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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의 법칙, 예수의 법칙성경으로 하나님을 거슬러서야(요5:39~47)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19.06.27 19:15

요한복음의 말씀은 우리를 깊은 사색으로 인도합니다. 짧은 호흡으로 읽어나가면 자칫 그 뜻하는 바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지만, 긴 호흡으로 읽어나가면 비로소 그 깊은 뜻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더더욱 그런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본문말씀의 문맥을 따라가며 그 뜻을 음미해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청중들인 유대 사람들에게 성경을 연구하는 까닭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때 성경은 물론 모세오경을 핵심으로 하는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그 까닭은 성경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생명의 길, 참 삶의 길이 성경 안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참 삶을 위한 보편적 진실이 성경 안에 담겨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보편적 진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였지만, 오늘 우리 시대에 적절한 언어로 말하자면 성경의 위대함은 인간해방의 갈망, 인간구원의 열망을 가장 호소력 있게 전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성경 서사의 위력은 인간의 해방, 압제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 사회적 평등의 추구 등 시공을 초월한 여러 가지 주제를 설득력이 강하고 명확하게 표현한 데서 우러나옵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사회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공동의 기원, 체험, 운명의식에 대한 뿌리깊은 의식을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이스라엘 핑컬스타인 외,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오늘 본문의 예수님 말씀대로 성경 안에 생명이 담겨 있다는 것은, 오늘의 현대적 언어로 풀어 말하면 그와 같은 뜻을 지닌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사람들이 성경 안에 생명이 담겨 있다고 믿기는 하지만, 정작 성경 안에 담겨 있는 그 생명의 길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당신은 믿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그 진실을 따라 선포하고 행하고 있기에, 정말로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당신이 보여주신 길을 저마다 자신의 길로 삼고 따라야 할 텐데,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헛다리짚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유대 사람들이 성경 안에 생명이 있다는 진실을 정말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당대 유대 사람들의 그와 같은 허구적 믿음은 그들이 일상의 삶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보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너희는 나를 영접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영접할 것이다.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저마다 자기의 권위를 내세우며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서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들은 신뢰하지만 하나님은 신뢰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영광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서로 칭찬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직접적인 인간관계 안에서 서로 신뢰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단지 그것뿐인 관계라면 그것은 자기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일 뿐 그 관계를 넘어서는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진정으로 옳은 길, 정의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데 있습니다. 성경에 담긴 생명은 그 정의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기 이해관계 안에 갇힌 세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그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달리 말해 진정한 의미에서 초월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탐구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 진실은 믿지 않은 유대 사람들의 상태를 말합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현상, 직접적인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사람들의 관계에만 의존할 뿐, 그 현상과 그 관계와는 다른 차원, 이질적인 차원에 대해서는 사실상 마음을 닫아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실상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은 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 안에 생명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그 생명을 붙잡지 못한 상태입니다.

▲ 베데스다 못가의 예수님과 38년된 병자 ⓒGetty Image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고소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바로 그 잘못을 하나님께 고해 심판을 받게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선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른바 종말론적 지평 안에서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자로 묘사되지만, 적어도 이 대목에서, 아니 적어도 예수께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동안 사람들을 심판하는 데 당신의 뜻이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 오늘 본문말씀의 직접적인 문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굳이 사람들을 심판할 필요 또한 없습니다. 본문말씀에 표현된 그 명백한 이유를 보면, 그 심판은 이미 유대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세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율법을 말합니다. 구약성서의 요체로서 율법입니다. 그 율법에 이미 사람들의 잘잘못을 분별할 수 있는 심판의 기준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대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으로 집약되지 않습니까?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당신의 백성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 하나님의 정의를 믿는 백성은 그 하나님의 정의를 사람들 가운데 펼쳐야 한다는 것으로 집약됩니다.그것이 율법의 대강이며 예언의 근본정신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보시기에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유대 사람들은 그 율법의 뜻도 모릅니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모세가 나를 두고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모세의 글을 믿지 않으니, 어떻게 내 말을 믿겠느냐?”

율법의 근본정신을 모르니, 바로 그 근본정신을 구현하고자 이 땅에 오신 당신을 알 턱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명의 길을 따르고자 한다면서도 따르지 않은 유대 사람들을 두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통탄하고 계십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얼마나 신실했을까요? 철저하게 성경을 믿고 율법을 지킨다며 종교적 계율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열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은 성경의 근본 뜻, 생명의 길과는 무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등장하는 전반적인 맥락을 확인해보면 그 의미를 더욱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이른바 안식일 논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 사건이 있습니다. 곧 유대 사람들을 질타하는 이야기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른바 베데스다 연못에서 중풍병자를 치유한 사건입니다(5:1~18).

예루살렘에는 베데스다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 연못 주변에는 다섯 개의 행각이 있고, 그 행각 안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중풍병 환자 등등. 그 환자들이 거기에 머무른 사연은 그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마다 맨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병든 지 삼십팔 년이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병든 지 오래 되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그렇게 하염없이 오랫동안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 묻습니다. “낫고 싶으냐?” 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랜 세월을 기다렸어도 나을 수 없었던 그 사람은 예수께 하소연합니다. “선생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들어갑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곧바로 선언하십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가지의 삶의 법칙이 있습니다. 베데스다의 법칙과 예수의 법칙입니다.

낫고 싶어도 나을 수 없었던 병자에게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연못에 뛰어들기만 하면 낫는데, 이 환자는 연못에 뛰어들 수가 없었습니다. 병약하여 거동이 불편한 그를 데려다 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더 크고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삼십팔 년 된 이 병자만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병자들에게 동시에 해당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연못의 물이 소용돌이칠 때 가장 앞선 딱 한 사람만이 그 연못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가장 앞선 딱 한 사람’만이 치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베데스다의 법칙입니다. 그 법칙은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 경험하는 법칙입니다. 가장 앞선 사람만이 기회를 누리는 세상의 가혹한 법칙입니다.

그 덫에 걸려 헤어나지 못한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묻습니다. “낫고 싶으냐?” “그렇다면,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그 한 마디로 그 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예수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베데스다의 법칙, 기존의 법칙을 파기합니다.

단 한 사람만이 그것도 가장 앞선 한 사람만 선택될 수 있도록 만드는 그물망을 한순간에 해체해버리고 무력화시키는 것이 예수의 법칙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언제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언제나 중요한 것은 당당한 삶의 주체로서 그 사람의 의지입니다. “낫고 싶으냐?” 그 물음에 “예, 낫고 싶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는 의지면 족합니다.

얼마나 통쾌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거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사건을 두고 트집 잡는 유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날이 하필 안식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법칙 곧 생명의 길과, 베데스다의 법칙 곧 유대 사람들의 율법주의, 허구적 믿음을 극적으로 대비시켜주고 있습니다.

삼심팔 년 동안 병을 앓던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고 자리를 거두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장면이 유대 사람들에게 딱 걸렸습니다.

안식일법 위반입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자기 자리를 거두어 이동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39×6=234: 파종, 쟁기질, 수확, 단 묶는 일, 타작, 키질, 독서, 제분, 체질, 반죽, 굽는 일, 표백, 빗는 일, 채색, 잣는 일, 실을 감는 일, 엮는 일, 분리하는 일, 매듭짓는 일, 푸는 일, 시침질, 이를 위해 뜯는 일, 사냥, 도살, 가죽 벗기는 일, 소금에 절이는 일, 가죽정리, 깎아내는 일, 절단, 두 개 글자 쓰는 일, 이를 위하여 지우는 일, 건축, 무너뜨리는 일, 불 끄는 일, 점화, 망치질, 운반...) 안식일에 치유를 받은 사람이 자리를 거두어 이동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 예수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유대 사람들은 이제 예수께 트집을 잡습니다.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생명을 살리는 일, 생명을 살리는 노동의 의미를 환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종교적 계율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고, 그것이 진정으로 성서의 율법,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뜻도 모른 채 율법을 준수하는 자기들이야말로 의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유대 사람들을 두고, 예수께서 질책하고 통탄하고 계신 말씀입니다.

베데스다 연못 사건에서부터 오늘 본문말씀에 이르기까지 그 맥락을 살피며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경쟁을 이겨낸 딱 한 사람만 선택되는 질서와 그 질서를 뒤집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법, 그것을 더욱 강화하고 정당화하는 종교가 판을 치는 현실이 엄존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현실이지만,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남북이 더 이상 갈등하지 않고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여정, 여러 소수자들이 당당하게 삶을 영위하는 일상의 사회적 평화를 이루는 일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신앙의 명분을 내세우고, 교회의 이름을 걸고 험한 말을 내뱉으며 교회와 사회를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고 감사한 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소란을 피우면 피울수록 그 자신이 얼마나 허황한 믿음을 갖고 있는지, 그가 대표한다는 집단이 결코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를 계기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금 깨닫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요! 누가 심판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심판받고 있다는 것을 제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과 궁합이 잘 맞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 제1야당의 대표이면서 전도사 직함까지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국교회를 스스로 대표한다는 그 사람이 스스로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몰라서일까요? “우리나라에 그동안 기여한 것이 없는 외국인들에게 산술적으로 똑같이 임금수준을 유지해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이것은 단순한 말 실수가 아닙니다. 그가 대표하고 있는 정당은, 현재 최저임금법이 그 적용대상에서 예외로 하고 있는 장애의 경우에 더해 외국인까지 그 대상에 포함하는 법안을 발의하기까지 했습니다.

‘인권 감각 0점, 경제감각 -100점’! ‘입법활동에 그동안 기여한 것이 없는 한국당에 산술적으로 똑같이 임금수준을 유지해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건전한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냥 웃어넘길 일일까요? 경제감각의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이 시간 따지지 않겠습니다. 늘 성경을 마주하는 기독교인, 게다가 전도사 직함까지 갖췄다면 신학을 공부했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보기에 경악할 만한 이야기 아닌가요? 사실 자체를 왜곡했을 뿐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기여의 원칙을 넘어선 하나님의 정의를 완전히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요? 성경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따른다는 사람(들)이 과연 성경의 진실을 알기는 알고 있는 것일까요?

이러한 사태를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일침을 가합니다.

“세상은 스스로가 있다고 상상하는 안전성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 저항한다. 그리고 그러한 안전성은 종교에서 가장 고차원적이고 파괴적인 형태에 도달하게 되며, 따라서 유다 사람들에게서는 성경에 근거한 그들의 삶에서 그러한 파괴적인 형태에 도달하게 된다. 성경에 대한 그들의 ‘탐구’는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말에 대해서는 귀머거리가 되게 한다.”(국제성서주석 <요한복음 I>, 434)

‘스스로 믿고 있는 안전성’,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기만의 우상일 뿐입니다. 성경을 신실하게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가장 지독한 형태의 우상숭배가 가능하다는 것을 꼬집는 격언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금 우리가 대하고 있는 본문말씀에서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현실에서 그와 동일한 사태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과연 무슨 일을 하고자 하였는지 깨닫는 것과 통합니다. 예수께서는 가장 앞선 사람의 삶만을 보장하는 법칙을 따른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모든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나님의 일로 여겼고, 당신의 일로 여겼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역할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의미를 나눌 때마다 그 대의를 깨닫고, 그 진실을 이루기 위해 결단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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