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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 한국교회는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민주화운동 역사산책 시즌3 참관기
최순희(희망찬교회, 광화문 천막카페 붙박이봉사 책임 | 승인 2019.06.07 18:55

참가하게 된 계기

▲ 글쓴이 최순희(희망찬교회, 광화문 천막카페 붙박이봉사 책임자)

지난달 27일, 30년간 고난받는 이들 곁을 지키며 우리 사회 변혁을 위해 힘쓰는 ‘고난함께’(사무총장 진광수 목사)가 기획하고 ‘교회2.0목회자운동’과 공동 주최한 ‘민주화운동 역사산책 시즌3’에 참가했다. 작년 봄 역사산책 시즌1이 시작되었을 때에 목회자들을 위한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 교육 프로그램인 줄 알았다. 일터에 바쁜 일정도 있었으나 평신도를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오해로 인해 적극적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후 시즌1 역사산책에 동행한 지인을 통해 목회자들이 많이 참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직분에 관계없이 모두 참가할 수 있는 역사교육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심지어 신앙에 관계없이 참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열려있다는 것을 알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역사산책의 안내 역할을 맡은 홍승표 박사 ⓒ고난함께

작년 가을 역사산책 시즌2에 기꺼이 참가신청을 했다. 일터가 종로라서 낯익은 거리를 거닐며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와 독립과 민주화 과정에 매우 유서 깊은 거리였음을 실감했다. 3.1운동 백주년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어서 더욱 귀담아 들었다. 정신여학교 옛 건물을 둘러보며 홍 박사님의 설명에 등장하는 김마리아의 대한 이여기는 가슴 뭉클한 경험이었다. 그 시대 여성들은 지금보다 깨어있었다. 시대를 깨우는 의식의 확산이 기독교 신앙인 안에서 퍼져나갔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은 십대에서 삼십대 중반에 해당하는 젊은 세대였다.

참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을 둔 한국교회는 현재 비록 길을 잃은 듯하다. 하지만 이런 역사산책 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길을 찾는 계기로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역사산책 시즌2의 걸음을 마쳤다. 좋은 프로그램에 나 혼자 참가하는 것이 너무 아까워 평소 친하게 지내는 교회 자매들에게 권했다. 그들에게 뜻깊은 산책을 경험시키고 싶은 마음에 참가비를 대납하였다. 두 사람은 그 답례로 우리 일행의 식사와 커피를 책임지는 사랑을 보여주었다.

비오는 날, 4.19기념도서관

드디어 27일, 기대하며 기다렸던 역사산책 길에 봄비가 내려 촉촉이 적셨다. 한껏 부픈 내 마음을 가라앉게 했다. 커피향 가득한 조용한 카페에서 봄비를 맞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만 역사의 흔적을 찾아 걸어 다녀야 하는 날에 봄비라니? 이런 날씨에 역사산책이 가능한가? 담임목사님을 통해 “비가 오는 데 역사산책을 강행하는가?”를 물었다. 진광수 목사님을 통해 전해들은 답은 이것이다. “우중산책이 더 근사한 거라네~”

▲ 4.19기념도서관에 전시물들을 둘러보고 있다. ⓒ고난함께

우리는 우산을 받쳐 들고서 서대문역 3번 출구에 모였다. 홍승표 박사의 인솔에 따라 4.19기념도서관에 들렀다. 서울시가 미래유산으로 지정한 이 건물은 자유당 정권 국정농단의 주범 이기붕의 옛 집터 위에 세워졌다. 1층 넓은 홀에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거했던 학생들의 사진이 가득했다. 경찰의 발포로 어린 학생들이 쓰러졌다. 이 광경을 목격한 장준하는 “어린 학생들이 쓰러져 가는데 도대체 어른들은 어디 있는 것인가?”라고 외쳤다. 당시 민주주의는 장로직분을 가진 독재자(이승만)와 권사직분을 가진 독재자의 하수인(이기붕)에 의해 일그러졌다.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은 피의 희생으로 독재자의 손에 있던 일그러진 민주주의를 되찾아왔다. 하지만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어렵게 찾아온 민주주의는 더 철저히 짓밟히고 말았다.

역사는 반복된다. 1945년 일제의 폭거에서 해방을 맞았을 때에도 친일파에 기반을 둔 독재자 이승만의 등장으로 독립군 출신의 애국자들은 탄압을 받았고 친일의 뿌리는 더 깊어졌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얻은 대통령 직선제는 양김의 분열로 신군부 쿠데타 세력 2인자인 노태우에게 면류관을 헌납했다. 민중은 언제나 늦지 않았다. 역사의 한 복판에서 독재권력에 항거하며 빼앗긴 민주주의를 되찾아 주었다. 하지만 민의를 받들 정치세력은 무능과 탐욕으로 하늘의 내어준 기회를 날리곤 했다. 부디 2016년 10월 29일에 시작하여 총 23회 지속된 촛불혁명을 잊지 말자. 3.1절 촛불집회를 포함 총 스물세 번의 주말집회에 연인원 1,700만명이 참석했다. 그 함성의 결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부디 실패하지 않기를 간곡히 빌어본다.

경교장(김구 선생 서거 터)

4.19기념도서관을 빠져나온 우리는 강북삼성병원 내 우뚝 서 있는 경교장으로 향하였다. 2층 창문 한쪽에 안두희가 쏜 총알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민족 지도자 김구 선생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이 건물은 1938년 완공되었다. 처음에는 죽첨장이라고 불렸으나 김구 선생이 경교장이라 개칭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 선생은 이곳을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반탁과 통일운동, 자주 국가로써 활동을 이끌다가 1949년 6월 26일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 백범 김구 선생님이 저격당한 경교장 ⓒ고난함께

동양극장 건너편에 위치해 있던 이 건물과 땅을 삼성 이병철이 매입하여 전체를 허물고 새 건물을 지우려고 했다. 다행히 시민운동가와 역사학자들의 반대로 경교장 전면부가 보존되었다. 하마터면 중요한 역사유물이 흔적 없이 사라질 뻔 했다. 안네 프랭크는 “종이는 인간보다 질기다.”는 말을 남겼다. 역사의 기록과 유물이 잊힌 지난 시대의 기억을 소환하고 재생한다. 김구 선생의 마지막 집무실이었던 경교장이 지켜진 것은 천만다행이다. 그간 지인들의 병문안을 위해 강북삼성병원에 몇 차례 왔지만 병원 한 복판에 김구 선생이 집무실로 사용하던 건물이 있다는 것은 이번에 알았다. 그간 생각 없이 서울을 돌아다녔던 것 같다.

역사산책 일행은 경교장이 있는 강북삼성병원을 빠져나와 좁은 찻길 하나를 건너 돈의문 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돈의문 박물관

돈의문은 서울 성곽 사대문 가운데 서쪽 큰 문이다. 지금 서대문에 해당하는 문이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서대문이라 불리는 돈의문은 없었다. 일제에 의해 헐려 지금은 그 터만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 가운데 한 가지는 서울 성곽 사대문의 현재 명칭은 일제강점기에 개명된 것이다.

흥인지문을 동대문으로, 돈의문을 서대문으로, 숭례문을 남대문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은 유교를 철학으로 세워진 나라다. 유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다. 이는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다섯 가지 덕목으로 학문을 하는 사람이나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이 갖출 덕목이다. 어질고 정의롭고 예의 바르며 지식을 갖추어 믿을 만한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조선이 추구했던 인간다움이다. 이런 정신을 한양 도성에 진입하는 사대문 현판에 새겼다. 동대문의 본래 명칭인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에 해당하는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에 해당하는 숭례문(崇禮門), 북문에 해당 하는 홍지문(弘智門)이다. 그리고 사대문 한 복판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문을 열고 닫는 때를 타종으로 알렸다.

일제는 임진왜란 시 왜구가 개선문으로 사용했던 남대문과 동대문을 보물1호와 2호로 지정하고 서대문 등은 헐어 버렸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으나 친일의 잔재가 여전하여 본래의 이름을 찾아주지 못했고 번호를 그대로 유지한 체 국보와 보물로 구분하였다. 총독부 위치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문화재 순으로 번호를 부여한 일제의 잔재를 없애자는 주장이 제기 되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이란 명칭이 이미 익숙하지만 가급적 본래 명칭을 부르려고 노력했으면 좋겠다.

▲ 비내리는 돈의문 박물관 앞 ⓒ고난함께

‘믿을만한 사람’(보신각)이 되기 위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흥인지문), 불의에 맞서는 정의로운 사람(돈의문), 매너와 품위를 갖춘 사람(숭례문), 지성과 분별력을 갖춘 사람(홍지문)이 되기를 힘쓰자. 사대문 현판의 의미를 알고 나니 서울이 참 유서 깊다. 우리 조상들은 건축물 하나하나에 후대에 길이 남길 교훈을 새겼다. 이름 하나하나에 깊은 뜻을 담았다.

일제에 의해 헐린 돈의문은 한국선교사적 의미가 깊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인천 제물포 항에 입항하여 서쪽 관문을 통해 서울에 입성하여 정동에 선교 스테이지를 구축했다. 처음 돈의문 위치는 높은 곳에 있어서 통행이 쉬운 낮은 곳에 새 문을 만들었다. 새 문의 안쪽을 새문안이라 불렀고 언더우드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장로교회가 새문안교회다.

우리 일행은 여전히 비내리는 정동길을 걸으며 한성화교교회와 구 프랑스 공사관 부지를 거쳐 구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

구 러시아 공사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은 세자와 함께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했다. 그 유명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줄인 말이다. 한 나라의 왕이 자기 대신과 군대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이 참담했다. 여기서 1년간 머물다가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경복궁을 거부하고 덕수궁을 선택했다고 한다.

고종과 세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기 전에 경복궁 북쪽 건청궁에 유폐되어 있었다. 고종은 명성황후처럼 일제에 의해 죽임 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심지어 독살의 위협을 느껴 수락관에서 올라온 음식을 거부하여 거의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이때 고종이 믿었던 유일한 사람들은 서구의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이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헐버트 등. 선교사들은 순번을 정하여 왕의 침소를 지켰다. 왕이 수락관 음식을 거부하자 음식을 만들어 배달했다. 언더우드는 고종과 세자가 먹을 음식을 운반하기 위해 철가방을 만들었다. 열쇠는 두 개를 만들어 고종과 언더우드가 소지했다. 언더우드가 음식을 담아 보낼 땐 자물쇠를 채우고 종이로 붙여 도장을 찍어 보냈다. 고종은 외부 손길의 흔적이 없음을 확인한 후 철가방을 열어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고종 등 왕가들이 피신했던 러시아 공사관 ⓒ고난함께

선교사들은 왕과 세자를 건청궁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춘생문을 통해 탈출시키려고 했다 하여 ‘춘생문 사건’이라 부른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교회와 학교와 병원만 지었던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고 민중의 어려움을 살필 뿐 아니라 위기에 처한 고종의 곁을 지켜주기까지 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앞에서 한국교회는 정치적 중립을 외치며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눈물을 외면했다. 일부 목사들은 막말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 환대의 대상을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런 일은 예멘 난민들이 우리 섬에 찾아왔을 때에도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기억하라.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은 그 시대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2014년 8월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기독교인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모른다면 참된 신앙이라 할 수 없다. 유태인 포로수용소 아우슈비츠 생존자이며 작가인 엘리 위젤은 <나이트>라는 책을 써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16년에 작고한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 우주의 중심이다”라는 말이다. 성서는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가르친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리고 다른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전해 듣고 기독교 신앙을 시작한 한국교회는 그들이 보여준 신앙의 본을 곱씹어 보아야 한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공사관과 덕수궁의 확장으로 인해 장로교 선교본부는 정동을 떠나 연동으로 이주하여 선교 스테이지를 재구성하였다. 우리 일행은 옛 장로교 선교부지를 거쳐 이화학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화학당

1886년 미국 출신 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톤(윌리엄 스크랜톤의 어머니)에 의해 설립된 이화학당(梨花學堂)은 여성을 위한 근대 교육기관이다. 명성황후가 학교 명칭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다. 유교적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는 현저히 낮았다. 선교사들의 공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여성 교육기관을 설립함으로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올려놓았고 독립과 민주화 운동에서 활동가로써 여성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정신여학교에 김마리아가 있었다면 이화여학교에는 유관순이 있었다.

어느 시대든지 기존의 질서를 재편하는 변화의 물결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선교사들이 신분제를 거부하고 성평등을 지향하며 활동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소위 페이크 뉴스(Fake News)를 만들어냈다. 지금 들으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큰 파급효과가 있었다.

▲ 개화기 여성들의 교육을 담담했던 이화학당은 민족교육의 산실이기도 했다. ⓒ고난함께

당시 선교사들은 사진기를 들고 다녔다. 가짜뉴스는 이렇게 전해졌다. 선교사들이 은밀하게 조선의 아이들을 죽여 눈알을 빼내어 사진기를 만들었다. 이런 황당한 소문이 문명에 뒤쳐진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카메라 렌즈가 깜박이는 모습이 마치 사람의 눈동자 같다는 이유로 황당무계한 가짜뉴스가 나돌았다. 또 다른 가짜뉴스는 더욱 그럴 듯했다. 선교사들이 덜 익힌 스테이크를 먹을 때 붉은 피를 흘리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조선의 아이들을 잡아 인육을 포식 중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성난 군중들이 이화학당 앞에까지 몰려와 문지기를 때려죽이는 비극적인 일까지 발생했다. 예나 지금이나 가짜뉴스는 선량한 사람들을 폭도로 변질시킨다. 세월호 참사 이후 ‘기레기’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여 언론의 사명을 묻고 있다. 개인 유튜브 방송을 통해 유포되는 가짜뉴스의 사례도 적지 않다. 이화학당에 몰려든 폭도들을 통해 이 시대 언론의 사명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여전히 우산을 받쳐든 역사산책 일행은 증명전과 정동제일교회, 배제학당 역사박물관, 구세군 대한 본영 등을 둘러본 후 조선일보 사옥 앞을 지나 성공회 서울 대 성당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정동제일교회

1887년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정동의 낮은 위치에 한옥을 매입하여 개조했다. 이것이 정동제일교회의 시작이다. 주변에 이화학당과 배제학당이 있어 개화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교인수의 급증에 따라 500명 수용 가능한 평면구조의 평범한 건물을 지었다. 위에서 보면 십자가 형태의 건물은 언뜻 보면 공장과도 같은 지극히 서민적인 건축물이었지만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의미 있는 역사적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 한국의 첫 개신교회당 정동제일교회 ⓒ고난함께

정동제일교회당 보다 조금 앞서 명동성당이 건축되었다. 건물 양식과 규모, 그리고 위치에서 대조를 이룬다. 유럽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가 성당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옛 건물들은 그 시대 최고의 건축물이었다. 반면에 개신교회의 건축물들은 평이하고 초라하다. 19세기 내한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크고 화려한 건물을 짓기보다 사람을 길어내는 일에 주력했다. 대형교회가 난립하고 건물 짓는 일에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 비용을 지불하는 21세기 한국교회는 선배들의 지난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

한국교회는 크고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예수의 참된 제자를 남겨야 한다. 

성공회 서울 대성당

1890년 제물포 항을 통해 입항한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 C. G. 코프는 현재의 장소에 있던 낡은 한옥을 구입해 십자가를 세웠다. 이것이 성공회 서울 대성당의 시작이다. 3.1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만세운동의 중심지였다. 1987년 6월 항쟁 시에 민주인사들이 여기에 모여 서명했고 이 성당에서 타종한 후 전두환 독재권력에 맞서 강력한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성당 마당 한 켠에 ‘대한성공회 6월 민주항쟁 10주년 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가 세운 표지석이 자리 잡고 있다. 검정 대리석 바탕에 선명하게 새겨진 아홉 글자. “유월 민주항쟁 진원지.”

▲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산역사 서울성공회대성당 ⓒ고난함께

19세기 한국 개신교 역사는 그 시대의 역사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언제나 역사의 한 복판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학당들을 세워 미래세대에게 시대의 사명을 일깨워 주었다. 해방 후 군부독재시기에 가장 강력한 민주주의 수호자였다. 이런 선배들이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스런 일이다.

작년 가을 두 번째 역사산책 길에서 홍승표 박사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여러분은 역사의 터 무늬를 보고 있는 것이다!” 홍 박사의 말이 생각나서 ‘터무니’와 ‘터 무늬’가 어떻게 다른지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검색해 보았다. ‘터무니’는 어원이 불분명하다. ‘터무늬’와 같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이런 근거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터’는 우리가 사는 땅이다. ‘무늬’는 이땅에 새긴 족적 즉 역사다. 지난 역사에 무관심한 한국교회는 터무늬 없는 신앙을 양산해내고 있다. 선배들의 지난 역사 속에 깃들여 있는 한국교회 정신을 놓치면 현세의 복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는 기복주의로 흐르게 된다. 현재의 교회가 그렇다. 이제 역사다. 지난 역사를 알고 우리 선배들이 어떤 몸부림으로 신앙을 지켜왔는지 살펴야 한다. 그리고 역사의 소명 앞에 용기 있게 반응하는 한국교회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금년 가을에 있을 역사산책 시즌4가 기대된다.

▲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역사기행 참석자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고난함께

최순희(희망찬교회, 광화문 천막카페 붙박이봉사 책임  gonanwit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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