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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성(출 32:1-4; 딤전 6:6-19; 눅 16:1-13)성령강림후 넷째주일(7월7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7.05 18:46

1. 약자의 이중성

이중성(二重性)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의 사물이 지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을 뜻합니다. ‘약자의 이중성’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우리 사회의 통념상 약자는 늘 선하며, 강자는 언제 악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잠재적 폭력자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약자는 자신의 약함을 무기로 악을 범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약자의 이중성이라고 합니다.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덴마크 영화 <더 헌트>(2012)는 약자의 이중성과 거기에 동조한 공동체의 폭력성을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제목은 우리 말로 ‘사냥’, 혹은 ‘사냥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루카스(매즈 미켈슨 분)는 이혼 후, 고향으로 내려와 유치원 교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새로운 여자 친구를 사귀며 아들 마커스와 함께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꾸려갑니다. 친절하고 재미있는 루카스는 유치원 아이들에게 인기 스타입니다. 친구 테오의 딸 클라라는 생각이 많은 외톨이입니다. 아빠는 엄격하고, 오빠들은 혈기 왕성한 사춘기입니다. 클라라에게 보여줘서는 안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늘 외톨이이었던 클라라는 자신을 자상하게 대해주는 루카스를 좋아하게 됩니다. 선생님에게 선물도 주고, 입술에 키스도 합니다. “이런 것은 아빠와 엄마에게 하는 거야.”하며 타이르는 루카스 선생님을 클라라는 오해합니다. 선생님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원장 선생님께 가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의 그것을 보았어요.” 깜짝 놀란 원장 선생님은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일을 학보모들인 마을 사람들에게 공론화 시킵니다. 무죄를 항변하는 루카스에게 원장 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아무튼 순진한 아이의 말 한 마디에, 선생님 루카스의 인생은 송두리째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루카스는 마을 사람들의 불신과 집단적 폭력 속에서 하루 하루 견디기 힘든 외로운 싸움을 시작합니다. 증거는 아이의 증언뿐입니다. 모든 어른들은 가련한 피해자인 아이의 말만 믿고, 루카스와의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마녀 사냥이 시작된 것입니다. 헌트!

그러나 클라라는 자신의 고백 때문에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엄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바보 같은 말을 했는데, 이젠 다른 사람들까지 바보 같은 말을 따라하고 있어.” 그러자 엄마는 상처받은 아이의 무의식이 사실을 지웠다고 말해줍니다. 약자, 혹은 아이(의 순수성)의 옳음에 대한 무한한 신뢰입니다. 이제 클라라도 혼란스러워합니다. 아무튼 경찰 조사가 시작되어, 루카스는 무죄를 선고받지만, 마을 사람들은 의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입니다. 무죄가 밝혀진 1년 후, 마을을 떠나 다시 돌아온 루카스는 마을 사람들의 환영을 받습니다. 이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어느 날 루카스는 아들과 함께 사슴 헌트를 나갑니다. 총성이 울립니다. 루카스의 바로 옆 나무에 총알이 박혔습니다. 루카스가 괴한의 총에 맞을 뻔 했던 것입니다. 태양빛을 등 뒤로 한 검은 그림자는 루카스를 한 번 더 조준합니다. 급히 피하지만, 총성은 들리지 않고, 그림자는 사라졌습니다. 루카스는 그때서야 깨닫게 됩니다. 자신에게 찍힌 낙인은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중성

오늘 구약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중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해 주셨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대신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대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었지만, 그 구원의 기쁨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말씀을 볼까요?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출 32:1-4)

출애굽 3개월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에 도착하였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을 등정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을 체결하는 도중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밑에서 아론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체결하려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여, 세계만방에 제사장 나라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간 후에 너무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을 불안해 졌습니다. 그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중성은 불안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불안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드레아 디 리오네 작품의 ‘금송아지 숭배’>

3. 청지기의 이중성과 바리새인들의 이중성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고, 맘몬, 곧 재물 신을 섬기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인 오늘 신약 본문의 말씀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들을 따끔하게 혼내주시는 예수님의 유머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와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당시의 상황에서 쉽게 이해되었을 텐데,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는 시대적 한계, 언어적 한계로 인해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누가복음에서 본문이 위치해 있는 맥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있었던 일입니다. 누가복음 9장에서 19장까지가 그 내용입니다. 말씀을 찾아볼까요?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눅 19:28).”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자도의 본질을 ‘무소유(無所有)’로 가르쳐 주십니다. 그 핵심은 누가복음 14장에 나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또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기도 합니다(눅 11; 12; 14장). 그리고 15장, 16장 말씀이 이어지는데, 오늘 본문 16장 말씀은 15장과 연계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15장의 내용을 먼저 정리해볼까요?

(1)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눅15:1-7; 마 18:12-14)
(2) 잃은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연인 비유(눅 15:8-11)
(3)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눅 15:11-32)

가만히 보면, 이 비유의 배열은 점층적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는 100마리 중 한 마리이고(1%),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는 열 드라크마의 10%입니다. 그리고 잃은 둘째 아들은 그 비율이 50%가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 되찾은 아들이 핵심이 됩니다. 그리고 16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복음 15장 28절 말씀입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첫째 아들은 아버지께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베푼 잔치 자리에 노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권면에 대한 첫째 아들의 답은 성서에 없습니다. 그리고 16장의 비유로 넘어갑니다.

(1)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눅 16:1-13)
(2)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

따라서 15장이 잃어버린 것, 혹은 잃어버린 이들을 찾은 기쁨이라면, 16장은 잃어버린 이들이 누구이며, 또한 이들을 찾는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반대자들, 곧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일단 본문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눅 16:1-3)

그러나 청지기는 앞날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할 일을 깨닫습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눅 16:4-7)

어떻게 보면, 사기입니다. 속임수입니다. 법적 표현으로는 문서위조입니다. 그런데 성서의 평가는 반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대상자를 분명히 하기 위해 첨가해 봅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바리새인들, 빚을 준자)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빚진 자)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빚진 자) 너희를(빚을 준자, 바리새인들)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8-10)

바리새인들에게 빚진 자, 고통 받는 자, 다시 말하면,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가난한 자,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자들에게, 너희 바리새인들이 불의로 모은 재물을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훈계하십니다. 비유의 결론입니다.

“너희(바리새인들)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1-13)

그런데 이 비유를 들었던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 16:14)!”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분명해졌습니다. 잃어버린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베푼 잔치자리를 첫째 아들이 거부했듯이, 잃어버린 이들을 찾으러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바리새인들이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기득권을 포기하며, 우리의 재산을 나누어야 되는 것이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섬깁니다.

그러나 불의한 청지기는 재물을 제대로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기적이기 않고, 이타적인 것!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것! 불의의 재물로라도 선한 일을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그런가요? 우리 교회는 그런가요? 아니, 우리들 자신은 어떻습니까?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교수 시절이던 2012년 안식년을 틈타 지은 책, 『종횡무진 한국경제』 (오마이북, 2012)에서 한국 사회를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거부권만 넘치는 곳이다. 어떤 세력도 자신의 의도를 관철할 헤게모니를 갖지 못하면서, 상대방의 의도를 언제든지 좌절시킬 수 있는 이른 바, 비토 크라시 체제이다.” ‘거부권 정치체제’라는 말입니다.

‘내가 잘하기는 어렵지만, 남 못되게는 쉽게 할 수 있다!’, ‘되게는 못해도, 안 되게는 한다!’ 바리새인들이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신앙 좋은 척, 경건한 척, 하나님의 참된 제자인척 하지만, 속은 섞을 대로 섞은 이들입니다. 청지기의 이중성은 적어도 칭찬을 받았지만, 바리새인들의 이중성은 용서받지 못할 이중성입니다.

4.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그렇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계속 바울의 충고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7-10)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당부합니다. 사실 디모데전서 6장은 신앙교육 지침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특별히 디모데의 목회에 있어서 경건과 자족하는 마음을 지닐 것을 권고합니다. 계속해서 들어볼까요?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그리고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3-16)

누가복음의 바리새인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죠? 아니, 우리 모두에게 해당이 되나요?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7-19)

5. 선을 행하는 너그러운 자가 되라!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영화 <더 헌트>에서 거짓말을 한 아이 클라라는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고집하죠?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 18:16-17, 막 9:36-37). 그렇다면 어린아이들의 무엇을 천국의 가능성으로 보았을까요? 바로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시인하는 품성을 본 것이 아닐까요? 아이도 어른도 거짓말을 하고, 잘못하고,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만이 그것을 인정합니다. 어른들은 결코 잘못을 인정하지 않죠? 하나님 나라는 잘못한 죄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곳입니다. 의로운 의인들이 자신의 의와 경건을 자랑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잘못도 하고, 실수도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더 헌트>는 배우의 연기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의 속성과 공동체의 속성도 엿볼 수 있는 아주 괜찮은 영화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받아도, 또 그 죄를 다시 범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죠? 다시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립니다.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언제 이 죄악의 악순환을 끊어 버릴 수 있나요? 바로 성령께서 임하시면 가능합니다. 이제 내 안에 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심으로 말미암아, 이 죄악의 악순환을 끊어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연약하고 이기적인 우리를 반년 동안도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자족하는 마음으로 나머지 반년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잘못하고 실수해도 그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며, 이러한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자신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딛전 6:18). 이제 또 2019년의 반년을 은혜로 동행하실 하나님을 찬양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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