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만남: 비틀거릴 우리가 안길 곳은 어디에?(창 32:22-32; 엡 3:14-21; 마13:44-52)성령강림후 셋째 주일(6월30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6.29 11:30

1. 만남

<안토니우스를 맞이하는 클레오파트라>

그림은 A. M 포크너가 그린 <안토니우스를 맞이하는 클레오파트라>(1906)입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귀신에 홀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천하의 1/3을 소유한 안토니우스는 나머지 2/3가 아니라,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가장 잘 묘사한 이가 셰익스피어입니다. 사랑에 관한 희곡 작품 두 가지가 있는데, 『로미오와 줄리엣』,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주인공들의 대화에 ‘몸의 감각’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빠져있습니다. 몸을 이상화한 풍경에 대한 언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체적이지 못하고 이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10대들의 사랑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실제적인 사랑에 미숙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은 다릅니다.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지면서 일어나는 갈등을 그린 대서사시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신들이 성인이라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삶 자체에서 너무나 많은 재미와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인간의 삶을 초월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관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 성숙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역사에서 안토니우스를 제거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제1대 황제가 되어 학술·문예를 장려해 로마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하게 됩니다. 초대 황제가 됩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로마사와 유럽사, 세계사에 별다른 영향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이들의 불멸의 사랑은 영원히 기억됩니다. 따라서 정치가 아닌, 사랑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역사의 승리자가 됩니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의 만남이 불멸의 사랑으로, 역사를 넘어 기억되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의 만남도 이러할진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귀한 것일까요?

오늘 세 본문의 주제는 따라서 ‘만남’입니다. 구약에서는 ‘야곱이 하나님과 대면(창32:30)’했으며, 복음서에서는 ‘천국을 발견한(만난) 사람(마 13:44)’, 에베소서는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는 사람(엡 3:17)’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으로 세워진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의 구성원들은 하나님을 대면해야 하며, 천국을 발견하고,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계셔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2. 하나님과 대면한 야곱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볼까요? 야곱이 하나님과 대면한 말씀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간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입니다. 야곱은 사자를 형 에서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야곱은 심히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20여년 전,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을 속여 장자권을 빼앗았고, 눈먼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 에서로 변장하여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형 에서가 자신을 벌하러 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은 모든 일행과 가축으로 하여금 얍복강을 건너도록 한 후, 자신은 기도의 밧줄을 잡고 천사와 씨름을 합니다. 여기서 얍복이라는 지명은 히브리어로 아바크(씨름하다)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וַיֵּאָבֵ֥ק, 와예아베크)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창 32:22-25)

홀로 남은 야곱은 고독의 심연에서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씨름이라는 히브리어 ‘아바크’는 ‘먼지에 쌓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형 에서를 만나기 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욕심과 두려움 속에서, 우스개로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영적 씨름을 한 것입니다. 이 끈기에, 야곱과 씨름하던 어떤 사람(a man)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6-28)

고대 시대는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야곱의 축복 요구에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 줍니다. ‘교활한 사람, 속이는 자’라는 ‘야곱’에서 ‘하나님과 같이 굽히지 아니하는 사람’이라는 ‘이스라엘’로 바꾸어 준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이스라’라는 ‘주도하다, 다스리다’라는 ‘사라’의 3인칭 평서형, 또는 기원형과 ‘엘’의 결합입니다. 엘은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을 뜻하죠?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다(평서형)’,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기를(기원형)’이라는 뜻입니다. 흔히 오해하듯이,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 이 28절의 말씀을 조금 더 맥락에 맞게 바꾸어 볼까요?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야곱아! 이제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교활한 사람, 속이는 자)이라고 부르지 말아라. 네가 지금까지는 야곱으로 살아서,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그들과 싸워 이겼다(형에서, 외삼촌 라반 등). 그리고 오늘은 하나님인 나와 겨뤄 이기지 않았느냐?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렇게 살지 말아라. 이제부터는 ‘이스라엘’로 살아 가거라. 지금부터는 내가 너를 주도하고, 내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 이름이 바뀜으로 존재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기 주도적인 교활하고 속이던 야곱이 하나님 주도의 이스라엘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은 묻습니다.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창 32:29-32)

브니엘(פְּנוּאֵל)은 ‘파나(~앞에서, ~를 향하여)’와 ‘엘’의 결합으로, ‘하나님의 면전’, 혹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천사)이었고,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과 만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뜻과 같이, 브니엘이라는 말의 의미도 야곱의 힘과 용기와 승리를 기념하는 이름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이름이 됩니다.

따라서 야곱은 “내가 이 장소에서,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라고 하지 않고, “내가 이곳에서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만났다. 그럼에도 내가 죽지 않았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올 때, ‘하나님의 집’인 벧-엘(בית-אל)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꿈 속에서 보았다면,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하나님의 얼굴’을 만난 것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는 사람

서신서 에베소서는 교회의 본질에 관한 신학적 원리와 교회 성도들 간의 온전한 일치와 연합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성도 개개인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실천적 교훈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옥중서신인 에베소서는 오순절 성령강림과 함께 초대교회가 태동 된지 불과 30여년 정도 지났을 때 기록이 되었습니다. 교회 조직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교회관 조차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한 때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동된 교회의 비밀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 3:10)” 이 말은 교회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 ‘하늘에 있는 통치자와 권세들(ταῖς ἀρχαῖς ταῖς ἐπουρανίοις ἐν τοῖς ἐπουρανίοις)’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ἐν τοῖς ἐπουρανίοις)’ 악한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1-12).”에 나오는 하늘과 같은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ούρανός, 우라노스)이 아니라, 하늘 저편, 하늘의 반대편(έουράνιος, 에푸라니오스)를 뜻합니다.

<고대인들의 세계관>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의 영역과 인생들이 살고 있는 땅의 영역 사이가 공중이며, 또한 하늘의 저편입니다. 즉,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사이에서 권세를 잡고, 인간들 가운데 악한 죄의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교회는 알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교회의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온전한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셔야 합니다. 본문은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

바울은 4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령으로 속사람의 강건을, 둘째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마음에 계시기를, 셋째 서로 사랑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넷째 하나님의 충만케 하심으로 충만(πλήρωμα, ‘채우다, 완전하게 하다’에서 유래)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이뤄진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시작되는 교회, 조직화 되는 연약한 교회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ἐν τῇ ἐκκλησίᾳ)’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

4. 천국을 발견한(만난) 사람

따라서 교회는 이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을 발견한 사람은 어떨까요? 오늘 신약의 본문 마태복음 13장은 하나님 나라를 비유를 통해 가르치셨기에 ‘비유장’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도 비유장이었죠? 마가복음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4:1-20), 등불의 비유(4:21-25), 성장하는 씨앗의 비유(4:26-29), 겨자씨 비유(4:30-32) 등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고, 마침내 풍랑인 혼돈을 예수님께서 잔잔케 하신(4:35-41)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13:1-23), 가라지 비유(13:24-30; 36-43), 겨자씨와 누룩 비유(13:31-33), ‘세 가지 천국 비유(13:44-52)’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설명하신 후, 고향으로 돌아가 배척받는(13:53-58)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혼돈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과 마태복음의 고향에서 ‘배척받은 예수님’으로 두 복음서가 대조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의 특성인데, 유대인들과의 끊임없는 논쟁과 설득의 과정입니다. 아무튼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세 가지 천국 비유입니다. 천국을 ‘감추인 보화’, ‘극히 값진 진주’, ‘가득한 그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①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②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또 ③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마 13:44-48)

임의로 번호를 매겼는데, ① 감추인 보화와 ② 극히 값진 진주로 비유되는 천국은 모든 소유를 다 팔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③ 가득한 그물 비유는 좀 다릅니다.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린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핵심은 세 번째에 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와 동일한 맥락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가라지(불법을 행하는 자들)도 곡식과 함께 그냥 내버려 둘 것이나, 마지막 날에는 뽑아서 풀무 불에 던져 넣는다(마 13:41-42)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계속 이어지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마 13:49-51) 그러면 의인은 누구이고, 악인은 누구인가요? 예수님의 다음의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 13:52)

여기서 서기관(γραμματεὺς, 그람마튜스)는 에베소 지방의 고위관리의 직함입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신약 시대 유대인들 가운데 율법 전문가, 혹은 율법학자에 대한 명칭이기도 합니다. 대제사장과 함께 언급되며 산헤드린 공의회의 구성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보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의 율법에 기초하여 해석하지만, 천국의 율법학자, 곧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통해 구약 율법의 실현이라 해석하는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새것과 옛것을 구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맛본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 의인이라는 말이며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기존 율법학자, 바리새인, 제사장, 서기관들은 악인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새것(예수의 복음)과 옛것(마태복음의 논쟁 대상자들인 바리새인들의 율법)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비틀거릴 우리가 안길 곳은 어디에?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는 사람, 천국을 발견한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만남을 통해,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처럼, 새로운 존재로 변화 됩니다. 그림으로 시작했으니 그림으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다음 그림은 빛의 화가’로 불리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가 1660년경에 그린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입니다. 렘브란트는 심리묘사가 뛰어난 화가인데, 천사의 온화한 표정이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이 그림에서 렘브란트는 아마도 얼굴표정을 통해 사람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그림은 야곱과 천사가 씨름하는 장면을 단순하게 그린 것 같지만, 두 인물의 표정을 통해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해 볼 수 있습니다. 곧 형 에서를 만나기 전, 두려움에 빠진 야곱은 전적으로 천사에게 매달려야 했습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늘진 야곱의 얼굴이 얼마나 절박한 처지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야곱의 표정을 보면, 마치 형장에 끌려가는 죄수처럼 수심에 가득 차 있으며, 의기소침해 있습니다.

그런데 끈질긴 야곱을 상대하는 천사의 표정은, 안간힘을 쓰고 있는 야곱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천사는 성경의 말씀처럼 오른발로 야곱의 엉덩이뼈를 차고 있지만 그의 팔은 야곱을 품안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이것은 씨름이 아니라, 포옹처럼 보입니다. 강렬한 빨간색인 야곱의 복장과 흰 옷을 입은 천사의 복장이 그들의 얼굴만큼이나 대조됩니다. 저는 이 그림을 보면서 야곱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을 유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왜 눈을 감았을까요? 바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처럼 위기의 상황에서 영적인 기도에 힘을 쏟을 때, 항상 지기 위해 준비를 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복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해 언제나, 어디서나, 어느 때나 기다리고 계신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 밤새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싸움을 하고 있다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 왜 나를 괴롭게 하십니까? 왜 나를 힘들게 하십니까?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러나 주님은 항상 우리를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고, 우리를 당신 품에 보듬어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온화한 눈빛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비틀거릴 우리가 안길 곳은 바로 하나님의 넓은 품입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