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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용납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7.15 17: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 24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는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그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랬더니 종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고 애원하였다. 27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다. 28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말하기를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 하였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였다.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34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35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복음 18:21~35/새번역)

수백억에 해당하는 빚은 탕감해 주셨으면서, 불쌍히 여기지 않는 마음은 왜 용서해주지 않으실까?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해주지 않는 판결이 마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찬찬히 묵상해보면 다르게 보입니다.

용서는 호흡과 같지 않을지. 하나님 주신 사랑을 마시고 용서를 내쉴 때, 영혼의 숨통이 트입니다. 사랑은 들숨이고 용서는 날숨이랄까. 하나님 주신 용서로 사랑을 한껏 들여 마실 때, 자연스럽게 타자를 용서하는 사랑을 내쉽니다. 들숨만 이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 받기만 하고 용서하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 Willy Verginer, “초현실주의 나무조각”

빚은 탕감 받았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은 모를 수 있습니다. 그저 위기를 모면한 정도로만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긍휼이 여겨주시는 사랑을 충분히 맛보지 못할 때, 하나님 거저 주신 용서를 받아 나눌 수 없습니다. 늘 값없이 주시는 용서를 받지 않는 형국입니다. 누리지 않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일러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런데 한없는 용서와 ‘죄 지은 형제에 대한 가르침’(마18:15~20)이 엇갈려 보입니다. 베드로가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여쭌 맥락입니다. 죄 지은 형제에게 우선 개인적으로 충고하고, 안 들으면 한두 사람 함께 가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 차원에서 충고하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세 번의 두 배가 넘는 일곱 번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 번 정도 단계별로 충고하고 안 되면, 세리나 이방인처럼 여기라고 하신 가르침과 모순처럼 보입니다. 세 차례의 충고와 한 없이 용서라니 모순이 아닙니까?

횟수와 중심의 문제, 용서와 용납의 문제가 떠오릅니다. 세 번, 일곱 번은 몇 번까지냐의 차원입니다. 용서하는 마음 없이 세 번, 일곱 번을 참을 수 있습니다. 한 번만 더 어겨봐라, 벼르고 벼르는 정죄일 수 있습니다. 중심에 사랑이 있다면, 세 번, 일곱 번을 말씀하셨어도 더 기회를 달라고 조르지 않을까요. 열매 없는 나무를 더 기다려 달라던 농부처럼. 긍휼히 여기는 중심은 몇 번까지냐에 갇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없는 용서가 무조건적인 용납은 아닙니다.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고, 자신도 장담할 수 없다고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지만, 그렇다고 다 용납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막아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픈 충고를 전하고, 그래도 안 되니 객관적인 의견을 전해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그것도 통하지 않으니 할 수 없이 교회 공동체의 도움을 받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막아야할 때가 분명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균형, 중심과 상황의 균형을 발견합니다. 한 없이 용서하는 마음의 지향과 그것을 실천하는 상황 사이의 균형입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난제가 남아있습니다. 문맥과 생각의 엉킴을 푼다 해도 그 명료함이 실천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죄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기도할 자격이나 있는지. 우선 받은 용서를 끊임없이 맛보아야겠습니다. 용서를 들이키고 사랑을 내쉬는 숨결에 의지해야겠습니다. 사랑을 들이키고 용서를 내쉬는 숨결부터 기도여야겠습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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