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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의 대화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사랑받는 자녀들이 신앙으로 충만한 성인들이 된다 (1)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 승인 2019.06.13 17:07
이 장의 제목은 Alfred North Whitehead의 말을 변형시킨 표현이다(The Aims of Education and Other Essays, London: Williams and Norgate, 1932, 43). Whitehead는 교육에 대해 단언한다: “교육의 일은 한 소년의 지식을 한 성인의 힘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양육의 목적은 사랑하는 자녀를 진지한 신앙을 수용할 수 있는 성인들로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 저자 주

지금까지 복음전파를 위한 두 후보자들을 확인했으며, 각 후보자를 위해 복음화의 과정을 위한 정의적(定義的) 모임을 확인했다. 외부인들을 위해서는 여호수아 24장에서 외부인들이 내부인들이 되게 하는 모임을 발견했다. 신앙의 공동체 내에 있는 성인들을 위해, 느헤미야 8장에서 공동체에게 결정적인 위험과 취약성의 열정적인 비젼 속에서 신자들이 “다시 천막에서 야영하게 하는”(re-tented) 모임을 발견했다.

앞선 세대와 지금 세대는 만나야 한다

이제 복음전파를 위한 세 번째 후보자에게, 다시 말해서 “동의하는 성인들”이 되기 위해 성장할 수 있거나 성장하지 못할 신자들의 자녀들에게 이르렀다.(1) 여기에서 복음전파의 문제는 다른 경우들에서 보다 더욱 복합적이며 더욱 어렵다. 본문 자체로부터, 그리고 신자들로서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자신의 경험 모두로부터, 양육과 편입(incorporation)이 자녀에게 아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자녀들에게 적절하게 될 단 하나의 결정적인 모임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2) 양육과 편입은 이전의 모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성인을 향한 도상에 있는 자녀들이(the children-route-to-adult) 공동체를 규정하는 “소식”을, 자기 자신의 보조에 맞게 약간씩, 확인하고 요구하는 것을 시작하게 하는 지속적인 대화(ongoing conversation)를 필요로 한다.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자유와 독립의 변증법, 개체화의 요구, 그리고 공동체에 끼워 넣어야 할 불가피성이 제공된다면, 측량할 수 없다. 앞에서 인용된 모임들과는 다르게, 이 대화는 결코 완료되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해서 진행한다. 실제로 나는, 대화 자체가 바로 복음전파의 현실이기 때문에, 그 대화가 고정되고 완료된 결론에 결코 도달하지 않는다는 관점을 공유한다.

이 대화를 조사등록(taxing) 하는 일은 공동체의 일차적인 사업이다. 신앙에 있어서 무리한 성장의 방법이 서두르거나 선취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대화는 어떤 점에서 성인의 증언과 옹호, 즉 우리 자신의 믿는 심정과 마음에 관해 분명하고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려는 준비이다.

평소에 대화는 성인 공동체로 하여금 현재적이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헌신과 신자됨(membership)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혹은 이어지지 않을지 모르는) 것을 면밀히 조사하기 위해 정황과 용기와 정력을 제공하는 방법들을 용인하고 받아들임으로 시작된다. 모든 부모들이 증언하게 될 것으로서, 옹호와 수용성(receptivity)의 효과적인 유형을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들 중 몇몇에게 옹호는 전부가 되며, 젊은이들에 의해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인 것으로서 경험된다. (이것은 소위 전투적인 복음주의자들의 특징적인 유혹이다.) 우리들 중 몇몇에게, 수용성은 전부가 되며, 젊은이들에 의해 지나치게 수동적인 포기, 비겁하게도, 확실한 의견을 말하지 않는 포기로서 경험된다. (이것은 “치료학”에 그리고 “능동적인 경청”에 과도하게 전념하는 공동체들의 특징적인 유혹이다.)

물론 올바른 방법은 없다; 권위주의자의 모형이나 포기하는 모형에서 어느 방법으로든, 우리는 약간의 후회와 함께 대화를 마치게 될 것이다. 물론 놀라운 일은 때때로 우리의 옹호가 우리 자녀들에 의해 감사와 함께 되살아나게 되며, 때때로 우리의 수용성은 치유로서 인정된다. 신앙은 때로는, 부분적으로는 우리들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우리들도 모르게, 일어난다.

변화된 상황과 젊은 세대와의 대화 필요성

21세기를 사는 자녀들과 젊은 사람들의 상황이 특별히 문제의 것임이 쉽게 단언될 수 있다. 가까운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성장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고, 더욱 많은 노력이 요구되며, 더욱 위험한 것이다. 젊은이의 상황은 독특하고 복잡하다.

▲ 교회 내 세대 간의 대화와 신앙 전승의 단절을 극복하는 것이 복음선포의 핵심 과제가 되었다. ⓒGetty Image

왜냐하면 (a) 기술의 발전과 정보통신 혁명에 의해 초래된, 아주 많은 자유를 가진 아주 많은 선택권이 있기 때문이고; (b) 유럽과 미국의 패권의 종식에 의해 야기된, 믿을 수 있는 가치와 사회구조의 많은 실패가 있기 때문이며; (c) 포스트모던 생활의 요구들과 선택권이 바로 이용할 수 있으며 회피할 수 없는 것처럼, 젊은 사람들의 강화된 자의식과 자기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문화의 이런 복합적인 혁명의 결과 중 하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연하다고 생각되어 왔던 신앙과 문화 사이의 다정한 연합의 소멸이다. 다시 말해, 지배적이며 확고부동한 개신교의 (대부분 칼빈주의적) 가치를 지닌 미국 문화 속에서, 제 구실을 하는 가족, 즉 존립할 수 있는 공동체 전체 이외의 사람들, 그리고 세계 속에서 “미국적인” 탁월함과 우선성의 당연한 의식과 더불어 신앙을 간직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고 분명한 것이었다. 과도한 의심 없이 그리고 예견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한 신앙과 문화의 연속에 대한 적절한 확신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좋은 위치에 있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것은 쉽고, 자연적이며 의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신앙의 어떤 외형을 계승하여 사유화하는 것은 문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한 다정한 연합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혼란을 야기하는 판에 박힌 소리이다. 문화적 경험 속에 있는 그렇게 갈라진 틈의 이유는 복합적이며, 아마도 우리에게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게 갈라진 틈 속에 있는 요소들은 미국 안에서의 공적인 대화를 역행할 수 없이 변경시켰던 베트남 전쟁과 시민권 운동을 포함한다. 제3세계의 세력과 문화의 (그리고 이슬람의) 번영은 당연히 세계 속에서 추정된 탁월함에 관한 신경쇠약을 낳게 되었다. 그 “중심”이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했으므로, 신앙과 문화에 대한 우리의 인습적인 지지는 세계 속에서의 우리의 위치에 관한 깊은 걱정 때문에 무너졌다.

이것은 차례로 미국의 위치에 대한 방어를 위한 잔인함과, 적어도 우리의 몫에 대한 추구로서 탐욕을 낳았다. 다정한 연합 대신에, 우리는 공습과 방어라는 대립적인 상황 속에 우리 자신들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는 체 하기를 거절하는 개인주의 속으로의 계산된 철수(numbered withdrawal)에 의해 대처하려는 경향이 있다.(3) 아는 체 하는 것에 대한 계산된 거절은 물론 그것의 많은 종교적 차원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엄청난 왜곡에 의해서만 기독교인으로서 간주될 수 있는 종교적 차원이다.

무엇이 변화되었는가

나는 당시에, 성인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신앙이 젊은이를 위해 이미 소용이 되는 것일까,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어떤 조건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젊은이들이 대개 두 가지 선택권에 직면하게 된다는 느낌을 갖는다.

한편으로 기존 세대의 자신들처럼 젊은이들은 인간성의 모든 소리를 내는 마음 편하며 매혹적인 모더니즘 속으로 빠져들게 되지만, 실제로 결코 그것의 약속을 지키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정당한 종류의 입에 발린 말로만 동의하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입에 발린 말과 함께 차라리 마음이 편하고 제멋대로 하는 개인주의를 받아들이는 청년 문화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매혹적인 세속주의를 거부하기 위해 극심한 고의성(intentionality)이 후원을 지속하는 공동체 내에서 요구된다. 이런 고의성과 후원의 형태는 특징적으로, 강한 확신을 지닌 개인적인 가치와 “가족” 가치에 대해 본질적으로 변화되며, 그런 공동체에 영향을 주는 거대한 문화를 무시함으로서 어울리게 되는, 고도로 도덕적인 공동체이다. 나는 특별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진지한 신앙을 본질적으로 혼란시켜서 배경이 없는 상태가 되게 하는 투쟁적으로 세속적인 문화로 둘러싸인 대학이라는 배경 속에 있는, 학생 집단에 대해 생각한다.

젊은이들과의 대화를 숙고함으로서, 세속화된 이기적인 무관심과 율법적인 개인주의가 유일한 선택인지를 생각할지도 모른다. 좀더 공적인 신앙, 즉 문화에 대한 더욱 광범위한 비판적 관점을 취하는 신앙이 가능한지를, 그리고 좀더 광범위한 공적인 관점과 함께 시민으로서 제자 신분을 위한 낙천적 성질이 하나의 가능성인지를 생각할지 모른다.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말해서,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심지어 오늘날에도 신앙이 젊은이들을 위해 가능한지를 생각한다.

나는 젊은이들이 세속적인 무관심한 일에 종사하는 자들이거나 율법적인 개인주의에 대한 신봉자들인 한에 있어서, 그들이 복음적 대화를 위한 후보자들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러한 대화가 어떤 것을 수반해야 하는지 확신하지 않지만, 세 가지 문제들은 분명한 듯이 보인다:

대화는 무조건적 옹호의 정황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런 옹호는 특정한 “입장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의 가치, 유용성, 미래, 그리고 존재 자체를 위한 것이다. 젊은이들은 완전히 문자적으로 그들에게 “열광하는”(crazy) 성인들을 필요로 한다.(4)

이 점은 아주 분명함으로 기존 세대는 그것을 잊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유로운 은총을 중재하는 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무조건적 옹호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 상품의 가치를 가지는 시장 경제 속에서, 그리고 상품의 부족이 걱정스럽게 가치의 장점, 능력, 그리고 생산성을 향해 우리를 몰아가는 것에서 점차적으로 어렵게 된다.

옹호로서 그리고 수용성으로서 대화 자체는 은총의 수단이다. 하지만 성인들은, 자신을 위해 생산 지향의 삶의 양식을 아주 좋아하는, 심지어 우리 자녀들조차 수단이 되는 가치를 익히게 되는, 그러한 대화를 점점 더 적게 하기 쉽다.

젊은 세대가 필요로 하는 것들

젊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열광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그런 단정적인 필수조건(sine qua non)과 더불어, 아마도 더 나중의 “단계”에서, 젊은 사람은 현실에 대해 조리 있는 구성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이 없음으로, 모든 부분들이 전체로서 납득이 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신앙에는 명확한 표현을 필요로 하는 인식적이며 지적인 차원이 있다.

젊은이와의 대화는 끊임 없이 해석적이어야만 한다. 해석의 행위는 지나치게 교훈적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성인 공동체가 찬성하는 좀더 폭넓은 정황에 작은 조각들을 연결하는 것을 도우려는 단순히 진행하는 준비성(readiness)이 있을 필요가 있다.

이런 해석적 능력은 성인 교회 내에서, 부분적으로 많은 성인들 자신이 조리 있는 신앙이라는 그 어떤 생생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현재 약화되고 무시된다는 것이 내 느낌이다. 한 가지 비상사태로부터 다음 비상사태로 움직임에 따라, 가르침의 본질적인 본체로서 신앙에 대한 명확한 표현은 현재 아주 특별히(ad hoc) 교회 안에 존재한다.

특별히 그러한 접근방법의 결과는 부스러기들, 즉 신앙의 친숙한 형식들이 의도하지 않은 채로 세속적 개인주의와 자유시장 신념이나 혹은 놀라게 하는 율법주의의 요구에 의한 어떤 다른 이념에 따라 편집됨으로서, 그 부분들은 그것들이 위치한 정황에 의해 왜곡된다.

기존 세대가 준비해야 할 것들

신앙을 통한 현실에 대한 조리 있는 구성(construal)은 물론 무조건적 옹호를 하는 개인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그렇지만, 개인에 대한 필요 불가결한 초점은 좀더 광범위한 우주적 요구에 의해 조화되어야만 한다.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다름 아닌 바로 “하늘과 땅의 창조주”, 즉 “가난하게 하고 부유하게 하는 분”이다.

무조건적 옹호와 좀더 광범위한 현실 구성의 행동은 우리의 젊은이들과의 복음적 대화가 의도적으로 심오하게 “대안적 양육”(counter-nurture)이 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대화의 목적은 젊은이들이 “선한 미국인”이나 “도덕적 미국인”이거나 “생산적인 미국인”, 즉 바람직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할지 모르는 그 어느 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젊은이들이 복음적 공동체에 의해 유지되는 신앙에 대한 독특한 기억과 비젼에 따라 세상을 이해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며 규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주 명쾌하게 나는 이 대화가 “이것은 다른 것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확언하는 세사미 스트리트의 동요(ditty)를 반향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제안한다. 기독교 신앙으로의 회심은 세상 속에서의 기이성으로의 회심(conversion)이다. 즉 세속적인 방종에 반대하는 기이한 율법적 공동체주의(communalism)와 시장의 개인주의에 반대하는 기이한 것으로의 회심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녀들을 대면하는 우리의 상황이 거의 전례가 없던 것이라는데 동의한다. 문화적 선택, 위험, 그리고 자원들의 집합점은 이제까지 존재해 왔던 그 어느 것과 같지 않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는 무조건적 옹호, 조리 있는 구성, 그리고 대안적 양육의 요소들이 우리들의 공동체 속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것들은 젊은이들이 언제나 위험에 직면해 있는 이런 공동체 속에서 대화에 관해 되풀이하여 발생하는 주 요소들이다.

이런 공동체 속에 있는 젊은이들이 위험에 직면하는 이유는 이 신앙이 수치스럽고(scandalous) 급진적이기 때문이며, 단순히 전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사유화되어야만 하며, 이것은 각 세대 속에서 신선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우리들의 장소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행했던 방법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또한 우리가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전례가 없는 우리들의 상황 속에서조차도, 우리의 조상들이 대화를 어떻게 이끌었는지를 물어야할 것을 제안한다. 여기에서 나는 이 공동체가 우리의 젊은이들로 판명되는 그 공동체의 젊은이들과의 지속적인 대화에 포함되었음을 보여주는 일련의 본문들을 검토할 것이다.

미주

(미주 1) 신자들의 자녀들은 실제로 Horace Bushnell의 프로그램을 위한 후보자들, 즉 결코 자신들을 신앙의 인간들 이외의 인간으로 알지 못할 정도로 신앙으로 양육된 자녀들이 될지 모른다.
(미주 2) 그러한 정황 속에서, 회심이라는 “단 한번의”(once and for all) 사건이나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 견신례라는 친절한 의식은 마치 이것이 성인 신앙 속에서 “단 한번”인 것처럼 계획적으로 그리고 예전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분명히 이것은 성인으로 성장하는 현실을 거의 반향하지 않는다.
(미주 3) 그런 계산된 철수는 특별히 Robert Jay Lifton의 연구에서 중요했다. 실제로 그는 그와 같은 계수가 “상징의 격차” 때문에, 즉 경험의 깊이나 위험을 위해 적절한 상징들의 부족한 상황 때문에 발생한다고 제안했다. 적절한 상징이 없다면, 쓸모 있는 경험이란 경험될 수 없으며 실제로 거부된다.
(미주 4) Urie Bronfenbrenner, “Who Needs Parent Education?” Teachers College Record 79 (1978), 773-74, 그리고 Nel Noddings, Caring: A Feminine Approach to Ethics and Moral Education (Berkel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 59-78을 보라. Bronfenbrenner은 그러한 돌봄은 마지막에 “능력”을 낳으며 “반응 능력”을 위한 수용력을 낳는다고 제안한다.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sungildab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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