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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쫓아내지 않았을까하나님의 근심(삿 10:15-16)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7.14 18:09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16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우선 사사기의 기본적인 틀거리를 이야기해드리고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사사기를 크게 도식화 시켜본다면, ‘이스라엘의 범죄 → 하나님의 심판 → 이스라엘의 간구 → 사사를 보내심 → 이스라엘의 구원’, 이 구조가 계속해서 순환합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시작 부분, 도입 부분은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저희가 신명기 역사서라고 부르는 장편의 역사책은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장편 역사서에서 여호수아는 2권, 사사기는 3권이 됩니다.

이상한 점이라는 것은 2권인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가 죽으면서 끝나는데, 3권 사시기는 여호수아가 살아있는 시점에서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여호수아의 마지막과 사사기의 시작이 겹친다는 점은 두 책이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를 보여주기도 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면 ‘꼭 그렇게 써야 했나?’라는 의문을 주기도 합니다.

새로운 책이 시작되면서 지난 이야기 줄거리를 적어주고 있는 것인지, 책의 연속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인지, 사사기는 여호수아와 동일한 이야기를 적으면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사실 사사기를 조금 꼼꼼하게 읽어보신 분이라면 뭔가 여호수아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쫓아내지 않은 이스라엘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령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 내용이 여호수아와 겹치는 부분인데, 특히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에 쫓아내지 못한 민족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여호수아만을 읽는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면서 그 족속의 일부를 미처 쫓아내지 못하였고, 결국 가나안 족속의 일부가 그들의 땅 한 편에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상하게 읽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사기에서 그 이야기만 모아놓은 부분을 읽어보면 뭔가 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사사기 1장 27-36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쫓아내지 못한 족속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 본문을 읽어가다보면, 몇몇 구절에서 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28절)”
“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30절)”
“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33절)”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35절)”

우리는 이 본문들 속에서 어렵지 않게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밑에서 노역을 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를 읽어냈다면 우리에게는 이런 의문이 생겨납니다. 이스라엘이 이들을 쫓아내지 ‘못한’게 아니라 ‘안한’ 것 아닌가? 자신들의 노예로 삼기 위해서 가나안 족속의 일부를 살려두고, 남겨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 이스라엘은 왜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았을까요. ⓒGetty Image

왜 우리 성경, 개역개정 성경에는 ‘못했다’고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히브리어 원어, 70인역 헬라어 성경, 영어, 일본어, 중국어 성경 전부 쫓아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을 전부 쫓아내지 ‘못한’게 아닙니다. 할 수 있었는데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노예로 삼기 위해서 일부를 남겨두었습니다.

그 결과가 2장 1-5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모두 쫓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결국 이스라엘의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이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범한 잘못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남겨진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뒤에 여호수아가 죽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던 세대가 모두 죽었다는 진술이 나오고, 2장 11절부터 이스라엘은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더욱 진노하시고 앞으로도 남겨진 족속들을 이스라엘에 남겨두어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법

예전에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법을 주셨고, 하나님 자신도 그 법체계 속으로 들어오셨기에 구약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장 큰 은혜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법이 되셨다는 점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미 법을 주셨기 때문에 그냥 화내시거나 그냥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아니, 하실 수 없습니다. 당신이 주신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반대의 경우, 복을 주시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신 사람은 ‘다스리는 자’인 ‘왕’이 아니라 ‘판결하는 자’인 ‘사사’였습니다.

가톨릭 성경에는 ‘판관’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의미가 조금 더 쉽게 와 닿는데, 우리 성경에는 ‘사사’라고 번역해 놓아서 조금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기는 합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고대 중국에서 법령과 형벌을 맡았던 재판관을 ‘사사(士師)’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도 중국어 성경에는 ‘사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과거 개역한글 성경이 중국어 성경을 번역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중국어 단어를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재판할 사람, 하나님의 법대로 이들의 잘잘못을 가릴 사람을 보내십니다. 사사기에 나타난 사사들의 모습이 대체적으로 이스라엘을 침략한 이방 족속들과 싸우는 장면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사사들이 마치 이순신 장군과 같은 사람들로 인식되기 쉽지만, 본래 사사는 재판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사기 2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세대, 출애굽 세대 이후 세대가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버렸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사, 재판관을 보내주셨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재판관을 보내셨음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2장 18절에 나타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법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하나님의 선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모르던 세대들에게 재판관을 보내시고, 하나님의 법을 알게 하시어 벌을 받지 않도록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선처입니다. 저는 이런 하나님, 먼저 자신의 법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에게 당신의 법을 지키라고 명하실 수 있다고 봅니다. 사사기는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 은혜

그런데 ‘입다’라는 사사의 이야기는 다른 사사들과 조금 다릅니다. 입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세우신 사사가 아닙니다. 나중에 사사로 인정되는 인물인데, 그의 이야기에 앞서 나오는 10장의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0장 5절에서 사사 야일이 죽고 난 후에, 6절부터 이스라엘은 또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의 신들과 블레셋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냥 주변국가의 모든 신을 다 섬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진노하십니다. 10절 이후에 이스라엘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이때는 하나님께서 평소와 다르게 대답하십니다. 13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다시는 이스라엘을 돕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해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사사를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던 사사기의 도식이 깨어지는 순간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말씀드리겠지만, 입다는 사사가 아니라 서자 출신으로 집에서 쫓겨나 불량배들과 함께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길르앗 사람들의 요구로 암몬 자손과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고 사사가 됩니다.

입다가 전쟁에 나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이방 족속에 의해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앞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들을 구원하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시고 그들에게 사사를 세우시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전과가 너무 많이 쌓였기 때문에 더 이상 선처해줄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다 이후로도 사사기의 ‘범죄 → 회개, 간구 → 사사 → 구원’이라는 도식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10장에서 깨어진 도식은 어떻게 다시 이어질 수 있었을까요?

그 가운데 오늘 본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은 후에 이방 신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시면서, 그들이 고난당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적혀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이 성경에 나타난 모든 은혜를 전하는 말씀들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셨다.’

하나님께서 고난당하고 있는 이들을 보시며, 아픔이 있는 이들을 보시며 마음에 근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본래 법은 감정대로 판결을 내릴 수 없습니다. 법은 냉정해야만 합니다. 잘못을 범하면 벌을 주고, 선한 일을 행하면 상을 받는 간단한 도식이 감정에 의해서 깨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법도 어기면 벌을 받게 됨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계처럼 잘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잘못한 이에게 벌을 주시고도 그들이 받는 고통으로 인해서 마음에 근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요나 4장 11절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모습과도 동일합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니느웨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적국이었고, 악한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근심하시며 그들의 회개를 불러일으킬 예언자를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우리가 고통당할 때에 우리를 위해 근심하시고 마음에 염려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근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결국 더 이상 그 무엇으로도 이 땅을 구원으로 이끌 수 없는 순간에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일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오늘 사사기는 하나님께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을 위해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말씀하시지만, 성경의 몇몇 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떠나버리시고 다시 돌아보지 않으셨던 인물들도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무엘상에 나타난 사울의 모습은 가장 좋은 예가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 경계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근심해주시고, 어떤 경우에는 결코 돌아보시지 않는 것일까? 그 대답이 오늘 본문에 있다고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자신들이 잘못을 범했음을 인정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벌이 내려졌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하나님이 벌 내리시는 일을 마땅히 받겠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벌 받는 일은 당연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 벌을 달게 받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하나님은 간구하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시기에, 그들의 부르짖음으로 인해 근심하셨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고백한대로 자신들의 잘못을 되돌립니다. 이방 신들을 제거하였으며, 이방 국가들에 의해 고난을 받는 중에도 오직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1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근심하셨습니다. 자신이 정하신 법의 테두리 속에서 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근심하셨습니다. 이들에게 어떻게 구원을 주실 수 있는지를 고민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걱정하시고 염려해주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뉘우친 대로 행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행하며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근심하시며 은혜를 내리십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시는 분들임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걱정하시며 근심해주시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은혜를 내리실지, 어떻게 복을 주실지,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실지를 늘 걱정하시고 근심하시는 대상들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께서는 세상의 일들로 인해서, 여러분의 삶으로 인해 근심하고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걱정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근심해주십니다. 당신 앞에서 간구하는 이들을 위해 근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줄 믿고 살아가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에“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해라’가 아닙니다. ‘내일이 염려하리라’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염려와 괴로움을 오늘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내일은 다가올 내일이 스스로 염려하리라. 저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염려하신다는 의미로 읽습니다. 그렇기에 앞서 나온 조건이 필요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쫓는 사람들의 내일은 하나님께서 염려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계신다면,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우리가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음을 늘 하나님께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기를 노력하고 간구하신다면, 하나님은 분명 여러분을 위해 근심하십니다.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근심하십니다. 가장 좋은 길로 이끄시기 위해 근심하십니다. 이 믿음을 굳게 붙드시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세상의 근심을 내려놓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평안과 은혜 속에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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