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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내어주는 정치”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79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 승인 2019.07.10 00:39
“큰 원한을 풀어도 반드시 남은 원한이 있으니, 어찌 잘 했다고 할 수 있으랴? 이럼으로써 성인은 좌계(빚 문서)를 잡고서도 사람에게 독촉하지 않는다. 덕 있는 자는 빚 문서를 맡지만, 덕 없는 자는 거두어들인다.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으니 항상 잘한 사람(원한을 맺지 않는 사람)과 함께 한다.”
- 노자, 『도덕경』, 79장
和大怨 必有餘怨, 安可以爲善, 是以聖人執左(右)契, 而不責於人, 有德司契, 無德司徹, 天道無親, 常與善人

“契(계)는 나무를 잘라서 어음(권)을 만드는데 가운데를 잘라서 한 쪽을 갖는다. 합해서 신용을 나타낸다. 사람에게 재물을 얻는 것을 責이라고 한다. 계에는 좌우가 있는데, 좌계는 재물의 주인 쪽에 있고, 우계는 와서 재물을 얻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 노자익 오유청의 주

“우계는 땅을 빌려주는 사람이 가지는 문서이고, 좌계는 땅을 빌려 소출을 바치는 사람이 가지는 어음이다.”
- 오유청

“벼를 바치는 자는 우계를 잡는다.”
- 예기 곡례 상편

옛날에는 누가 빚을 낼 때 뭐를 얼마나 무슨 조건으로 빚진다, 어떻게 갚겠다 하고 나무에다 문서를 쓴 다음 그걸 두 쪽으로 나누어 物主(물주)가 왼쪽을 갖고 오른쪽을 빚진 자가 가졌다. 左契(좌계)는 차용증서, 빚 문서이다. 땅을 빌릴 때에는 좌우가 서로 바뀐다.

▲ 자신의 손해를 각오하고 여유로울 수 있을까. ⓒGetty Image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다고 한다. 하늘은 미리 예단하여 선택하지 않는다. 하늘은 선입견으로 사람을 가르고 구분 짓지 않는다. 하늘은 사람을 임의로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한다. 그리고 원을 품지 않는 사람, 원을 쌓지 않는 사람, 척을 짓지 않는 사람과 항상 함께 한다.

대장부 넓은 가슴에 원수 있고 친한 자 있을까
오늘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모두 전생의 인과로다
듣자니 옛날 옛적 석가모니 부처께서는
당신 해친 자를 먼저 건지셨다 하더라
- 추사 김정희

“예수님의 생애는 그것을 되새기는 자들을 소환합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행위였지만 우리를 관람석에 앉아 있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그는 이천년의 시간을 넘어서 오는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손을 잡아 이끌고 있습니다. 그의 고난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시대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몸부림 속에서 예수님은 문득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의 고난을 회상하는 자, 우리 시대의 고통받는 자들 속에서 그를 발견한 자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현실을 낯설게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분쟁과 갈등, 오만과 편견, 기만과 허위의 현실은 용인할 수 없는 것이며 십자가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적인 불의에 자기 자신이 가담하고 있거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분노와 절망은 정죄의 칼을 놓고 분열과 반목으로 반복되는 역사의 순환을 깨뜨리는 지혜를 구합니다. 그에게 이천년 전 고난당하셨던 이 세상의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회상하는 자는 결국 그분과 같이 일어나는 자이며, 이제 회상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자가 됩니다.”
- 도로테 죌레

덕이 있는 사람은 빌려주고 계를 잡고 기다리면서 사람을 책망하지 않는다. 덕이 없는 사람은 속히 빌려준 것을 거두어 들인다. 나라와 사직을 지키기 위해서 인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빌려준 것을 물어서 강제로 재산을 빼앗는 것과 같다.

덕이 있는 사람은 책망하지 않으니 원한이 일어나지 않는다. 착한 사람(원한이 일어나지 않게 잘 다스리는 사람)은 나라나 사직이 망하는 욕됨이라도 받아들여 백성을 괴롭히거나 자신의 호화로움을 구하지 않는 위정자이다.

재물이나 땅을 빌려주고 독촉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손해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그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자기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 생명을 위하여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의 태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죽임당함은 하느님이 함께 하기 때문에 부활의 희망을 품고 있다.

“예수님이 잡힌 겟세마니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골고다까지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받고 외면당한 자입니다. 땅 위에 세워져서 하늘을 향한 나무에 못 박힌 채로 매달려 있는 상황에서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습니다. 끝내는 하느님마저도 예수님을 버린 것 같습니다. 숨지기 직전 예수님의 고독은 절정에 달합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무심한 하늘은 그 절규를 삼켜버릴 뿐입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느님, 무와 같은 침묵, 하느님이 없는 것 같은 적막함, 철저하게 버림받았지만 고통을 감내하는 예수님만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임을 당했습니까?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죽임을 당했습니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사실관계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신앙고백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어떻게 따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 고백과 따름은 다시 죽음에서 삶으로 시간을 거슬러 반추해야 내 맘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삶 속에서 이루려고 했던 것이 바로 그 대답이 될 것입니다.
죽임 당함의 이유나 목적은 삶의 지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에 담겨 있는 것은 한마디로 해방입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용어로 구원입니다. 자유를 위한 해방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나 특정 집단만의 자유와 해방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해방과 자유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를 위한 해방을 이루는 길은 혁명입니다.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은 분명히 로마든 유대든 지배자들에게 죽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폭력이든 비폭력이든 저항했고 꾸짖고 폭로하였습니다. 폭력은 단순한 비폭력의 반대가 아니며, 비폭력은 단순한 폭력의 부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에 따라서 때로는 평화를 가르쳤고 때로는 갈등을 일으키며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해방자 예수”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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