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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바라지선교센터의 시작은 쫓겨나는 사람들 곁이었다이종건 사무국장이 말하는 옥선의 어제와 오늘
이정훈 | 승인 2019.06.12 17:04

‘옥바라지선교센터’(이종건 사무국장), 줄여서 옥선. 이 이름이 이제 낯설지 않다. 아니 기독교사회운동 단체들 중 보기 드물게 젊은이들로 가득차 있어 희망이라는 단어와도 겹쳐질 정도이다.

그리고 재개발 현장, 쫓겨나는 사람들 옆에는 늘 이들 옥선이 자리하고 있다. 이 모습도 낯설지가 않다. 으레 저들이 있겠거니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현장. 그곳에는 늘 공권력이 미칠 수 없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폭력이 난무함에도 공권력은 마치 눈을 가리고 보지 않으려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늘 이곳에 있는 옥선. 도대체 이들은 누구일까, 왜 이곳에 있으려고 할까. 옥선의 이종건 사무국장을 만나 보았다.

은폐된 빈곤을 보여주려한다

▲ 이제는 대표적인, 그것도 청년들로 구성된 기독교사회운동단체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옥바라지선교센터’가 어떤 목표와 어떤 활동을 하는지 소개 부탁드린다.

우리 시대 빈곤은 놀라울 만큼 은폐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높은 빌딩과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가득 차 있어 빈곤한 이들, 집 없이 사는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도시는 저마다의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잘 보이지 않는 골목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 옥바라지선교센터 이종건 사무국장. 재개발로 철거당할 위기에 있던 구본장여관 301호에서부터 옥선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옥바라지선교센터 제공

사람들이 가득 찬 것 같은 아파트 단지는 투기 목적으로 여러 채씩 두고 있는 사람들과, 그로 인해 상승하는 집값으로 인해 한 집 건너 한 집이 빈집이다. 그 빈집들을 짓기 위해 오래된 동네에서 소박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을 쫓아낸다. 재개발/재건축 지역의 주민들은 대부분이 세입자다.

사실 우리 중 대부분은 세입자다. 그러나 재개발 찬성 여부를 논할 때 세입자들은 자신들의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투표하거나 남을 설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다. 오래된 동네의 미래를, 다양한 군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평범하게 가난한 이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은 정작 그 동네에 살고 있지 않은 토지주, 건물주들이다.

그나마 재개발일 경우 이사비 정도를 보전할 수 있건만 요즘 들어 사실상 ‘재개발이면서 재건축’ 지역으로 ‘꼼수’ 개발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재건축의 경우 세입자가 이주비용도 받지 못하고 임대아파트에 들어갈 수도 없기에 개발이 용이한 것이다. 작년 겨울 수 차례의 철거를 겪고 한강에 투신한 마포 아현 철거민 박준경 열사 또한 재건축 개발의 피해자였다.

옥선은 도시의 은폐된 빈곤을 가시화 하고 쫓겨남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잘 나눠 쓰라고 청지기 삼아주신 것이 우리의 신앙이라면, 결국 땅은 법에서 말하는 ‘소유자’가 아닌 그 땅에서 밥을 해먹고, 생산을 하고, 이웃과 더불어 지속 가능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사용자들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신앙고백과 목적의식을 실현하기 위해 예배를 통한 강제철거 현장대응과 도시문제에 대한 교육사업, 점거 농성장을 외롭게 하지 않기 위한 문화예술 사업 등 다양한 방식의 연대활동을 펼치고 있다.

옥선이 시작된 곳, 구본장 여관

▲ 옥선을 시작하게 된 어떤 사건이나 계기가 있었는가?

2016년 5월, 감리교신학대학교 도시빈민선교회 소속으로 재개발 철거 위기에 놓인 옥바라지 골목 ‘구본장 여관’에 방문했다. 당시 옥바라지 골목의 주민들은 동네의 역사성과 주민의 생존권을 주장하며 시민사회 활동가들과 함께 재개발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구본장 여관의 방 하나를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생들이 돌아가며 지키기로 했고, 당시 도시빈민선교회 회장이었던 나는 아예 짐을 싸서 여관 301호 방에 들어간다.

소식을 듣고 한신, 장신, 서신 등 이웃 신학교 학생들과 기독청년들이 연대방문을 와주었고 감신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현장의 불합리한 상황에 분노하며 예배를 드리는 모임을 가지기로 한다. 5월 17일에 구본장 여관에 강제집행이 들어왔다. 백명이 넘는 용역 깡패들이 좁은 골목에 들이 닥치는데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소화기를 뿌리고 벽돌로 창문을 깨고 ‘빠루’로 위협하는 용역들 앞에 우리는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옥바라지 골목 주민이자 구본장 여관 사장인 이길자님은 실신해서 거리에 누워있고 우리는 급하게 천막과 십자가를 가져와 농성장을 차렸다. 그 농성장에서 ‘옥바라지선교센터’의 이름으로 첫 예배를 드리게 된다.

우리는 쫓겨남에 대한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

▲ 제가 알고 있기로는 정말 보기드물게 젊은 기독교 활동가들이 모여서 활동하고 있다. 좀 우스운 단어이지만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청년을 자꾸 ‘청년’이라는 주제 안으로만 가두려고 하니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라는 단어는 정말 많은 의미를 포괄하는 단어이다. 만성적인 주거불안과 고용불안, 지속가능하지 않은 도시에서의 삶으로 인해 2년에 한 번씩 쫓겨나는 청년의 현실을 생각할 때, 옥바라지선교센터가 관심가지고 있는 도시의 권리, 주거권 등은 청년 스스로의 삶과 매우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옥바라지 골목, 아현포차, 궁중족발 모두 다른 케이스로 보일 수 있겠지만 도시민으로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쫓겨났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다. 궁중족발의 문제가 청년 당사자의 문제고, 옥바라지 골목 주민들의 문제가 청년 당사자의 문제이며, 아현포차의 문제가 청년 당사자의 문제로 여겨지니 젊은 활동가들이 하나, 둘 모이는 것이다. 쫓겨남의 문제 안에서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

그 불안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 그간 옥선의 활동을 보면서 참 많은 좌절도 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개발지역을 침탈당하고 주민 분들이 다치고 자살까지 하는 상황을 겪다보면 힘이 많이 들 것 같다. 어떻게 이겨내는가?

현장의 고통은 당사자, 연대인, 지지자 모두가 나눠지는 공동체의 영역이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당사자가 될 수 없고, 그 고통을 나눠진다고 하지만 고통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다. 상가세입자의 경우 기존의 생계수단인 가게가 완전히 마비된다.

투쟁과 예배가 공존되도록

재개발 철거민은 생존과 직결된 주거의 문제가 당장 거리로 내몰린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잃어버리는 것들의 크기는 아마 계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즐거운 농성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예배는 투쟁의 다른 이름이면서 동시의 위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당사자와 연대인들의 마음과 현장상황에 맞게 그때, 그때 예배문을 수정하여 현장과 예배의 괴리가 커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문화예술 사업 또한 자칫 척박해질 수 있는 농성장의 분위기를 바꾸고 지속 가능한 운동이 될 수 있도록 기여하고 있다.

철거 현장에서 고통을 이겨낼 수는 없다. 심지어 승리로 마무리를 하더라도 투쟁의 경험은 트라우마가 되어 모두에게 잔상으로 남기 마련이다. 투쟁의 매 순간이 고통으로 기억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기도와 관심이 필요하다.

▲ 옥바라지선교센터 사무실 전경 ⓒ옥바라지선교센터 제공

▲ 기존의 기독교사회운동과 옥선의 차이점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기존 기독교사회운동과 옥바라지선교센터의 운동을 구태여 구분하고 싶지 않다. 만약 구분이 된다면 오히려 밖에서 정의해주시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사무국을 꾸리고 있는 입장에서는 옥선이 기존 기독교사회운동이 ‘잘해왔던’ 분야를 이 세대에서 다시 살려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기독교를 재점유 한다

정치적 손익 계산 없이 고통 받는 현장에 십자가 하나 달랑 들고 가서 예배를 드리는 현장대응 능력, 비슷한 신앙을 공유하고 있는 교회와 신학교 등 네트워크를 엮어 홀로 하기 어려운 일을 함께 대응하는 것 모두 기존 기독교사회운동이 해왔던 일들이다. 다만 우리는 흐려지고 있는 색깔을 더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에서 차이점이 있을 수 있다면 있겠다.

잘하는 걸 더 잘하자는 주의다 보니, 예배는 더 예배답게, 기독교 언어는 더 기독교 언어답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독교언어가 보수교회에 의해 점유되었기에 그 언어를 피해가야 한다는 생각들이 꽤 많이 공유되어 있는 것 같다. 옥선은 재점유를 통해 언어를 되찾아 싸우고자 한다.

우리는 예배를 잘 하는 사람들이고, 그 언어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다. 기독교 언어의 서 있는 위치가 문제라면 그 위치를 거리의 현장으로 끌어내려 골목의 삶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쓰면 되지 않을까.

▲ 앞의 질문과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 지금 50대 기독교사회운동가들은 성서와 사회과학 중 아무래도 사회과학에 방점을 많이 찍고 활동을 해왔다. 특히 마르크스주의나 주체사상의 세례를 받은 분들이 많다. 옥선의 활동가들은 어떤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옥선의 활동가들은 각자 다른 신학교 출신의 신학생, 비신학생, 비종교인들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 모든 다양한 배경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빈곤’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빈곤의 사회현실에서부터 출발했다

이건 기존의 기독교사회운동 선배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빈곤의 문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다양한 사회문제들의 근본 원인으로 종종 지목되는 ‘계급’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지점에서 기독교사회운동의 선배들이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계급사상이 우리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다. 다만 다원화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단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시대에서 운동을 하고 있기에 ‘빈곤’의 문제를 다른 의제와 연결시키는 것이 더 유연하고 자연스럽다는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옥선에서는 동물권 교육을 진행한 적이 있다. 성평등교육, 젠더 강의들도 진행한다.

빈곤의 문제가 도시 모든 존재에 영향을 끼친다는 명백한 사실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든 종류의 존재의 문제가 곧 우리 문제와 마찬가지라는 다양성 또한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인식하고 활동하고 있다. 

▲ 도심 재개발이 옥선의 주요 화두로 보인다. 마냥 개발을 반대할 수도 없지 않을까 싶다.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개발과정에 있어 실제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이 얼마나 반영될 수 있는 구조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주민의 대부분이 세입자인데 동네의 미래를 주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지독한 모순이다. 개발이후 재정착 비율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개발, 지역민들의 필요에 따라 개발이 이루어져야

재개발 지역의 대부분이 그 지역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다. 아파트 입주권이 주어져도 투기꾼들에 의해 천정부지로 솟는 아파트 가격을 감당할 수 없어 실제로 그 지역에 재정착하는 이들의 비율은 매우 낮은 실정이다. 재개발/재건축의 명분은 도시민의 안전과 주거율을 늘리고자 함이다. 그 본분에 충실할 수 있다면 개발에 관련한 많은 문제들이 해소될 수 있다. 다주택자들에 대한 규제가 필요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살지 않고 공가로 남겨두는 집들, 한 명이 수십채의 집이나 상권을 소유하며 불로소득으로 무한정 이득을 취하는 구조는 결국 동네를 죽이고, 애써 만든 상권을 무너뜨린다. 지역공동체와 지역상권 모두 공공의 이익에 직결된다는 점에서 공공재라 할 만 한데, 이런 유무형의 도시자산들을 우리와 같은 평범한 도시민들이 누릴 권리라고 생각하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도시의 문화는 도시재생이니, 박물관마을이니 하는 단기적인 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최근 개발로 인해 논란이 되고 있는 을지로의 경우 누가 손쓰지 않아도 그 지역을 꾸려온 수십년의 세월이 돈 주고도 만들지 못할 ‘문화’를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 그곳을 가장 잘 알고, 그곳에 가장 관심이 있으며 결국 그곳에 다른 이들을 끌어들일 매력을 만들어낸다. 한 지역의 생태계가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삶을 구축하면 ‘개발’ 또한 지역민들의 필요에 따라 적절히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 사실 현 교회들의 많은 숫자가 도심 재개발로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 자칫 교회의 반발을 살 수 있는 부분으로도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서 교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달라.

지역교회라는 말이 무색해졌다. 재개발 지역의 경우 오래된 대다수의 성도가 철거민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데 이에 관하여 교회는 관심이 없다. 종교부지로 배려 받아 재건축을 하는 교회의 경우, 오히려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으로 가난한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아파트 중산층이 동네를 채우니 이러한 개발을 환영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역교회, 불평등에 맞서는 동지가 되기를

어떤 지역의 경우 아예 지역 유지들로 이루어진 조합이 회의를 교회에서 한다고 한다. 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지역주민들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주민들의 생태계속 깊숙이 위치한 교회라면 과연 세입자 대부분을 쫓아내는 재개발을 쌍수들고 환영할 수 있을까? 지역교회 자체의 의미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상가세입자로 종교부지 배정을 못 받는 가난한 교회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저 쫓아내면 쫓겨나야지 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간’의 권리를 주장해야한다. 교회가 이 땅의 희망이라는 말이 단지 구호가 아니라 실재라고 고백한다면, 교회의 공간이 지역민들에게 열려 있는 공공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면 다른 쫓겨나는 이들과 더불어 더 당당히 주장해야 한다.

전국에 교회 없는 동네가 없다. 지역의 삶에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가게, 한순간 사라지는 동네들이 보일 것이다. 교회 하나, 목회자 한 명이 지역 의제에 관심을 가지고 부당함을 고발하는, 불평등에 맞서는 동지가 되길 바란다. 

▲ 이제 마지막으로 앞으로 옥선의 비전과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주면 좋겠다.

옥바라지선교센터는 앞으로도 ‘쫓겨남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꾸며 굽힘없이 걷고자 한다. 빈곤의 문제 앞에 평등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늘 기독인들의 몫이었다. 여전히 죽어가는 도시민들이 있다. 반지하방과 단칸방, 고시원과 옥탑방, 그마저 재계약이 다가오면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이 있다. 소박한 꿈을 꾸며 마련한 가게, 겨우 먹고 살 만해지면 본인이 장사하겠다며, 건물 팔아 이익 남기겠다며 월세를 네 배 올리고 못내겠으면 나가라는 건물주들이 있다.

법 너머에 사람이 있음을 잊지 않기를

소화기를 뿌려대며 평온한 동네에 쳐들어와 사람이 있는 집을 부수고 사지를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용역이 ‘회사’로 버젓이 서울 한 복판에서 양복입고 다니는 것을 용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모든 것이 합법이라며 자신은 당당하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합법 너머에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정의는 법 너머에 있다는 구호가 옥바라지선교센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구호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법 너머의 세상, 상식 너머의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그리스도인들이다. 평등하게 나눠 쓰라고 주신 땅을 각자의 소명대로 사용하며 그곳에서 나온 소산물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날을 꿈꿔 본다.

그 길에 함께 걷는 믿음의 동지들이 필요하다. 언제든지 옥바라지선교센터와 함께 걷고, 함께 비를 맞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다.

앞으로도 쫓겨나는 사람들 편에 있을 것이다

현학적이지도 이론적이지도 않다. 너무 분명하고 투명하기까지 하다, 옥선의 화두가 그러하다. 빈곤과 쫓겨나지 않는 사람들.

마치 1970-80년대 서울의 현대화를 위해 쫓겨나 위성도시들이 만들어질 때 철거민 투쟁을 하던 기독교운동과도 겹쳐 보이는 데자뷰 현상마저 느끼게 된다. 여전히 쫓겨나고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데자뷰는 절망감마저 들게 만드는 지점이다. 여전히 폭력적이고 사람을 바라보지 않은 것 또한 닮아 있다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잘못일까.

하지만 철거민들의 편에 선 기독교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 재개발로 쫓겨나는 이들 편에는 옥선이 있다. 고맙다는 생각마저 든다. 여전히 기독교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아준 것 같아서 말이다.

▲ 지난 3월24일 성문밖교회에서 제2회 옥바라지선교센터 총회가 열렸다. ⓒ옥바라지선교센터 제공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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