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조와(弔蛙), 개구리의 죽음 - 김교신 (1)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9)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6.09 18:05

고려대학의 서양사학 교수였던 고 김성식 교수는 40년 전 당시의 정치인들을 향해 이런 글을 썼습니다.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라는 유행가가 있다. 이것을 본따서 다음과 같은 가사도 지을 만하다. ‘생각이 같아야 친구지 얼굴만 안다고 친구냐?’ ‘연구를 해야 교수지 감투만 썼다고 교수냐?’ ‘사시가 있어야 신문이지 보도만 한다고 신문이냐?’ ‘정신이 있어야 법이지 조문만 있다고 법이냐?’ ‘대화가 있어야 국회지 날치기 처리가 국회냐?’ ‘존경을 받아야 대통령이지 당선만 되었다고 대통령이냐?’ 한이 없다. 이런 식의 말을 만들자면 말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가장 근본적이라고 생각되는 한 마디만 더 말해 보겠다. ‘자세가 발라야 정치가지 권력만 잡았다고 정치가냐?’
그렇다. 미인은 마음씨가 고와야 되고 친구는 생각이 서로 같아야 되는 것 같이 정치가는 우선 자세가 바르게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자세라는 말은 비단 정치가에 있어서만 아니라 학생, 교수, 경제인, 종교인 할 것이 없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심지어 역사에서 소외되어 있는 농부도 그 하는 일에 자세가 발라야 되는 법이다.
오로지 여기서 정치가의 자세가 문제로 되어 있는 이유는 정치가의 자세가 바르고 그릇됨에 따라서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자세가 바르다는 것은 정치적 식견이나 역량에만 관계되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정치가의 마음씨를 말하는 것이다. 마음씨만 바르다면 자세가 그릇될 수 없고 자세가 바르다면 나쁜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 설사 인간이기에 그릇된 정치도 있을 수 있을 것이나 그때는 국민의 동정어린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에만 치중한 나머지 어떠한 수단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권력만 잡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정치가로서의 귀중한 자세를 망쳐 버리면 자신도 망하고 나라와 민족도 타락하게 마련이다.
- 김성식, “갇혀있던 양심 묶여있던 진실”, 제3기획 1987. 251쪽

좋은 글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글은 박정희 독재를 향한 비판의 글이고 대체로 이런 글은 정권을 잡은 여당을 향한 비판이어야 하는데, 요즘은 이상하게 야당의 작태를 말해주고 있다. 개인이 습관을 바꾸기 힘들듯이 수십 년 살아온 정치적 습관에서 벗어나기 또한 쉽지 않은 것 같다. 지난 518광주민중민주항쟁 39주년 기념식에서 저는 문재인 대통령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심성이 고운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정치인으로서의 장점이라고는 반드시 말하기는 힘들지만, 바라기는 남은 3년의 임기를 통해 민족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대통령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사 인물 하늘뜻펴기

‘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고려와 조선의 천년 역사를 총칼로 중단시키고 5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뭉개고 온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려가는 일제강점기의 불행한 시대 속에서 앞서간 신앙인들은 민족적으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였는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는 본래 로마제국의 식민백성 갈릴리 민중의 한사람으로 태어나 서른 살 남짓의 피 끓는 젊음의 정열로 로마제국의 힘의 논리에 대항하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람인데, 그 예수가 이천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백년 전 조선 땅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메시야 구원신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식민지배에 동의한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졌는데 이러한 정치 이데올로기 신앙을 어떻게 극복하여갔는지를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 김교신 선생 ⓒGetty Image

지금 남한의 기독교는 개독교로 조롱을 당한지 어언 이십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 이러한 비판은 현실로 계속하여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계 50대 대형교회 중 남한교회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교단 총회법을 어기면서 아들에게 세습을 시도하고 있고, 15년 넘게 담임목사로서 3천억짜리 교회 건물을 지은 목사가 어느 날 갑자기 법원에 의해 목사가 아니라고 해서 목사는 재교육을 받고 교회는 다시 청빙을 하는 코메디같은 일이 일어났으며, 일주일 전에는 담임목사측과 원로목사측이 대립하여 폭력사태가 발생하자 경찰이 출동하는 일이 일어나고, 코메디안인지 목사인지 분가하기 힘든 대전의 한 유명 목사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면 이천만 북한 사람 죽이고 또 자식 낳으면 된다는 얘기를 설교 단상에서 하여 논란을 키우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이야기입니다만, 한국인 신학도가 독일 유학을 가서 ‘중세 교회사를 공부하려 한다.’고 하자, 교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하는 말이 ‘중세 교회사를 공부하려면 지금 남한의 대형교회들을 연구하면 되지 꼭 이곳에 와서 독일어로 공부할 필요는 없다.’ 이 말 한마디 속에 오늘 남한 교회 타락 현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기독교 정신으로 세계의 평화를 지킨다고 자부하는 미국인들이 실은 전 세계에 가장 많은 무기를 수출하고 끊임없이 전쟁을 하고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약소국가들을 윽박지르고 위협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듯이, 대형교회 목사들 또한 자신들이 저지르는 반복음적인 작태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신앙의 이름으로 된 이념의 덫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황교안대표 마찬가지입니다. 불교계에서 그랬지요. 이웃종교에 대한 정치인으로서의 예를 다하지 않으려면 가서 기독교 전도사나 하시라고. 우상숭배와 이웃종교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의 예를 지키는 것은 전연 다른 일이지만, 본인이 배운 신학의 차원이 그런 정도이다 보니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 종교와의 갈등을 조장하는 행동은 반복음적인 행동입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의 기본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金敎臣(김교신, 1901-1945)과 孫基禎(손기정, 1912∼2002)

1936년 올림픽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베를린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을 모르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만, 그를 길러내신 분이 김교신 선생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금메달을 딸 당시 손기정님은 양정고보 학생이었고 김교신 선생은 그의 담임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직접 자전거를 타며 손기정 선수를 훈련시켰고, 동경 예선까지 쫓아가서 그를 코치했었습니다.

동경 예선 마지막 코스에서 손기정 선수가 기력을 잃었을 때에 “기정아, 기정아 힘을 내라. 조선을 생각하라”고 외쳐 힘을 북돋웠다는 말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올림픽의 꽃은 행사 마지막에 진행되는 마라톤입니다. 당시 유럽 지배를 꿈꾸고 있던 히틀러는 독일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드러내고자 마라톤에서만은 반드시 1등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1등은 게르만인은커녕 백인도 아닌 동양인 손기정선수가 차지했고 그것도 세계 기록을 5분이나 단축했을뿐더러 거기에 3위까지 또 한 명의 조선인 남승룡 선수가 차지하였으니 이는 게르만족은 물론이고 서양인의 콧대를 꽉 꺾었던 엄청난 쾌거였던 것입니다.

당시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의 가슴팍에는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래 그들은 월계관을 쓰는 순간에도 환하게 웃지 못하고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수그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승 후 손기정님이 친구에게 보낸 국제엽서에는 그냥 ‘슬푸다!!?’라는 세 글자만 썼던 것입니다. 손기정님은 다른 외국선수들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하면 항상 코리아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동아일보의 한 체육부 기자 이길용님에 의한 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났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손기정님은 금메달을 목에 건 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승의 성공은 작전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다.” 그 정신이란 바로 김교신 선생으로부터 배운 민족정신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김교신 선생은 지리 선생으로 학과의 절반은 학문에 절반은 민족정신교육에 힘을 썼습니다. 신 이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으로 키우고자 하였습니다. 당시는 담임을 맡으면 중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계속하여 담임을 하였기에 그 영향력은 상당하였습니다. 그래 손기정님은 스승을 추모하며 “나는 지금까지 선생님만큼 크시고 참다우신 교육자 그리고 애국을 여러 면에서 스스로 실천하신 분은 본 일이 없다. 참으로 선생님은 크신 분이었다.”(<김교신> 김정환 저, 21쪽) 물론, 손기정님 외에도 뛰어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김교신 선생은 20세기가 문을 여는 1901년 4월 18일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농업학교와 동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인생에 대해 고민하던 중 20세가 되던 해인 1920년 4월 동경의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생활을 반년정도 하던 중, 교회 분규가 일어 목사 축출소동이 일어나자 교회출석을 단념하고, 그때부터 일본의 무교회 기독교인인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가 7년 동안 성서강의에 참여합니다. 이때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다니던 중 우찌무라 문하의 조선 유학생 6인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만들어 동인지 <성서조선>을 발간하게 됩니다. 이때 6인 가운데 한분이 함석헌선생이었습니다.

여기서 무교회란 말은 교회를 무시한다든가 혹은 교회를 없애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신도들의 모임이 곧 교회라는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정신을 참 교회로 보는 그래서 교회나 혹은 교단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김교신과 성서조선(聖書朝鮮)

<성서조선(聖書朝鮮)>은 40쪽 전후의 월간지로 1927년 7월부터 시작하여 약 3년간은 동인지로 발간되었지만, 1930년 5월호부터는 사정에 의해 김교신이 주필로서 책임 편집하는 개인잡지가 되었습니다. 이후 12년간 이 잡지는 일제의 혹독한 검열을 견디며 계속 발간되다가, 1942년 3월 158호의 권두언인 弔蛙(조와-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가 문제가 되어 폐간이 되었습니다. 이때 일경은 전국 수백 명의 독자와 동지들을 검거하였고, 그중 김교신과 함석헌·유달영·송두영 등 13명이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서조선사건>이며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한글학회사건>과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났는데, 언론탄압입니다.

여기서 성서조선의 창간호와 폐간호의 머리말 일부분을 현대어 번역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서조선 창간사, 1927年 7月

과연 학문적 야심에는 국경이 보이지 않았다. 사랑으로는 온 세상이 가슴 속에 있었다. 이상을 실현해 보자는 나의 앞길은 양양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들리는 한 소리는 무엇인가? ‘아무리 그래 봐야 너는 조선인이다!’
아! 어찌 이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갖는 말이 또 있으랴? 이 뜻을 깨우치니 모든 것이 헛되었다. 또한 이 헛됨을 이해하니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다. 드디어 눈빛은 빛났고 그 초점은 하나로 명확해졌다. 우리는 감히 조선을 사랑한다고 큰소리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선과 나와의 관계에 대하여 겨우 ‘그 어떤 무엇’을 알게 되었다.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며 조선을 위하여 무엇을 꾀할까? 오직 슬픔과 분노로 세상을 개탄하는 것만이 최선일까?! 요즈음 우리 동포들 사이에 평소의 사상과 취향이 다르더라도 서로 자기를 굽히고 같은 목표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니 우리가 함께 기뻐할 바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 효성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우리 같은 불효자들이야 두말해서 무엇 하랴? 상황이 기적을 행하는가 보다. 다만 아무리 같은 사랑이라도 그 표현의 방법이 서로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동안의 경험과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오늘의 조선에 줄 가장 귀한 선물은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신.구약 성서’ 한 권이라고.
그리하여 같이 모여 걱정하고 같은 소망을 가진 어리석은 친구 대여섯 명이 동경 시외에 있는 스기나미 마을(杉竝村)에서 처음으로 모임을 가졌고 ‘조선성서연구회’를 시작하였다. 매주 때마다 모여서 조선을 염려하고 성서를 공부하면서 지내 온지 반 년 남짓 지났을 때, 누군가가 그 동안 스스로 연구했던 것의 일부라도 세상에 공개할 것을 제의하니 그 이름을 ‘성서조선’이라 하게 되었다. 그 이름이 좋은지 나쁜지, 그 시기가 적절했는지는 우리가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우리 마음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두 글자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낼 제일 좋은 선물은 ‘성서’ 한 권뿐이니 둘 중의 하나를 버릴 수 없어서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 소원하기는 이를 통해서 뜨거운 사랑의 순정을 전하려는 것이며, 정성을 다한 선물을 그녀에게 드리려는 것이다.
‘성서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 사람(外人)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예배당를 중요시하는 사람의 집에서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교 신자보다는 조선의 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골로 가라, 거기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을 너의 사명으로 삼으라.
‘성서조선’아,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 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서로 담론하라. 한 세기 후에 동지가 생긴들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기성 신도를 위한 교회 잡지가 아닌, 조선혼을 가진 조선사람을 위해, 산골의 한 나무꾼을 위해 발행한다는 숭고한 정신 속에서 창간된 것이 <성서조선>이었고, 이는 후에 함석헌선생에 의한 <씨알의 소리>, 김재준목사에 의한 <제3일> 그리고 안병무선생에 의한 <야성>과 <현존>이라는 잡지에 그 정신이 이어지게 됩니다.

평소 김교신 선생은 새벽 4시면 일어나 북한산 뒷산에 올라 냉수마찰을 하고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조와(弔蛙) - 1942년 3월 폐간호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다. 층층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연못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가 연못 속에서 솟아나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하늘이 마련해 준 성전이다.
이 반석 위에서 때로는 가늘게 때로는 크게 기도하고 간구하고 찬송하다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연못 속에서 바위의 색깔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 속에 큰일이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새로 온 손님에게 접근하는 친구 개구리들. 때로는 5,6 마리, 때로는 7, 8마리.
늦가을도 지나서 연못 위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하더니 개구리들의 움직임이 날로 날로 느려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연못의 투명함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고막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소식이 막힌 지 무릇 수개월 남짓!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얼음 덩어리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개구리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연못 속을 구부려 찾아보았더니 오호라, 개구리 시체 두세 마리가 연못 꼬리에 둥둥 떠다니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연못의 적은 물이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얼어 죽은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연못 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가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이 문구 한마디가 일경의 신경을 건드린 것입니다. 갈멜산의 영웅 엘리야 선지자는 이세벨 왕후가 자객을 보냈다는 얘기를 듣자 야훼의 산 호렙산으로 도망을 가서 죽기를 자청하며 이런 넋두리를 합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

이때 야훼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 음성은 바위를 쪼개는 큰 바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였고, 지축을 뒤흔드는 지진과도 함께 하지 않았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한 소리로 함께 했습니다. 귀 기울지 아니하면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여린 소리로 들려졌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 맞추지도 않았던 칠천 명을 남겨 두리라.” 한 명도 없다는 엘리야의 호소에 대해 7천명이나 있다고 하는 이 선언은 독재자가 총칼을 아무리 휘두른다 해도 여전히 하느님의 역사는 도도히 흘러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곧 민중이 주인이 되는 해방과 구원의 역사는 기어코 이루어지고 말 것이라고 하는 하늘의 선언이었습니다.

15년간 지속되던 <성서조선>이 폐간되던 1942년 4월은 일본군국주의 침략 전쟁이 가장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습니다. 이보다 6개월 전인 1941년 12월 7일 일본 가미가제 편대는 미국 하와이의 주력 해군을 선제 공격합니다. 물론 아직도 수백 대의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을 수 시간에 걸쳐서 날아온 그 전시 상황을 어떻게 몰랐는지 왜 그날 일요일 아침 레이다 기지의 책임자는 미상의 비행기 수백 대가 날아온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미궁에 빠져 있지만, 하여간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조선반도의 힘께나 쓰는 남자는 모조리 징병과 징용으로 얼굴께나 빠진 여자는 공장으로 정신대로 몰아가던 암흑의 시대였으니 성서조선의 독자들을 족치는 일쯤이야 그게 무슨 대수였겠습니까? 독립의 씨앗이란 씨앗은 모조리 찾아내어 이를 뿌리에서부터 박멸하던 탄압의 절정기였던 것입니다. 일경은 호시탐탐 그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라는 희망의 단초를 자르고자 김교신 함석헌선생을 비롯한 <성서조선>에 관련했던 주요 인사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교신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년간의 옥살이를 하고 나서도 전국 각지는 물론 멀리 만주에까지 다니며 신앙동지들을 규합하고 전도생활을 하면서 그날 곧 일본 패방의 날이 다가왔음을 시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징용으로 끌려간 5천명의 노무자들이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복지와 교육을 위해 그곳에서 노무자로 함께 일하다가 1년이 못되어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해방을 넉 달 앞두고 말입니다.

평신도 김교신

그는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신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교사요 평신도였습니다. 그러나 성서조선을 통한 김교신 선생의 신앙은 당시의 신앙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가진 기독교적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평전을 쓴 김정환님은 <민족적, 민중적, 토착적> 세 단어로 정의합니다.

첫째는 민족적 기독교의 이념과 실천방안의 모색입니다. 외국의 선교사들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우선 과제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서구신학과 목회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과제입니다.

둘째는 민족 교육의 실천입니다. 국적이 분명하지 못하고 민중의 가슴에 체화되지 못하는 기독교는 우리의 기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얼이 빠진 인간을 어디에 쓸 것입니까? 민족이 있고 세계가 있는 법입니다.

셋째는 높은 차원의 애국의 길을 기독교의 높은 이상에서 찾아내고, 그것을 몸소 행하여 보이고 증명하는 일이었습니다. 성서를 통하여 민족의 혼을 일깨워 앞날의 진정한 독립의 정신적 기틀을 만들고 세계 평화와 인류복지에 기여하는 기독교 정신을 찾아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위의 책 32쪽)

김교신 선생이 살았던 일제강점기와 오늘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일제의 대동아평화를 대신하여 오늘날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과 시장이 우리의 시대 얼과 민족정신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지금 남한이 다른 나라의 직접 지배를 받는 식민지국가는 아닙니다만, 그러나 외세에 의해 국토가 잘린 지 74년이 지나가지만, 미국의 허락없이는 금강산을 갈 수도 없고 굶어 죽어가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먹을 것 하나 보낼 수 없는 외세에 눌려 지내고 있는 형편입니다. 군사적으로는 전시작전통수권이 우리 대통령이 아닌 우리말을 모르는 알아듣지 미군사령관에게 있다는 점에서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과언은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이 나라는 둘로 나뉘어 반목하며 고통으로 신음하는가? 대한민국 이 조선은 과연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수천 년 역사에 수천만 명의 단군의 후예들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세계사의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만 하는 것인가? 여기에 기독교와 성서가 답변하지 못한다면 그건 거짓 종교요 한갓 불쏘시개로 던져질 종이 나부랭이일 따름이다. 김교신 선생의 삶은 이에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분에게서 배운 신앙의 한 깨달음은 개인사이든 민족사이든, 고통은 하느님이 아니 계시다는 증표가 아니라 오히려 계시다는 역설입니다. 지리교사였던 김교신 선생은 조선반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는 한 사람이 지구를 어깨에 떠받들고 힘을 모아 일어서려는 모습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석공은 돌을 깨서 조각을 만들고, 목수는 나무를 깎아 작품을 만들고 옹기장이는 진흙을 짓이겨 그릇을 만듭니다. 고통과 고난은 창조적인 미래를 향한 하나의 과정일 따름입니다. 이를 깨닫고 우리가 고난과 고통을 껴안을 때, 우리에게는 오늘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이 오는 것입니다.

그냥 참고 견디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민초들의 고통의 소리를 듣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고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에까지 가야 합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십자가 위에서 외쳐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절규를 들을 때에 우리는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 속에서 나사로가 걸어 나오는 역사의 반전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25-3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것이 제가 믿는 바이며 김교신 선생이 우리에게 실천적인 삶으로 말씀해주신 가르침입니다.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choshalom@gmai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