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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제네바에서의 개혁과 죽음칼빈의 삶과 신학 (5)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19.06.15 19:28

제네바에 복귀한 칼빈은 이전보다 더욱 강화된 권위로 개혁조치들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칼빈은 그가 가진 모든 생각을, 이를 테면, 성만찬을 매 주일마다 거행􏰀는 일 등을, 강요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일 년에 네 차례 성만찬을 거행하는 베른의 관습을 채택하였습니다.

제네바 교회의 형성

수많은 도전들과 적대자들의 저항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결국 1555년에 이르러 칼빈은 제네바에서 확고한 권위를 확보한 가운데 개혁 작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칼빈은 제네바로 복귀할 때 그가 내건 복귀 조건들 가운데 하나는 제네바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작성할 권리를 위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복귀한 지 6주만에 『교회법령집』을 작성하여 시당국에 제출했고 시정부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그것을 법률로 제정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칼빈의 개혁은 이제 정부의 합법적인 허락을 받아 공신력 있게 진행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칼빈은 제네바 교회에 4중직제를 설치했습니다. 목사, 교수, 장로, 집사. 목사는 설교와 성례전을, 교사는 성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장로는 교회 행정 및 치리를, 그리고 집사는 교회 재정 및 봉사의 임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이러한 교회 직제는 오늘날 대부분의 개혁교회들의 직제의 뼈대가 되었습니다.(1)

칼빈의 제네바의 경제개혁

칼빈은 두 가지 큰 목표를 가지고 제네바를 위해 일했습니다. 하나는 일종의 교회법정인 “제네바 컨시스토리”(Genevan Consistory)를 설치􏰀하여 제네바 시민들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생활을 감독􏰀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제네바 교회를 살리는 일과 관계됩니다.

▲ 칼빈이 생전에 목회했던 생피에르 성당교회 ⓒGetty Image

다른 하나는 제네바의 경제를 살리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제네바에는 위그노라 불리는 프랑스에서 망명한 개신도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기술자들과 자본가들이었으며, 칼빈은 이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칼빈은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주는 교리를 처음으로 확립했습니다. 이 교리는 신학사적으로 볼 때 혁명적인 것이었으며, 경제생활에 큰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대 출금에 이자를 붙이는 것이 교회법상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묘􏰀게 시행하여 일반화되었고, 16세기에 들어서면서 급속하게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이 문제에 대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칼빈은 먼저 일반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현실을 발견했습니다. 칼빈에 따르면 이런 이유로 성서는 고리대금과 그것의 모든 폐해를 비난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서는 우리의 이웃을 도와준다는 관점에서 무이자 대부의 가치를 훨씬 더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가난한 자를 구제􏰀기 위해 대부를 할 때 이자를 받는 것을 잘못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 성서의 이자금지법을 모든 대부에 적용􏰀는 것 은 무리라고 보았습니다. 칼빈은 성서가 이자나 고리대금을 말할 때 그것은 생산자금 대출이라고 하는 당시의 비교적 새롭고 널리 퍼져 있던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단지 소비성 자금대출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이 죄악에 오염되어 있다는 현실을 끊임없이 인식􏰀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합법성의 이름하에 대금업을 악용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그는 법적으로 허용된 대부라도 가난한 사람에게 이자를 받는 것은 부정한 짓으로 규정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채무자가 빌려간 돈을 통해 그 이자에 상당하는 돈을 벌지 못한 경우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적정 이자율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제네바 의회는 6.7%로 확정했습니다. 칼빈에 의하면 적정 이자율을 정􏰀는 결정적 기준은 대출자가 하나님 앞에서 채무자에 대해 가지는 책임감이었습니다.

요컨대 칼빈은 바울이 이 세상의 재화를 만나와 비교했던 것을 언제나 잊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넘치도록 가진 자는 자신이 만족할 만큼 먹고 난 다음에는 가지지 못한 자에게 나 머지를 주어야 합니다. “...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 라.”(행 4:35).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사랑으로 그가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당연히 남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는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수단입니다. (2)

묘석도 세우지 않은 칼빈의 마지막

1549년에는 칼빈의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아들은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습니다. 1559년에 칼빈은 제네바에 헬라어, 히브리어 그리고 철학 등 세 개의 강좌가 있는 대학을 세웠습니다.

그 대학은 종교개혁에 가담하고 이어서 각자 자신들의 나라에서 개혁자들이 된 수많은 신학자들의 교육의 장소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존 녹스(John Knox)는 많은 나라들에서 왔던 수많은 학생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칼빈은 프랑스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 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재목을 가져다주시오. 그러면 화살을 만들어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같은 해에, 『기독교강요』 마지막 판이 출간되었습니다. 그것은 4권의 책으로 구성된 두꺼운 교재이며 개신교 신학의 가장 위대한 교의학 저서들의 일부입니다.

아마 그의 일생 내내 지속되었던 엄청난 일 때문에, 칼빈은 수없이 많은 질병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점차 쇠약해져 갔습니다. 1564년 2월 2일에, 그는 대학에서 마지막 강연을 하였고 2월 6일에는 그의 마지막 설교를 하였습니다. 1564년 5월 27일, 칼빈은 제네바에서 죽었습니다.

5월 28일에, 그는 성대한 의식 없이 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바라던 바대로 그의 무덤은 어떠한 묘석으로도 꾸며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어느 누구도 칼빈이 어디에 묻혔는지를 정확􏰀게 알지 못합니다.(3)

미주

(미주 1) 이재천 편집, 『칼빈의 신앙유산과 오늘의 개혁교회』(서울: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 사, 2009), 102-105.
(미주 2) 앙드레 비엘레/박성원 옮김, 『칼빈의 사회적 휴머니즘』(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을 참고.
(미주 3) 이재천 편집, 『칼빈의 신앙유산과 오늘의 개혁교회』, 106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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