약성경을 꺼내들고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겠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명령, 바로 ‘진멸하라’는 명령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런 하나님의 모습은 초대 교회 시절부터 신앙인들에게 큰 문제였습니다. 1세기 후반부터 2세기에 활동했던 마르시온의 경우에는 구약의 하나님은 악한 하나님이라고 규정하였고, 구약성경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거스틴도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상대방을 무참하게 죽여버리기를 강요하는 악한 하나님이기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참된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교회를 떠났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회심하여 교회로 돌아왔고,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교부가 됩니다.

이들에 대해서도 역시나 이해가 안되는 점이 있긴 합니다. 이렇게까지 악한 하나님에 대해서 고민했던 이들 역시도 자신들이 ‘적’이라고 여기는 대상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악을 휘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는 어거스틴에 의해 기반이 마련되었고, 마틴 루터에 의해 승인된 사건이라고도 말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민족인 유대인은 폭력을 휘둘러도 괜찮은 또는 진멸해야 하는 민족일 뿐이었습니다.

과거 교부들의 모습에서도 보여지는 바, 교회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 민수기나 여호수아에서 상대방을 진멸하도록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악해 보인다고 여겼음에도, 결국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악해 보이는 그 명령을 그대로 따르도록 말해왔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이들의 신앙

저는 오늘 한국 개신교가 잘못된 길을 나아가고 있으니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말씀의 중심에 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말씀은 너무 자주 드렸습니다. 다만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고 사용하면서 어떤 잘못을 행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 중에 가장 큰 문제를 야기하는 한 가지는 성경은 성경 글자 그대로의 시기에 기록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창세기는 조금 열외로 하고,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의 말씀은 광야 40년을 거친 후 모세가 그 시기에 기록한 책이라고 믿는 식의 신앙입니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자면, 류성룡이 ‘징비록’을 기록한 시점은 임진왜란 직후 10년이 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징비록’은 왜란 당시의 이야기들과 왜란 직후의 상황을 그 당시를 겪은 사람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반면에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1145년 고려 치하에서 400-500년 전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렇기에 삼국시대를 살던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고려 시대를 살던 사람이 되돌아보는 삼국 시대의 이야기가 됩니다.

구약성경은, 특히 모세 오경은 징비록처럼 그 순간에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훨씬 후대에 기록된 책입니다. 기록 연대를 아무리 빨리 잡아도 앗수르라는 강대국이 전 세계 속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에 기록된 책입니다. 많이 아시는 이야기겠지만, 모세 오경은 모세가 쓴 책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민수기나 여호수아에 나타난 ‘진멸하라’는 말씀은 단순하게 적을 모두 물리치고 가나안을 점령한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뻐하면서 떠올린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대국에 의해 침략당하고 수탈당하던 시기에 과거의 자신들의 잘못은 반성하고 뉘우치며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런 모습은 신명기 7장에 잘 나타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기시고 그들을 크게 혼란하게 하여 마침내 진멸하시고,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넘기시리니 너는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마침내 그들을 진멸하리라.”

23-24절은 그저 진멸하라는 명령으로만 보입니다만, 25절 이후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후대에 이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올무에 걸릴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 ‘진멸하라’는 명령은 이스라엘 속에 우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분명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고 성경에 기록하였습니다. 자신들이 또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 기록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잘 아는 사울 왕의 이야기, 사무엘상 15장에 나타나는 아말렉과의 전투 후에 사울이 양과 소를 모두 죽이지 않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야기도 후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엇을 반성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소와 양을 진멸하지 않고 남겼다는 이야기는 반대로 내 소출 중에서, 내가 키워낸 소출 중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바치지 않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는 제사의 본래적인 의미를 지키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울의 행동에서 보여지는 바는, 하나님의 명령과는 다르게 수탈과 약탈을 통한 제사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행동을 벌이는 사울을 버리십니다.

성경 인물에서 성경을 기록한 이들로

구약성경의 ‘진멸하라’는 말씀이 나타나는 본문들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신앙은 ‘적을 철저하게 무찌르는 신앙’이 아닙니다. 십자군 전쟁 당시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군병이라 칭한 이들이 외쳤던 구호 “데우스 불트(Deus Vult)”, “하나님께서 (전쟁을) 원하신다”처럼 읽혀서는 안 되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침략당하는 원인을,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게 된 원인을 자신들 스스로에게 돌리며 과거에 우상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던 자신들에 대한 반성이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했던 자신들에 대한 반성입니다. 끊임없는 자기반성의 흔적이 바로 ‘진멸하라’는 본문들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러한 자기반성의 본문들을 앞서 말씀드린 십자군의 구호처럼 남을 핍박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근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나의 잘못은 여전히 외면하고 모든 것은 남의 잘못 때문이라고 외치는 곳에 이 말씀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드리고 있는 말씀은 역사비평이라는 신학에 근간을 둔 말씀입니다. 전통적으로 오경은 모세가 기록했다고 이야기해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드리고 있는 말씀은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서 어느정도 밝혀진 구약성경의 기록 연대에 따르고 있는 말씀입니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은 이런 신학은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고, 불경하다고 여기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왜 오경을 모세가 기록했어야만 성경이 거룩해지는 것인지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좋고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말해야만 성경이 경건하고 거룩한 책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히려 구약성경이 바벨론 포로기 때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에서 너무나도 큰 감동을 느낍니다. 철저하게 무너져버린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고백한 이들,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여기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며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던 이들, 끊임없는 반성 속에서 자신들과 과거 역사를 기록했던 이들, 이들의 그 신앙을 바라보면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신앙보다 더 큰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또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들임을 읽게 되었을 때, 저는 은혜를 느낍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다윗의 실수를 성경이 적고 있을 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불신앙을 읽어낼 때에, 저는 성경에 대한 경외감을 느낍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완전할 수 없음을 성경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고, 우리가 쫓아야 할 이야기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 뿐임을 성경이 끊임없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이 얼마나 귀하고 거룩한 책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을 예화집이나 이야기책처럼 읽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입맛에 따라 성경 말씀을 골라서 읽는 신앙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신앙을 얻으려는 것은 초심자를 위한 성경 공부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성경을 읽으시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반성하는, 그렇기에 자신들의 잘못을 성경 속에 빠짐없이 기록했던 이들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적을 진멸해야 우리가 산다’가 아니라 ‘악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죄를 회개합니다’라고 외치는 그들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삶을 사시는, 지금 우리의 신앙을 기록해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누군가를 무찔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가르침들과 이 세상의 구호들은 모두, 이를 통해 이익을 얻게 되는 소수만을 위한 헛된 가르침이요 외침입니다. 그런 헛된 외침에 현혹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음성에 귀 기울이시고 이를 통해 진정으로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시는, 그리하여 참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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