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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사법살인을 당하다”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74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 승인 2019.06.04 17:15
“만약 백성이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임으로써 그들을 협박하겠는가?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면서도 속이는 자를 내가 사로잡아서 죽인다면, 누가 감히 (그렇게 할까)? (만약 백성이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곧 죽임을 맡은 자가 항상 있어서 죽인다. 대저 죽임을 맡은 자를 대신하여 죽이는 것을 일컬어 큰 장인을 대신하여 깎는다고 하는데, 대저 큰 장인을 대신하여 깎는 자는 그 손을 다치지 않는 자가 거의 없느니라.”
- 노자, 『도덕경』, 74장
(若)民(恒且)不畏死, 奈何以死(殺)懼之, 若<使>民常畏死, 而爲(奇)者, 吾得執而殺之, 孰敢, (若民恒且不畏死) 則常有司殺者殺, 夫代司殺者殺, 是謂代大匠斲, 夫代大匠斲者, 希有不傷其手矣

법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불충하다고 하여 극심한 형벌을 주고 때로 죽이기도 한다. 죽이면서도 不善 不忠한 도둑을 죽였다고 명분을 내세운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도둑을 죽인 것이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장자 천운편>

사형이 무거운 형벌이지만 그래도 백성이 죄를 범하는 것은 법을 지키면 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법을 어기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형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백성이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정치가 가혹하기 때문이다.

▲ Jes&#250;s en casa de An&#225;s Museo del Prado Jos&#233; de Madrazo ⓒWikipedia

살기가 편하여 백성이 죽음을 두려워할 때, 가혹한 정치를 하는 사람을 직접 잡아서 죽인다면 아무도 함부로 인위적인 정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인위적인 정치를 그치면, 백성이 수명대로 살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죽음은 오직 자연이 맡아서 할 뿐이다. 자연적인 수명을 다해 죽음이 올 때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가 사람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은 자연을 대신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는
상을 주지 않아도
백성은 열심히 일하였고,
벌을 주지 않아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대가 상과 벌을 시행하는 데도
백성은 어질지 않습니다.
덕이 이로부터 쇠약해지고,
형벌이 이로부터 섰습니다.
뒤 세상의 혼란은
이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 장자, “천지편”, 백성 자고가 우임금에게

마가는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말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산헤드린 재판 그 자체가 오히려 불법적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재판은 그저 요식행위에 불과하였고, 오히려 재판의 절차는 하나하나가 자기들의 법을 위반하는 일이었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가는 권력이 법보다 위에 있으며, 그 힘이 한 사람의 생명과 인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을 고발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형언도는 공권력에 의한 사법살인이다.

예수님 당시나 오늘 우리 사회에서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말보다는 ‘법 앞에서 만 명만 평등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인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기의 맡은 일을 처리해야 할 재판부(사법부)와 권력을 쥔 사람들이 항상 결탁하여 무고한 사람들에게 억울한 판결을 내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는 일은 권력이라는 것이 생길 때부터 계속되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외침이나 예수님의 재판 과정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모든 과정에서 읽어야 할 것은 잘못된 권력과 법의 관계에서 얼마나 억울한 생명의 희생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아직도 돈과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법으로 서민과 민중들에게 죽임 당함을 강요한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은 예수님을 비롯하여 나를 위해 죽임 당했고 지금도 죽임 당하는 그 희생에 감사하고 그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일이다.

“산헤드린의 재판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냐’에 초점을 두면서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정죄합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재판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냐’에 초점을 두면서 예수님이 황제의 권력에 도전하면서 정치적 혁명을 시도하였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소이유가 바뀐 것입니다. 산헤드린의 대제사장들, 장로들, 율법학자들에게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목적만 있을 뿐 그 수단은 어떠해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이상하리만치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침묵이 은폐의 몸짓이 아니라, 강한 저항의 몸짓이다.” 
예수님의 침묵은 자기의 길을 가기 위한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숨 가쁘게 달려온 그 길을 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 길을 피하기 위해서 괴로워하면서도 가야만하는 그 길을 가기 위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놓음으로써 이 땅에서 억울하게 죽임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는 그 길을 가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죽음으로 구원(해방)과 영생(참 삶)을 주는 그 길을 가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거대한 권력 앞에서 예수님의 침묵은 그 권력과 폭력에 대한 폭로입니다. 산헤드린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의 폭력과, 로마 황제의 대리자로 식민지를 지배하는 로마 총독의 권력에 대한 폭로입니다. 자기들보다 나은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는 오만에 대한 폭로입니다. 자기의 목적과 주장을 어떻게 해서든지 관철시키려는 사람들의 독선에 대한 폭로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교묘하게 회피하려는 사람들의 무책임에 대한 폭로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진실을 향한 침묵”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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