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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삶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와 성찰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딤전 1:12~17)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19.07.10 00:36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가장 아끼는 제자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으로 되어 있는 디모데전서의 첫머리 가운데 일부입니다. 그 내용은 바울 자신의 회심에 관한 고백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전ㆍ후서가 과연 사도 바울의 친서인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바울의 친서라기보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계승한 후대 교회의 교훈을 담고 있는 서신이라는 게 일반적 통설입니다. 특별히 디모데전ㆍ후서는 교회가 조직화되어 가는 국면에서 조직화된 공동체로서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관심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급진적인 복음의 의미를 설파한 바울의 입장과 조직화된 교회의 질서에 대한 관심이 깊게 배인 이 서신은 분명히 그 성격을 달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신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가르친 것은 아니고 그 핵심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가 바울의 친서가 아니라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 또한 바울 자신의 직접적인 고백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는 가운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의 경우를 하나의 표본으로 삼아 깊은 교훈을 주고자 하는 뜻으로 기록된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말 그 자체로 이해하기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습니다. 따라서 표면상의 말뜻을 헤아리기보다는 이와 같이 고백하고 있는 당사자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 본문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기에 적절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자신의 고백이 아니라 사실은 후대의 제자가 그 심정을 헤아리며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교회의 시대에 사도 바울이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지 헤아려 보는 것이 본문말씀의 깊은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로서 임무를 맡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의 직분을 맡겨준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더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습니다.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에게 정반대의 임무를 감당하도록 맡겨주셨으니 더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바울은 자신이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사연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변명조의 해명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그가 이제 거꾸로 예수를 진정한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사도로서 임무를 맡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헌신하게 되었으니 놀라운 은혜요, 따라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여하여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른 길을 오도하는 태도,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태도, 심지어 물리적 폭력을 가하기까지 했던 태도에서 바뀌어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과 사랑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징표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뜻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누리는 믿음과 사랑을 뜻합니다. 그것은 신앙적 차원과 동시에 윤리적 차원을 함축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진정으로 세상의 구원을 선포하는 사도로서 임무를 맡은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변모된 것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정말 믿을 만한 말씀이고, 모든 사람이 마땅히 받아들일 만한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덧붙입니다. 15절 이하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죄인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자신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을 볼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끝까지 인내하시며 사람들이 바른 길로, 구원의 길로 돌아서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수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자신을 그렇게 변화시켰다고 역설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그것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 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장엄한 찬양사로 오늘 말씀을 맺고 있습니다.

▲ 과연 우리는 모르고 짓는 죄가 있을까요? ⓒGetty Image

이 교훈적이고 아름다운 고백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오늘 말씀에서 특별히 바울 자신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까닭을 밝히는 대목을 주목합니다.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그가 이제 거꾸로 예수를 진정한 그리스로 선포하게 되었다는 바로 그 대목에서 덧붙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고백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또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쟁점이 될 수 있는 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알지 못하고 한 것’이 죄가 되느냐, 아니면 변명의 여지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지가 죄가 되느냐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모르고 지은 죄’가 무거운지, ‘알고 지은 죄’가 무거운지로 바꿔 이해해도 좋습니다.

물론 여기서 무지란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옳고 그름을 판별해주는 진리 또는 어떤 척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맥락에서 볼 것 같으면 그 무지는 변명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때는 내가 알지 못하여 그렇게 했고, 그래서 자비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다’는 조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르고 죄를 지었다는 고백인 셈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이러한 고백을 하였을까요? 묘한 변명 같은 이런 고백은 바울의 친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태도입니다. 자신의 회심과 관련하여 친서에서 이런 식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경우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로마 1:20) 사람에게는 이미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 있으므로 그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를 댈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모르는 것 자체가 죄일 수 있고, 따라서 모르고 지은 죄가 엄중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울의 선포에서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알지 못하고 예언자의 말씀의 참뜻을 몰라 예수를 정죄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고 있습니다(사도 13:27). 몰라서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는 의미로 읽히는 대목입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가운데 어느 편이 과연 엄중할까요? 불교에서는 모르고 지은 죄를 엄중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무명’(無明) 곧 무지를 고통의 근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생각에 비추어보더라도 모르고 지은 죄가 무거울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보면서 생각하지 않은 것 자체가 죄라고 보았고 ‘악의 평범성’을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그와는 다른 입장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말씀처럼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는 견해가 곳곳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말씀은 누가복음이 전하고 있는,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보고 어떻게 기도하였습니까?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누가 23:34)

이러한 누가의 입장은 사실 사도행전에서 계속 확인됩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무지의 탓이었던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사도 3:17) 미묘하지만 몰라서 그랬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에서는 보다 분명하게 그 입장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했던 시대에는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17:30).

이상과 같은 말씀을 보면, 무지는 확실히 변명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따르면 ‘모르고 지은 죄’가 상대적으로 가벼운 반면 ‘알고 지은 죄’가 더 무겁다 할 것입니다. 현대의 사법체계에서도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해서는 정상을 참작해주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저지른 죄에 대해 정상을 참작하는 경우입니다.

이 시간 교리적으로 명확한 어떤 단선적인 결론을 내릴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어느 편이 우세했는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를 대립구도로 하는 논쟁이 제기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편이 공적인 견해로 채택되어 왔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힘의 우열을 전제로 하는 역학관계를 떠나 순전히 그 진정성을 헤아리자면,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자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받아들이자는 뜻이며, 동시에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더욱 폭넓게 받아들이자는 뜻입니다. 그 뜻을 헤아려, 굳이 판단하자면 ‘모르고 지은 죄’는 어느 정도 양해를 받을 수 있는 반면 ‘알고 지은 죄’는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확인하건대, 그것으로 최종 결론을 삼을 수는 없습니다. 서로 미묘하게 다른 그 입장들이 성서에 어째서 동시에 등장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우리는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모르고 지은 죄가 양해할 만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현실을 강조하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반면 모르고 지은 죄를 엄중히 대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서는 서로 다른 견해로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려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기록자마다 또한 어떤 국면에서마다 각각 그 강조점을 달리함으로써 인간 삶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와 성찰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제대로 대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뜻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몇 가지 단편적인 교리로 성서의 진실을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서의 말씀은 실로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이끕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 그것은 인간을 제대로 아는 것과 통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놀랍게도 우리 현실에서는 말씀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가 용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몇 가지 교리적 명제를 달달 외우는 것이 곧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호도되고 있습니다. 말씀의 깊은 뜻을 묻고자 하면 신앙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까지 합니다. 그런 풍토 가운데서 신앙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고, 따라서 삶 자체가 풍요로워질 수 없습니다.

더더욱 놀라운 일은 그렇게 교리적 명제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그 교리를 믿는 것과 실제 삶의 태도가 도무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윤리적 차원을 배제해버린 종교인들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실제 삶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업적을 강조하고 자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경우입니다. 구원을 값없이 누리고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 인간들의 삶의 관계 또한 그 믿음대로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텐데, 구원을 값없이 누린다는 사람들이 사람들 사이에 첩첩히 경계를 쌓고 자격을 논하고 업적과 기여를 논하는 일에 오히려 몰두합니다.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펼치는 데 선봉에 섭니다. 한국 교회 신앙인들의 기괴한 모습입니다.

오늘은 한 해의 절반을 보내고, 새로운 절반을 맞이하는 맥추감사절입니다. 그 절기를 기리는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가 거둔 열매를 확인하고, 그 열매를 누리게 된 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자는 데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나의 삶이 가능하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인지 돌아보고 감사하자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설령 거둔 열매가 빈약해 보인다 하더라도, 다시금 과연 내가 거둔 열매는 없는지, 내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그 어떤 것이 나에게 없는 것인지 생각해보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고자 하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을 아는 만큼 그 은혜를 나누기 위해 책임 있는 태도로 마땅히 내가 해야 할 바를 찾아 나서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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