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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가 뿌리다, 의도를 뿌리다.”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6.17 17:42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서,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다. 10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괜찮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13 그런 다음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가 손을 내미니, 다른 손과 같이 성하게 되었다. 14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서,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마태복음 12:9~14/새번역)

하나의 행동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는 행동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합니다. 같은 행동을 다른 안경을 쓰고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죽여야 한다는 분노입니다. 규칙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려는 집착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과 살인의 무늬(pattern)입니다. 다른 하나는 안식일이라 해도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사랑입니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규칙을 넘어서는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짊어진 십자가의 무늬(pattern)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의 시선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죄악으로 보는 시선입니다. 그 관점에는 사람을 위해 주신 안식일(막2:27)이 보이지 않습니다. 약자를 지키고 보호하려는 사랑의 안식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행동은 하나님 주신 계명을 잘 수호하려는 의로운 행위로만 보입니다. 궁극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타인을 희생시켜도 어쩔 수 없다고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 A “Touchy/Feely” moment ⓒcoffeeoath.com

그러나 한 꺼풀 더 벗겨 보면, 자신을 지키려는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에 집착입니다. 계명을 수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잘 지키는 거룩한 자신을 수호하려는 것입니다. 계명을 잘 지켜서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시도록 합니다. 자신 안에 도사린 욕망과 집착, 그 의도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형식이어도 자신을 지키려는 의도에 붙들리면, 말 그대로 아집입니다. 자신을 지키려고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자아숭배입니다.

힌두교 수도승과 유대교 랍비가 한 여인숙에 도착합니다. 빈 방은 하나뿐이어서 한 사람은 헛간에서 자야했습니다. 힌두교 수도승이 자신은 수도자이니 헛간도 괜찮다며 방을 양보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방으로 돌아와 말했습니다. “헛간인 것은 괜찮은데, 그 안에 소가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에서 소는 신성한 동물이어서 소를 방해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헛간에서 잘 수가 없네요.” 유대교 랍비는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니 괜찮다며, 헛간에서 자겠다고 갔습니다. 얼마 후 랍비가 돌아와 말했습니다. “다 괜찮은데, 헛간에 부정한 짐승인 돼지가 있어서 함께 잘 수가 없네요.”(류시화 저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248의 우화를 각색)

거룩해지려고 사랑의 자유를 포기합니다. 거룩함으로 자신을 지키려다 사랑을 잃기 쉽습니다. 의로울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의로움과 사랑도 종종 갈림길이 됩니다. 바리새파 사람에게 주님이 죄인으로 보였듯이, 의로움의 틀에 갇히면 사랑은 너무 쉽게 죄악이 되고 맙니다. 열정을 다해 지키려는 그것이 아무리 거룩하고 의로워도 분별해야합니다. 얼마나, 어떻게 거룩하고 의로운지가 아니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그 신념, 경건, 신앙의 틀이 사랑을 북돋우는지, 아닌지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나를 지키려는 것인지, 하나님의 사랑을 살려는 것인지 진실해야 합니다. 나 살자고 너 죽이는 아집인지, 너 살리자고 나를 죽이는 사랑인지, 주님 십자가 앞에 끊임없이 비춰봐야 합니다.

질문도 가만히 들어보면 그 이면에 담긴 진심이 엿보일 때가 있습니다. 정말 몰라서 알고 싶어 하는 질문도 있지만, 오히려 더 잘 안다고 자랑하려는 물음도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의 질문과 주님의 질문 역시 그 의도가 전혀 다릅니다. 사람을 살리는 칼이 있는가 하면, 죽이는 칼이 있듯이, 하나는 죽이려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살리려는 질문입니다. 대답에 귀를 기울이기 전에 질문 속에 담긴 속내를 먼저 잘 들어야 합니다. 거기에 대답보다 더 중요한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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