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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읽어주는 나”블라디미르 쿠쉬의 「Matrix of Love」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6.21 19:05

호수에 비친 자신에게 반해 결국 물에 빠져 죽었다는 나르키소스, 그가 죽자 호수는 눈물을 흘렸다. 숲의 요정 오레이아스들이 왜 울고 있냐고 묻자, 호수가 대답한다.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어요.” “하긴 그렇겠네요. 우리는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에 반해 숲에서 그를 쫓아다녔지만, 사실 그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숲의 요정의 말에 호수가 물었다.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요정들은 나르키소스의 얼굴을 가장 가까이에서 날마다 보았으니 잘 알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한동안 가만히 있던 호수가 입을 연다.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다니 아, 이젠 그럴 수가 없잖아요.”(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13~15)

오스카 와일드가 새로이 풀어낸 나르키소스의 신화다. 나르키소스가 호수를 보지 못하고 자신만 보았듯, 호수도 나르키소스를 보지 못하고 자신만 봤다. 사람이든, 상황이든, 풍경이든 그것을 바라보는 감정, 편견, 욕망의 필터를 피하기 어렵다. 현상학이 바라듯 “사태 자체”를 있는 그대로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림을 볼 때는 어떨까? 그림을 보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보는 것일까? 그림을 읽는 게 아니라 그림에 비친 자신을 읽는 게 아닐까? 블라디미르 쿠쉬의 「Matrix of Love」에서 이 질문을 만났고, 그 대답을 경험했다.

▲ Vladimir Kush, 「Matrix of Love」, 56×58 inches

쿠쉬의 작품 중에서 가장 먼저 반한 작품이 「Matrix of Love」다. 집에 걸어놓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고, 신혼부부에게 선물하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Matrix of Love」에 대한 첫 인상이 낭만적이고 애틋한 사랑의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갤러리를 찾은 분들에게 제일 먼저 소개해드리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그림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자의 눈을 열어 감동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감동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12개의 칸에 12가지 물건이 놓여있다. 12달을 떠오르게 하는 그 모든 칸을 채운 사물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다 그 안에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다. 심지어 나비의 날개도, 아래쪽에 걸린 열쇠에도 남자와 여자의 얼굴이 있다. 그 모두가 사랑의 나눔으로 보였다.

왼쪽 위 첫 번째 칸에는 호두열매가 있다. 열매 속에는 남녀가 손을 맞대고 입을 맞추고 있다. “에덴의 호두”라는 불리는 이 부분은 쉬 깨지지 않는 사랑의 모습으로 보였다. 단단한 호두 껍질 속에서 자라나는 근원적 사랑으로 다가왔다. 그 다음 칸의 열쇠에도 남자와 여자가 있다.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열쇠로 열고, 여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받아들인 두 사람의 만남이 열쇠가 된다. 앞으로 살아갈 삶의 여정에서 마주치는 자물쇠들을 함께 풀 열쇠가 될 것이다. 그 아래는 수다쟁이라는 꽃말을 지닌 꽃, 아마릴리스가 있다. 볼록한 뿌리 속에서 남녀가 사랑의 밀어를 나눈다. 그 사랑의 대화로 꽃을 피우고, 그 꽃에 앉은 나비도 남녀의 얼굴을 한 날개를 지녔다. 나비는 하나 된 두 사람의 사랑으로 자유로이 날아오를 것이다.

“멈춰진 시간”(우측은 독립작품 「Stopped moment」 13×10.5 inches)이라 불리는 시계추 부분에도 마음이 머물렀다. 마음속에 새겨진 사랑의 순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한 아름다운 장면들이 가슴 속에 멈춰있지 않은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어둡고 차가운 마음이 밝고 따스해지는 장면들이다.

이렇게 열두 칸, 열두 가지 물건들 하나하나가 사랑으로 가득해 보였다. 실은 열두 가지 정물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무엇에서든 사랑을 읽어내는 작가의 시선이다. 작가가 그림을 통해 속삭이는 것 같다. “난 무엇을 봐도 사랑이 보여. 온 세상 모든 존재가 사랑이야.”

가까운 지인이 갤러리를 찾은 어느 날 이 작품을 소개해주려고 먼저 물어봤다. 어떻게 보이느냐고. 그 지인의 대답은 감동을 나누려던 기대감을 일순간에 허물어 버렸다. 그이가 너무 답답하고 우울해 보인다고 한 것이다. 순간 멈칫하며 어떤 면이 그렇게 보이냐고 물었다. 들었던 대답은 대략 이런 식이다. “사물 하나하나가 다 답답해. 열매 속에도, 뿌리 속에도 답답하게 갇혀 있고, 열쇠로 묶여 있고, 시간은 멈춰 버렸여. 지갑 역시 닫혀있고, 와인잔은 텅 비었잖아. 가위는 움직일수록 바닥의 종이를 잘라버리고, 소라 역시 앙상하고 흉한 몰골이야. 게다가 이 모든 물건들이 사각의 장 속에 갇혀 버렸잖아. 색감이나 분위기도 무겁고 우울해.”

같은 그림을 봤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분명 일리가 있었다.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 있다. 듣고 보니 정말 답답하게 갇힌 우울한 작품으로 보이기도 했다. 사랑의 입맞춤으로 지갑의 입구가 닫히면서 지갑 안에 삶의 풍성함이 차오른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재물이 많아지면서 지갑이 빵빵해지면 결국 그 입맞춤이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가난할 때의 사랑이 부유해지면서 변질되기 쉽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을 조사해보면, 주변 인간관계들이 깨진다고 한다. 그 중 가장 먼저 깨지는 관계가 부부관계라고 하니.

나중에 그 지인의 해석을 떠올리며 혼자서 그림을 다시 살펴봤다. 뿌리의 좁은 공간이 답답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아늑하고 애틋한 사랑이 아닌가. 뿌리 속 어두운 공간을 두 사람의 사랑으로 견뎌내 결국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모습이다. 그래서 그 사랑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잔 속에 와인이 바닥 나 줄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그래서 자신의 전부를 담아서 주는 모습이 더 애틋했다. 소라의 속이 텅 빈 것처럼 꼼짝할 수도 없는 껍질뿐인 삶의 순간이 있다. 한계상황에 갇힌 무력함, 그렇게 껍질뿐이어도 서로를 꼭 안아주는 사랑이 있다. 그 무엇으로도 쪼갤 수 없는 그 포옹이어서 더 가슴 아려 보였다.

사랑은 변하고 식어 설렘은 결국 멈춰버린다. 하지만 누군가를 자기 영혼처럼 설레며 바라봤던 순간들만은 분명 아름답다. 멈춰버린 괘종시계는 그 아름다운 진실을 보여준다. 사별의 순간 영혼의 일부가 멈춰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 사람과 나눈 사랑의 순간들만은 그래서 더 아름답지 않은가. 그 순간들을 떠올릴 때 마다 다시 사랑이 고동친다. 그렇게 이 작품에서 만났던 아름다움을 고집하며 변론하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으로 가득해 보인 작품이 누군가에게 왜 그리도 우울하고 답답한 족쇄처럼 보였을까?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이 작품을 처음 만나던 당시가 실은 사랑하는 가족이 불치의 병으로 투병하던 때였다. 무엇을 봐도 아려오는 사랑이 보이던 때다. 그런 가하면, 그 지인은 50대에 안정적인 삶이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다. 혹시 결혼이나 사랑에 대한 회의감, 거부감이 투사된 것은 아닐까? 꼭 그렇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마음속에 가득한 그 무엇이 작품에 비춰온 것만 같았다. 적어도 내게 그 작품은 그렇게 나 자신을 비춰줬다.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창조하며 그 안에 나름의 뜻을 담을 수 있다. 작가의 의식, 무의식이 반영된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들이 있다. 그림의 형식을 분석하거나 도상학적 관점으로 그 내용을 분석할 수 있다. 혹은 예술가의 심리를 분석하는 정신분석적 해석이나 사회학적 맥락을 따른 해석도 있다. 하지만 갤러리에 그 작품이 걸리고 누군가 그 작품을 바라보는 순간, 그 작품의 의미는 자유로이 풀러난다. 자유로이 풀려나 무한증식한다.

작품의 의미에 있어서 하나만의 정답은 그러므로 존재할 수 없다. 정답을 찾는 방식으로 미술을, 음악을, 문학을 배웠던 학창시절이 아쉬운 이유다. 같은 작품도 보는 사람마다, 보는 시간마다 다 다른 의미를 비춰준다. 같은 작품을 수없이 반복해 보면서 그 풍성한 의미를 만나는 기쁨도 그래서 가능하다. 또한 작품을 통해 서로의 깊은 속내를 나눌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이 보이는 모습에는 그 작품을 바라보는 방식이 비친다. 자신의 시선이 달라지면 달라지는 그대로 비춰준다. 그래서 작품을 설명하는 순간, 그 작품이 아니라 자기 속내를 자신도 모르게 고백하게 된다. 어떤 작품에 대해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서로에게 자신의 속내를 고백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림은 이처럼 자신을, 서로를, 삶을 그대로 비춰준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그림을 정확하게 해석해 정답을 찾겠다는 덧없는 욕심을 내려놓을 때 가능하다. 작품을 읽는 게 아니라 작품이 나를 읽게 할 때 가능하다. 작품을 통해 자신을 읽으려 할 때, 그림은 더욱 맑은 거울이 된다.

Matrix of Love의 밑단에는 그래서인지 두 눈이 있다. 깃털 무늬로, 나뭇결로 표현된 두 눈이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열쇠가 걸려있다.

이 작품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게 아닐까? 두 눈동자의 눈빛이 작품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고 묻는 것만 같다. 왜 그렇게 보고, 왜 그렇게 느끼는지 묻는 것만 같다. “이 작품에서 무엇이 보입니까? 당신에게 보이는 그 모습, 그렇게 바라보는 그 시선에 열쇠가 있습니다. 당신 자신에 대한 열쇠, 당신 삶에 대한 열쇠가 곧 그 시선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시종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강한 군대가 말과 병거로 성읍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시종이 엘리사에게 와서 이 사실을 알리면서 걱정하였다. ‘큰 일 났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엘리사가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의 편에 있는 사람보다는 우리의 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 그렇게 말한 다음에 엘리사는 기도를 드렸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셔서,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셨다. 그가 바라보니, 온 언덕에는 불 말과 불 수레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루 에워싸고 있었다.”(열왕기하 6:15~17)

시종도, 엘리사도 같은 장면을 본다. 그러나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인다. 시종에게는 큰 걱정거리로 보였지만, 엘리사에게는 하나님의 역사로 보인다. 예술 작품이 자신 안에 가득한 것을 비춰주듯, 보이는 모든 풍경이 자신 안에 있는 그 무엇을 비춰준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유심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분명 마음대로 되지 않는 저 밖의 세계가 있다. 그러나 마음에 가득한 바로 그 무엇이 그 세계를 물들인다. 십자가에서 분명 고통과 치욕이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그보다 더 큰 사랑과 부활로 짙게 물든 아픔이다.

Matrix of Love의 밑단에 있는 두 눈을 보다가 자신에게 묻는다.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이 내가 보는 내용을 물들어버린다면, 정말 그렇다면…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싶을 때, 여행을 떠나야만 하는 걸까? 사랑스러운 사람을 만나고 싶을 때, 새로운 인연을 찾아 떠나야만 하는 걸까? 아름다운 음악 한 자락, 사랑 가득한 마음 한 자락 품어보면 어떨까? 혹시 아는가, 그 리듬이, 그 마음이 바라보는 모든 것을 물들일지, 배경음악으로 분위기 잡아줄지… ’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임재로 영혼을 물들일 일이다. 모든 곳, 모든 사람을 물들이는 그 사랑을 보고 싶다면.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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