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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의 결국은?(슥 4:1-14; 고전 12:1-11; 눅 17:5-10)성령강림후 다섯째주일(7월14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7.12 14:23

1. 교회의 직분

성령 강림절기 말씀은 교회의 탄생과 교회 공동체의 사명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러한 교회 공동체의 직분에 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한 공동체의 구성원은 여러 직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더가 있고, 협력자가 있고, 봉사자가 있습니다. 사실 영적 리더가 불안하면 공동체 전체가 흔들립니다. 사무엘 당시,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었던 엘리 제사장의 눈이 점점 어두워져 볼 수 없었습니다(삼상 3:1-2). 이렇게 영적 리더의 눈이 어두워지자, 이스라엘은 이방민족 블레셋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위기에 빠집니다.

그러나 신명기 마지막 장을 보면, 120세인 모세는 민족의 영적 지도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갈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의 눈이 죽을 때까지 밝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신 34:7). 사명을 감당하기 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 것입니다. 교회에도 영적 리더가 있고, 여러 은사와 직분과 사역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같은 성령으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직분을 감당함에 있어서 자랑하기 않고, 교만하기 않고, 결국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는 겸손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 세 본문 가운데 구약의 말씀은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회복을 위해 세운 두 지도자 스룹바벨 총독과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서신서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다양한 직분에 관한 소개입니다. 그리고 결론의 말씀으로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무익한 종’이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고백’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2. 두 감람나무, 정치적-종교적 지도자

먼저 구약의 말씀은 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를 소개합니다. 영적 리더가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죠? 구약본문 말씀은 바로 제 2성전을 세운 스룹바벨 유대 총독과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이야기입니다. 말씀의 배경은 스가랴서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지 16년이 지났는데도, 성전재건 공사는 완성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백성들이 자신들의 생업에 전념하느라 공사를 계속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가랴는 장래에 드러날 성전재건의 중요성을 일깨워줌으로 유대 백성들이 의욕적으로 성전 재건을 시작할 수 있도록 장려하였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 선지자보다 두 달 늦은 기원전 520년 8월부터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미래에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머물 것이기 때문에, 성전은 반드시 다시 세워져야 한다는 소명이 있었습니다. 스가랴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인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6장까지는 8가지 환상, 나머지 7~14장은 4가지 메시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8가지 환상을 정리해 볼까요? 서론과 본론 결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스가랴가 본 다섯 번째 환상입니다. 그것은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환상입니다. 먼저 순금 등잔대는 재건될 성전을, 두 감람나무는 총독 그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뜻합니다. 먼저 본문을 살펴볼까요?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슥 4:1).” 각 환상에는 천사가 등장합니다. 천사는 환상의 의미를 해설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스가랴에게 환상의 의미를 아느냐 묻기도 하고, 모른다고 하면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2-6)

성전을 재건하려는 스룹바벨에게 인간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 가능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앞서 첫 번째 환상이 서론, 여덟 번째 환상이 결론이고, 2-3, 4-5, 6-7번째 환상을 짝으로 구성하여 소개해 드렸는데, 그렇다면 다섯 번째 환상은 네 번째 환상과 연결이 되겠죠?

네 번째 환상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슥 3:2)’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큰 불이 난 것으로 비유해서, 포로생활 동안 신앙적 열심히 타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혹독한 포로생활 가운데 신앙을 간직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환상에서 스룹바벨 총독과 여호수아 제사장을 짝으로 만들어 새롭게 민족을 일으킬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호수아 제사장은 가나안 정착기의 여호수아와 이름이 같은 다른 인물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예루살렘 재건기에 스룹바벨과 더불어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슥 4:7-9)

이제는 스룹바벨에 대한 말씀입니다. 스룹바벨은 다윗 가문 출신 유대인으로 바벨론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벨론이 무너진 뒤,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고레스의 명으로 페르시아의 속주인 유대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의 영향을 받아 성전을 다시 지었으며,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다시 심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파견된 총독이자, 제1차 포로 귀환자요, 성전재건의 주역이었던 스룹바벨(זְרֻבָּבֶ֖ל)의 이름의 뜻은 역사적으로 매우 슬픈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씨’, 곧 바벨론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스룹바벨이라는 이름 속에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 대한 깊은 상처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룹바벨이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그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대 역전극이 펼쳐집니다. 슬픔의 자녀가 기쁨과 회복의 새로운 세상을 열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습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슥 4:10).” 다림줄은 성전 건축 때, 기둥이 수직으로 바로 섰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추를 달아서 늘어뜨리는 줄입니다. 스룹바벨을 들어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스가랴는 계속해서 천사에게 묻습니다.

“내가 그에게 물어 이르되, 등잔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다시 그에게 물어 이르되, 금 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니,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는지라.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슥 4:11-14)

곧, 스룹바벨 총독과 여호수아 대제사장, 정치 지도자와 신앙의 지도자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것을 의미합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고, 이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치, 종교 지도자가 연합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3. 교회의 직분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령의 은사에 관한 대원칙에 대한 설명입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는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는데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여러분이 이교도였을 때에는 헛된 우상에게 매여서 우상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일러둡니다마는,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받아라.’ 하고 욕할 수 없고 또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고전 12:1-3)

이방인으로 있을 때는 우상에게 매여 우상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녔지만, 그래서 “예수는 저주 받은 자!”라고 말하지만, 이제 성령을 받아서 성령에 매여 사는 사람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성령의 선물을 소개해 줍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그럼 성령의 선물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나요?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8-11)

이러한 다양한 은사로 교회공동체를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것, 하나님 나라의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제대로 된 성령 받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4.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그런데 오늘 복음서 말씀은 이렇게 영적 리더로 또한 성령의 은사를 통해 다양한 직분을 받은 이들이 교회를 세우더라도 결국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7-10)

그러나 제자들은 이 정도의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앞에 있는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와 제자의 길, 믿음의 힘에 대한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제자들은 믿음을 달라고 말합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5-16)

오늘 교회를 세우기 위해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겸손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5.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현실을 향한 인문학적 성찰을 담은 책인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시공사, 2013)에서 인문학자 김경집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탄생의 참된 의미도, 동방박사들과 목동들이 찾아온 이유도 전혀 모르는 청맹과니일 뿐이다. 그런 눈과 마음으로 아무리 복음서를 읽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억압받고 고통을 겪으며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이들이 조금이라도 제 목소리 내고 권리를 주장하면 사회를 교란시킨다느니 교묘하게 정치 세력화한다느니, 혹은 아예 빨갱이라느니 하면서 외면하고 억압하지는 않는지 꼼꼼하게 살펴봐야 한다. 심지어 교회마저 그런 못된 짓에 가담하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봐야 한다.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들이 사망하고 자살해도, 집과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 절규하고 옥상에서 뛰어내려도 눈 하나 깜빡거리지도 않는 냉혈한 우리에게 과연 아기 예수가 찾아올까? 아니, 설령 우리에게 찾아온다 해도 제대로 맞을 수나 있을까? 더 나아가, 그가 예수인지 알아보기는 할까?”

좀 더 구체적으로 김경집은 이렇게 말합니다. “흔히 가난 구제는 나라도 할 수 없다고들 말한다. 하물며 나 혼자 마음으로 그걸 할 수는 없다. 함께 모인 공동체도 감히 그걸 할 수 없다고 체념한다. 그러나 마음까지 그렇게 닫아둬서는 안 될 일이다. 적어도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통 받는 일이 있다면 그건 삼가고 꺼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좀 더 넓게 생각해보자. 나라도 구제할 수 없는 가난을 교회가 구제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 마음을 공유하고 실천하려 하는 게 진정한 믿음이다. 그래야 예수를 따른다고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한다. 나라도 하지 못하는 가난 구제라고? 아니, 교회니까 해야 한다. 그건 그저 쌀 몇 말 부어주고 라면 두어 상자 건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우리의 교회공동체가 그런 문제에 대해 단순히 선언적으로 말고 실천적으로 다가가본 적이 있는가? 내가 산 땅과 아파트가 쑥쑥 오르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큰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다면 기꺼이 그 혜택을 거부하고 정당한 만큼만 누리겠다는 약속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쉽지 않은 실천입니다. 오늘날 탐욕으로 점철된 교회와 성도들이 인문학자 김경집이 소개하는 길로 갈 수 있을까요? 인문학자의 눈을 통해 성서를 보니,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성서 해석을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눈을 가려 우상을 보도록 만들었음을 깨닫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통해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참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직분을 주신 참 뜻을 깨달아 하나님의 의와 뜻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다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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