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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자신을 태우지 않는다”Vladimir Kush 「태양의 교향곡」 외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7.05 18:57

대학교 1학년 때 유럽 배낭여행에서 파리에 뽕피두예술센터를 간 적이 있다. 파리 3대 미술관이자 유럽 최고의 현대 미술 전시관이라 기대감이 컸다. 그런데 입구에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하필이면 그날 공사 중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올 기회가 있을까 싶어 많이 아쉬웠다. 남은 시간, 근처에 살고 있던 일행의 지인을 만나러 갔다. 뽕피두예술센터가 공사 중이어서 많이 아쉽다고 했더니, 그 지인 말로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다녀왔다고.

더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곳은 포스트모던 건축기법으로 지은 건물이었다. 건물 철골이 다 드러나 있고 배관, 가스관, 통풍구까지 노출시켰다. 파격적인 건축예술이다. 그 예술이 그저 공사 중인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앞쪽에서 봤다면 수많은 관람객 때문에 눈치라도 챘겠지만, 뒤쪽에서 다가가서 공사 중인 줄로만 알았다.

▲ 뽕피두예술센터 뒤쪽

그 지인의 말을 듣고 다시 갔다. 안에 들어가 보니 도통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작품들만 가득했다. 그야말로 눈 뜬 장님, 그런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그 안에서 뛰놀았다. 작품을 보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도 나누고 있었다. 건축의 파격성, 현대미술의 난해함보다 그 아이들의 모습이 더 충격적이었다. 저 아이들이 자라면서 경험하는 삶은 어떨까?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면, 같은 사건, 같은 경험 속에서도 다른 것을 보지 않을까, 다른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추구하지 않을까 싶었다.

세월이 흘러 뜻하지 않게 산속에 있는 160평 규모의 갤러리에 깃들어 지낸다. 470여점의 소장 작품을 전시하고 해설한다. 그러면서 예술의 맛과 멋에 눈을 떴다. 늦바람이라 할까. 이런 멋과 맛을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오십이 저만치 보이는 지금에야 알게 된 게 너무 아쉬웠다. 예술작품을 통해 일상 속 아름다움을 맛보는 삶, 그것을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되었나 싶었다. 그저 작가 이름, 무슨 주의, 무슨 주의에 년도나 외우면서 지겹기만 했던 미술수업이 원망스러웠다.

아이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놀고, 갓난아기는 물에 넣어도 수영을 한다. 예술의 장에 풀어 놓아주면, 어떨까? 초중학생 미술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확인한다. 어느 정도 즐길 수 있는 장을 열어주고 살짝만 도와줘도, 스스로 작품을 즐기고 맛본다. 작품 속에 담긴 아름다움을 자기 이야기로 풀어간다. 어떤 해설보다 더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예술이 낯설고 어려운 것으로만 알고 자라난다. 예술적 감수성이 깨어날 기회를 주지 않고, 정답 찾기에 가둬놨기 때문이다.

처음 중학교 1학년 한 반 아이들이 갤러리를 찾아온 일이 생각난다. 맞이하는 마음에는 기도가 하나 있었다. 부디 예술작품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기를! 고민 끝에 설명보다는 체험을 궁리했다. 작품 해설이나 평론이란 결국 작품을 감상하며 내면에 일어나는 울림이 무엇인지 그대로 비춰주는 일이다. 그래서 예술작품을 보면서 어떻게 감동하고 뭉클했는지 돌아봤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작품이 일깨워주는 삶의 맛과 향기다.

쿠쉬의 「Bound for Distant Shores」를 처음 봤을 때 시간이 멈춰버렸다. 재깍재깍 초침 소리는 사라지고 몇 년 전 어느 날, 어느 해변이 떠올랐다. 어머니와 함께 앉았던 그 해변, 얼마나 더 고통스러울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던 어머니와 절벽 끝자락에 앉았었다. 그 절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쿠쉬의 작품은 깎아지른 절벽의 선으로 여인의 얼굴을 그려준다. 하늘의 구름은 머리결로 흩날리며 바람에 날리던 어머니를 보여준다. 어머니, 바람에 흩날리던 그 머리결, 저 멀리 파도를 바라보던 눈빛이 떠오른다. 사진처럼 선명하지 않지만, 사진이 보여줄 수 없는 빛깔로 보여준다.

▲ Vladimir Kush, 「Bound for Distant Shores」, 유화, 20×25 inches

갤러리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중학교1학년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그런 경험을 맛볼 수 있을까?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 믿어주기로 했다. 나 자신도 배우지 않고 스스로 느꼈는데, 아이들이라고 불가능할까. 그래서 자유롭게 감상할 시간을 줬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마음을 끄는 작품을 골라서 한 사람에게 보내주도록 했다. 폰으로 사진을 찍어 보내주고, 한 줄이라도 글을 쓰게 했다. 그것을 함께 나눴다. 어느 그림을, 누구에게 왜 보냈는지, 뭐라고 썼는지를.

한 여학생이 쿠쉬의 「Symphony of The Sun」을 골랐다. 누구에게 보냈는지 묻자, 같은 반 친구를 가리켰다. 그 이유에는 유치원 시절 추억이 담겨 있었다. 보통 유치원 때 처음으로 낯선 세계를 만난다. 낯선 곳에서 불안에 움츠려 있던 그때, 그 친구가 다가와 손을 내밀어줬다. 저 햇살이 그때 그 친구의 손처럼 느껴져서 보내준 것이다. 그 밑에 이렇게 적었다. “넌 저 태양의 햇살처럼 처음으로 내게 손을 내밀어 준 친구야.”

▲ Vladimir Kush, 「Symphony of The Sun」, 유화, 35×44 inches

「Symphony of The Sun」은 교향곡을 연주하는 태양을 그린다. 두 줄기 햇살이 태양의 양손이다. 태양 아래 흐르는 구름은 사이사이로 빛내림을 펼친다. 바람에 움직이는 빛내림의 율동을 피아노의 흰 건반, 검은 건반으로 빗대었다. 날아오르는 새들은 흰 건반, 검은 건반의 화음이 허공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줄기 빛이 태양의 두 손이라고 설명해준 적이 없다. 그 아이들에게 이 작품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2년이 넘도록 이 작품에 대해 들어온 어떤 감상보다 가슴 깊이 울려왔다.
 
남학생 하나는 같은 반 친구에게 코뿔소로 표현한 「Trojan Horse」를 보내줬다. 받은 아이는 뭔가 움츠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갤러리를 안내하면서 뭔가 물어보면, 목소리도, 표정도, 몸도 거북이처럼 숨어드는 듯 보였다. 부끄러움이 많다기보다는 두려움으로 느껴졌다. 그 반에서 제일 큰 남자 아이를 무엇이 그렇게 움츠리게 하는지는 모른다. 속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코뿔소 그림을 보내주면서 친구가 전한 말은 이렇다. “넌 참 듬직한 친구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을 주고받지만, 어떤 말은 평생 가슴 속에 남는다. 그 아이를 옥죄는 그 무엇에서 풀려나게 하는 친구의 선물로 느껴졌다. 그 작품에 담은 친구의 말 한 마디가 불꽃이 되면 좋겠다. 코뿔소처럼 거침없이 나아가게 할 불꽃이.

▲ Vladimir Kush, 「Trojan Horse」, 유화, 21×27.5 inches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예술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작품 해설을 외우게 하고 정답을 찾게 하면서 눈이 멀었을 뿐이다. 그저 작가 이름, 무슨 주의, 연도나 외우면서 지겹기만 했던 미술수업이 눈을 멀게 한 게 아닌가. 예술의 날개를 정답 찾기로 묶어놓은 탓이 아닐까. 아이들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읽어낸다. 장을 열어주면, 작품에 담긴 아름다움을 자기 이야기로 풀어간다. 그것이 어떤 해설보다 더 감동적이다. 한 아이 한 아이가 눈을 떠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할 때, 내 눈도 보기 시작했다. 아이들 속에 두근거리고 있는 아름다움을. 그날 내게 예술은 그 아름다운 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고, 북돋아 주는 햇살이었다.

갤러리를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스스로 맛보고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 자신 안에 있는 예술에 대한 감각들을 일깨워주고 싶다. 아름다운 것을 스스로 발견하고 나누는 즐거움에 함께 빠지고 싶다. 오늘도 갤러리를 돌아다니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 하나가 혼잣말을 했다. “미술관 재미있네!” 감사의 미소가 번진다. 부디 예술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추억이길, 그래서 어느 날 미술관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기를, 감동과 위로와 깨달음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중년에야 예술의 아름다움에 눈뜬 늦바람이 못내 아쉬워 아이들에게 욕심을 내는가 보다.

한 젊은이가 현자를 찾아가 제자로 받아주길 청한다. “제가 선생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현자는 스승이 되기를 거절하며 말한다. “자네가 제자인 것은 다만 자네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일세. 눈을 뜨는 날이면 자네는 나나 또는 어느 누구한테서든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진실을 보게 될 걸세.” 그러자 젊은이가 다시 묻는다. “그러면 스승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입니까?” 현자가 대답한다. “스승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
- 앤소니 드 멜로, 『일분 지혜』, 45쪽 참고.

긴 여운이 남는 우화다. 스스로 보는 눈을 멀게 하고, 스스로 경험하는 감각을 마비시키는 스승이라면, 불필요할 뿐 아니라 훼방꾼이다. 예술에서만 그럴까, 신앙에서는? 이 우화를 가끔씩 떠올리며 곱씹는다. 이 우화가 신앙의 화두로 조금 다르게 들려온다. ‘목사는 왜 있는 것입니까?’ ‘목사가 필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사실 목사가 얼마나 불필요한지 절절히 느끼는 시절이다. 그래서 더 무겁게 다가오는 우화고, 화두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대신 만나주기를 바랐다. 제사장, 레위인, 하나님을 대신 만나주는 전문집단이 생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하신 후에 다시 직접 만나는 길이 열린다. 승천하시면서 기다리라고 하신 그 성령님을 통해 자신 안에서 직접 만난다. 서로를 통해서도 서로 안에 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 또다시 중계인 그룹이 생겨난다. 사제, 신부, 수도자.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만인사제를 부르짖었지만, 다시 목사가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는가. 하나님 음성도 유명한 목사가 풀어줘야 은혜가 되는 분위기가 아닌가. 직접 듣고, 직접 만나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직접 만나 사랑을 나누시려는 하나님의 구애와 누군가 대신 만나주길 바라는 밀당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계속 된 것일까?

복음도, 믿음도 결국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경험이 핵심이다. 교리, 신학, 설교, 예배 등은 매개물일 뿐이다. 그 무엇도 하나님을 다 담을 수도 없고, 거룩한 어떤 것도 그 자체로 하나님일 수 없다. 전도도, 설교도, 섬김도 다 하나님을 경험케 하는 방편이다.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는 중매다.

눈치 빠른 매파는 적절할 때 자리를 비켜주는 법. 목사가, 중개자가, 브로커가 비켜서지 않으면 우상이 아닌가, 적그리스도가 아닌가. 직접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비켜서야만 한다. 불행히도 세상은 목사가 얼마나 불필요한지 이제 너무 잘 안다. 선생이 되려하지 말라는 주님 말씀대로, 스승이 되려하지 않는 참 스승이 절실한 때다. 불은 자신을 태우지 않고, 물은 자신을 적시지 않는다. 참 스승도 자신을 스승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드러나시도록 스스로 무용해지려할 뿐이다. 자신을 맑게 비워 하늘 뜻만 비추려는 삶이 절실하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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