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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보이는가, 무엇을 보려는가?” ⑵블라디미르 쿠쉬의 “Tree of Life”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6.07 18:20

생명을 낳는 나무

생명의 나무는 어떤 모습일까? 아담과 하와만이 알고 있는 나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의 나무Tree of Life다. 에덴에서 떠나야했던 이후 생명의 나무는 아무도 본 적이 없다. 영생의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그 나무는 어떤 모습일까? 신화에 등장하는 세계수나 단군신화의 신단수神檀樹 같은 나무도 생명의 나무라고 한다. 신화, 고전, 종교에서 생명의 나무는 우주의 근원, 생명의 근원을 상징한다. 그 모습을 상상하여 표현해 본다면, 우주의 구조와 생명의 근원, 영생의 풍경을 보여주는 은유이자 시詩일 것이다.

▲ Vladimir Kush, “Tree of Life” (60×80 inches)

블라디미르 쿠쉬의 작품 「생명의 나무」도 우주와 생명의 근원에 대한 시詩를 보여준다. 숨은 그림 찾기를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은유들이 담겨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생명의 출산이다. 큰 맥락을 살펴보면 왜 그리 표현하는지 알 수 있다. 먼저 찬찬히 살펴보자. 생명의 출산이 보이는가?

이 작품은 자궁의 문이 열리며 생명과 존재를 낳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무 한 가운데 크게 갈라진 틈으로 검은 공간이 보인다. 자궁의 문이 열리는 모습이다. 그 속에는 거미 한 마리가 거미줄로 에펠탑을 엮어 놓았다. 거미는 배에 시계를 품고 있다.

쿠쉬 작품에서 거미는 늘 시계와 함께 등장한다. 인디안 신화에서 따온 은유다. 인디안 신화에서 거미는 시간과 공간을 엮어내는 존재다. 거미가 거미줄을 치면 공간이 보이기 시작한다. 또한 거미줄에서 기다리는 거미는 시간이 느끼게 한다. 배에 시계를 품고 있는 거미는 그러므로 자궁의 문이 열리면서 시간과 공간을 낳고 있는 출산의 은유다. 생명의 나무가 시간과 공간을 낳고 있다.

나무 바로 오른쪽에는 돌이 되어가는 열매가 놓여있다. 생명의 나무

바로 옆에 누군가 한 입 배어먹고 버려둔 열매가 돌처럼 굳어가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먹었던 선악과가 떠오른다. 그 선악과조차 어머니 된 생명은 다시 한 그루의 나무로 살리고 키우고 있다. 그 오른쪽에는 도끼에 잘려 밑동만 남은 나무가 있다. 그런데 그 나무를 자른 도끼에서 잎이 돋아난다. 잘린 나무 밑동이 자신을 자르고 자기 상처에게 박힌 도끼조차 살리고는 있는 모습이다.

선악과에서 자란 나무와 도끼에서 자란 나무는 생명의 절대적 사랑을 보여준다. 생명은 타락의 열매라 해도, 자신을 상처 준 도끼라 해도 살리고 살린다. 생명의 나무는 절대적 살림을 낳고 또한 기른다.

작품에 비친 마음

시계를 품은 거미, 자궁의 문, 열매에서 자란 나무, 도끼에서 돋은 잎사귀… 이외에도 민들레 홀씨에 매달린 사람들, 가방으로 된 집, 숲의 성당, 공중의 나무와 열매 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바라보는 묵상 속에서 가장 시선을 끈 부분은 배를 탄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나님과 함께 이 작품을 바라보며 기도하다가 노 젓는 사람에 마음이 머물렀다. ‘저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 하나님 저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요?’

갤러리를 방문한 수많은 관람객에게 묻고 또 물었다. “저 배에 탄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요?” 그 대답이 천차만별, 제각기 다르다. 그러나 대략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힘겹고 외롭고 고통스러워 보인다는 느낌이다. 혼자서 힘겹게 배를 저어 깎아지른 수직 벽을 올라가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정반대 느낌을 말하기도 한다. 즐겁고 신나고 재미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대부분 신나게 아래로 내려간다고 본다. 놀이공원에서 물위를 달리는 통나무배를 타는 것처럼 본다.

어떻게 보이는가? 저 사람은 어떨 것 같은가?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든, 감상하는 사람은 제각기 다르게 느낀다. 어쩌면 그 작품에 비치는 자신의 마음은 아닐까? 함께 감상하는 사람과 왜 그렇게 느껴지는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의 깊은 속내를, 삶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이것이 정답 찾기보다 풍성한 예술 감상의 맛과 멋이다.

묵상 가운데 하나님께 작품에 대해 말씀을 드렸다. “하나님, 저 사람은 너무나 외롭고 힘겨워 보입니다. 수평으로 배를 저도 힘든데, 수직으로 올라가니 얼마나 힘들까요? 물 위를 저어가도 힘든데, 나뭇결이니 갈 수나 있을까요? 여럿이 배를 저어도 힘든데, 혼자서 저어야 하니,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얼마나 외롭고 괴로울까요?” 당시에 작품 속 노 젓는 사람이 너무나 아리고 아픈 한 사람을 떠오르게 했다. 아무리 사랑하고 함께 하려 해도 결국 혼자서 나아가야 했던 사람, 누구도 덜어줄 수 없는 고통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만 했던 그 사람을 비춰준 것이다. 그 사람을 그저 눈물과 기도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아픔이 비친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지, 침묵 가운데 한 목소리가 들여오는 듯했다. “하나도 힘들지 않을 수 있다.” 곧바로 반문이 고개를 들었다. “하나도요? 어떻게 힘들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또 침묵이 흐르고 문득 깨달음이 솟아올랐다. 외롭고 괴롭고 고통스럽게만 보이던 그 길이 다른 길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그 나무를 새롭게 보여주신 때문이다. 그 나무가 생명의 나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때문이다. 
“아~! 하나님, 저 나무가 생명의 나무였군요. 저 사람은 생명의 나무에 안겨 있었군요.” 시간과 공간을 낳는 생명의 나무다. 선악과를 살리고, 도끼에 잎사귀를 돋우는 나무다. 살리고 살리는 생명의 나무다. 노를 젓는 사람은 그 생명나무의 품에 안겨 있다. 그 사람이 애쓰고 용쓰지 않아도 생명의 나무는 끊임없이 자란다. 때로 지쳐 쓰러진다해도 배에서 내리지만 않는다면, 생명의 나무는 자라나고, 배는 결국 올라갈 것이다. 얼마나 올라가느냐와 상관없이 그 사람은 어머니 된 생명의 품에 안겨 있다.

노 젓는 사람이 힘든 경우는 한 가지뿐이다. 생명의 나무가 자라나는 방향과 속도를 거스를 때뿐이다. 나무의 속도보다 더 빨리, 혹은 더 느리게 가려하면 힘들 수밖에 없다. 나무가 자라는 방향과 다르게 나아가려 해도 힘겨울 수밖에 없다. 노 젓는 사람이 힘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마음이다. 더 빨리, 더 느리게, 다른 방향으로 가야만 한다는 집착만큼 무거운 짐도 드물다. 마음은 무게가 없지만 그 무엇보다 무겁다. 가벼운 것조차, 허상조차 무겁게 만든다. 눈송이 무게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그 가벼운 눈송이도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면, 태풍을 이겨낸 소나무 가지도 부러뜨린다. 집착과 두려움과 불안이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일 때, 삶을 부러뜨리고 만다.

시베리안 허스키와 처음 산책을 나가던 때가 떠올랐다. 밖으로 나가면 목줄에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려고만 했다. 무릎이 좋지 않았던 지라 천천히 걸으려고 목줄을 강하게 잡았다. 뛰려는 힘과 걸으려는 저항, 그렇게 서로 용을 쓰면서 3~40분쯤 걷다가 돌아오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애완견이 앞서 가면 자신이 주인인줄로 안다는 것이다. 훈련법이 있었다. 앞서 가는 순간, 바로 방향을 바꾸고, 다시 앞서 가면 또 방향을 바꾸는 방식이다. 그렇게 수없이 반복하면,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앞서 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그리도 오래 헤맸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하나님보다 앞서 가려는 순간, 방향을 트신 것은 아닌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 설정이 가나안 도착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느냐 보다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하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비춰보고 돌아보게 하는 지점이다. 목적지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하나님께 마음을 빼앗겼는지가 핵심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왜 힘들었는지, 무엇이 힘들게 한 것인지도 비춰준다. 하나님보다 앞서 가려할 때, 힘들 수밖에 없다. 교회가 이런 욕망을 부추긴 것이 아닌가. 40일 기도, 100일기도, 일천번제… 목적지는 자신이 정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원으로 하나님을 끌고 나아가 성취하면, 은혜고, 축복이고, 능력 있는 기도라고 치켜세운 것은 아닌가. 물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어디로 향하시는지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을 끌고만 가려할 때, 힘들 수밖에 없다. 그 문제의 크기와 무게를 마음의 집착이 한없이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미로를 미궁으로

생명의 나무, 그 흐름을 따라가는 삶, 깊은 울림을 주는  깨달음임에 틀림없다. 하나님보다 앞서 가지 않는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깨우친다. 노 젓는 사람이 왜 힘든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 지 깨닫는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생명나무의 흐름을 따라가면 정말 고통스럽지 않은가? 외롭지 않고 괴롭지 않은가? 아쉽지만 삶은 그렇게 낭만적이거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주님조차도 우시고 불안해하시고 괴로워하시지 않았던가.

특히나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것만 같을 때가 문제다. 아무리 애쓰고 용 써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 출구 없는 미로에서 생명나무의 흐름을 따라가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데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사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직면하곤 하는 현실이다. 그 한계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미로를 미궁으로 살아가는 삶을 화두 삼게 된 지점이다.

미로와 미궁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maze, 미로는 길을 잃게 하려고 만든다. 수많은 갈림길, 수많은 막다른 골목으로 출구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만든다. 하지만 labyrinth, 미궁은 길이 아니라 자신을 잊게 하려고 만든다. 미로와는 달리 미궁은 막다른 길이 없다. 복잡하지만 가만히 길을 따라 가면 중심에 도달할 수 있고, 계속 따라 가면 그 중심을 거쳐 결국은 바깥의 출구로 나올 수 있다. 그 중심은 죽음을 상징한다. 자신은 죽고 거듭난 생명으로 돌아 나오는 것이다.

길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에 온 영혼을 기울이면, 지금 여기에만 몰입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미궁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도 빠져나오게 된다. 걱정, 근심, 불안…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삶으로 돌아오게 한다. 그래서 labyrinth, 미궁은 사진에 보듯이 성당이나 수도원에 기도를 위해 그려 놓는다.

<Chartres Cathedral in France>

예수님 따라 살아가다가 가난해지면 어떻게 하지, 핍박을 당하면 어떻게 하지, 순교를 당하면 어떻게 하지, 그렇게 살아간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 이런 모든 자기 판단, 상념, 불안을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는 몸짓, 주님을 향하고 또 향하는 맘짓, 그것이 미궁의 중심을 향하는 발걸음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부인한 존재로 다시 바깥으로, 삶으로 돌아올 때, 지금 주어진 십자가를 지게 된다. 그것이 미궁의 발걸음이 걷는 삶이다. 제자들이 걸어간 걸음이고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걸음이다. 미로를 미궁으로 살아가는 삶,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이들에게 절실한 삶의 묘수가 아닐까.

말기암 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서 미로를 미궁처럼 살아가는 삶을 목격할 때가 있다. 암치료는 정말 미로처럼 계속되는 고통과 난관의 연속이다. 희망보다는 절망의 막다른 골목이 수없이 나타난다. 그 미로를 벗어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아니 벗어나지 못할 확률이 너무 높다. 그러나 암의 미로를 미궁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암으로 죽을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날그날 자신에게 주어진 한 걸음의 삶에 충실하게 몰입한다. 병원에서도 봉사활동으로 다른 환자를 돕고, 그날 할 수 있는 작은 일로 사랑을 살아낸다. 암이 악화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과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한 순간을 영원처럼 충실하게 몰입한다. 이웃을 돕고, 가족에게 할 수 있는 작은 사랑을 살아낸다. 그런 분들이 치료 효과도 훨씬 좋고 암을 극복해내는 확률이 훨씬 높다고 한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마태복음 6:33,34을 메시지성경은 이렇게 의역한다. “너희는 하나님이 실체가 되시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며, 하나님이 공금하시는 삶에 흠뻑 젖어 살아라. 뭔가 놓칠까 봐 걱정하지 마라. 너희 매일의 삶에 필요한 것은 모두 채워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하고 계시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여라. 내일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로 동요하지 마라. 어떠한 어려운 일이 닥쳐도 막상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이다.”

바로 지금 하고 계신 일에 온전히 몰입할 때, 미로는 주님과 함께 거하는 미궁이 된다. 이 계획이, 이 사업이, 이 업무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인생의 이런 저런 문제들이 어긋나고 좌초되면 어떻게 하지… 이 무수한 불안과 두려움이 실은 욕망의 미로다. 우리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들고 쓰러지게 만드는 마음의 덫이다. 이런 덧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즉, 자기를 비우고 지금 여기에 온전히 빠져들 때, 미로는 미궁이 될 수 있다.

생명의 나무 위에서 얼마나 나아갔느냐와 상관없이 어머니 된 생명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듯, 삶의 미로 역시 하나님 품 안이다. 하나님 사랑에 기대, 함께 갇힌 사람을 안아줄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해도, 생명나무의 품에 안겨 있는 자체가 이미 사랑이다. 하나님과 동행해도 아프고 괴로울 수 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로 속에서 주님과 함께 걷고 있는 자체가 이미 사랑이다. 십자가 위에서도, 지옥에 내려가셔서도 주님은 사랑을 숨 쉬셨다. 십자가 위든, 지옥에서든 주님 함께 사랑의 숨을 불어넣어 주신다. 벗어날 수 없는 미로, 출구 없는 미궁에서도 사랑은 주님으로 인해 숨 쉴 수 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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