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못된 짓을 버리고 제 갈 길을 가다『다석 강의』 4강 풀이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9.07.16 19:16

본장은 세편의 한글 시로 구성되었다. 각기 1956년 10월 21, 23, 28일, 며칠 상간에 쓰여 졌던 것으로 인간의 잘못된 삶을 바로잡을 의도를 짙게 담았다. 이들 제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사ᄅᆞᆷ꼴 보인 글월’(人相圖), ‘젖은 눈물’, 그리고 ‘하늘 땅 서로 같히 달리’.

이 시점에서 다석이 연이어 사람이 짐승과 다르다 하며 인간의 잘못을 책한 것은 어떤 배경이 있는 듯싶다. 당시의 사람들에겐 이 글이 상황연관된 것이었기에 이해가 쉬울 수 있겠다. 하지만 이 글만 별도로 읽을 경우 작금의 현실에서 수용키 어려운 내용도 있다.

물론 인간 본연의 길을 적시하는 다석의 의도를 모르지 않으나 곳곳에 가부장적 흔적을 담은 탓이다. 그럼에도 본장은 특히 남녀(인간) 관계에 있어 바른 도(근본)를 알려주기에 최근 페미니즘 시각으로 비판, 폄하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 1 >

첫 시 ’사ᄅᆞᆷ꼴 보인 글월‘부터 살펴보겠다. 사람의 꼴(형태)를 보이는 편지라 이해할 수 있다.

지나간 노릇은 가슴알로 살 박어 입고 올골 뵘만 웋로 드러보이누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과거 행적(노릇)을 가슴이란 몸속에 새겨 놓고(服膺) 살아간다. 인간 몸은 무의식의 보고(寶庫)로서 무수한 삶의 기록 처인 것이다. 부끄러운 것도 의당 많을 수 있겠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옷을 입고 몸을 가리며 산다. 마치 봉투에 편지를 집어넣은 모양새(人相圖)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몸으로는 자랑할 것이 없다. 몸을 인간의 모든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삶의 기록을 담은 영혼의 옷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주인은 몸이 아니라 영혼일 것이다. 영혼의 옷에 다시 옷을 입히며 자신을 꾸며 치장하는 것이 인간의 실상이다. 그로써 거듭 자신의 부끄러움을 덮고자 한다. 그럼에도 얼굴만은 내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현존이다. 얼굴이 몸의 가장 위에 달린 것도 이 때문이다.

내안에 너 드러잇는 걸 보니 그윽히 곧히 졸를 대로 졸라 있구나

우리 몸속에 우리의 주인인 영혼이 마치 구슬이 ‘곧이곧게’ 줄맞쳐 꿰어있듯이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졸르다’는 아주 줄여서 작게 하다, 오므라들게 하다란 뜻을 갖는다. 한자어 축(縮)이 이에 해당된다. 즉 영혼이 몸속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이고 줄여진 상태로서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깜작새 배꼽코물 냅다 두젖 눈물 짜르르!

몸의 상태란 조석지간 변할 수밖에 없다. 이/저런 자극에도 몸 상태는 쉽게 변한다. 배꼽에서 코물이 난다는 것은 생식기의 달라진 모습(상태)을 말하는 것이겠다. 두 젖의 눈물 역시 감정의 요동으로 흘리는 눈물과 생식기가 배출하는 정액을 일컫는다. 걱정과 염려 그리고 정욕, 달리 말하면 탐진치가 젖의 숨은 뜻이겠다. 부정하려 들겠으나 이것이 인간 몸의 실상이기에 사람들은 옷으로 이런 몸을 감추려 한다. 옷매무새를 더욱 단단히 하고 화려하게 꾸미며 자기 몸을 조르며 산다.

하지만 아무리 그리해도 자기도 모른 사이에 젖 물은 다시 솟구친다. 이것이 바로 다석이 본 사람들의 인상, 곧 사람의 꼴이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몸의 가장 깊은 곳에 이런 삶의 행적을 숨겨놓는다. 그러나 그렇게 감춰 놓았더라도 어느 순간 죄다 새어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실상 아니던가?

젖먹고 자란 얼골에 두 눙물 못 맑아서

인간이란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런 젓의 결과물들이다. 이런 젓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낫고 삶을 영위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우리도 예외 없이 젓, 즉 눈물을 흘리고 정액을 배출하며 살아간다. 이런 삶은 아직 우리들 마음이 맑고 밝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우리들 눈물과 정액이 깨끗하지 못하는 뜻이다. 세상은 이런 젖 물로 가득 찬 연못이 되고 말았다.

코수건 혀가질만 뱁굽줄 피버쳐 새코마루 이룩이리

이런 삶을 고쳐내기 위해 사람들은 깨끗한 손수건으로 젓 물을 깨끗하게 닦고자 한다. 더러워진 손수건을 행궈 가면서까지 지저분한 것을 없애고자 했다. 불순한 흔적이 사라지면 몸이 깨끗해 질 수 있겠다. 이로부터 어머니로부터 잘린 태, 곧 배꼽에서 줄(뱁굽줄)이 다시 생겨나며 이를 통해 새로운 피가 흘러 새사람(새코마루)의 길이 열려졌다.

여기서 손수건이란 앞서 수차례 언급한대로 제도라 볼 수 있겠다. 충·신·습의 ‘習’에 해당될 것이고 禮를 적시한다고 봐도 좋을 듯싶다. 이때의 예는 그이(忠)와 말씀(信)과 다른 뜻이 아닐 것이다.

두 젖눈 뜨자 지는 물 젖난다고 ᄒᆞ더라

사람이 바뀌면 두 젖에서 새로운 물이 나올 수 있다. 이를 일컬어 진물이라고 한다. 지금껏 젖을 통해 존재했기에 우리들 역시 젖 물을 흘리며 살아왔으나 그 물이 이제는 맑아져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우리 몸에서 나오는 젖 물이 고통스런 눈물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인간에게 독립(獨立)의 길이 열린다. 제대로 된 삶이 시작되는 까닭이다. 과거에 있었던 출생은 결코 삶의 시작일 수 없다.

‘새코마루’의 새 인간 삶을 진정한 의미의 시작이라 할 것이다. 성서가 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피조물’이란 말이 이런 상태를 일컫는 것이겠다.

< 2 >

두 번째 시(시조) ’젓은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굳게 고디 곧게 따로서 다니든 이 드러누어 녹자고 나니 눈물

어느 시보다 쉽게 뜻풀이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은 곧이, 곧게 살아야 사람인 것을 역설하는 듯하다. 곧이곧게 남 따라 말고 스스로 굳게 서서(獨立) 자기 길을 가야 한다는 말이다. 3.1 독립선언 100주년을 맞는 올해 이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독립의 가장 근본적 뜻을 가르치는 까닭이다. 이제는 콧물, 눈물 흘리는 일 그만하고 ’새코마루‘(새사람)되어 삶을 다시 시작하라고 권한다.

하지만 이런 결심을 하고 살다가도 쉽게 자포자기하며 삶을 수수방관하며 처음상태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곧이곧게’란 말 일을 잊고서 죽음과도 같은 잠에 빠져 몸의 훈습을 좇아 살게 된다. 의식이 죽은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이’되기를 포기했기에 말씀도 중히 여기지 않고 제도도 경홀히 여기면서 욕망덩어리가 된 탓이다.

본연의 길에서 탈선한 실성(失性)한 인간들로 이 세상이 복잡하고 험난하다. 할 짓 못할 짓을 어릴 적 그 아비 세대들로부터 보고 자란 탓에 ‘님’(그이)을 마주할 이마를 포기했고 얼의 골짜기인 우리들 얼굴(골)을 철면피로 만들었다. 유일하게 머리를 하늘로 둔 채 태어난 존재이건만 그렇게 서 있을 수 없다며 땅에 등대로 누워 버린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금수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곧이곧게 서서 독립적으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 자기 정신을 둔화시켜 남들처럼 살고 있다. 이런 현실이고 보니 젖 물을 흘리지 않고 사는 이들을 도대체 찾을 수 없다.

쌀쌀히 차고 알알히 쌔히든 프른 시설 녹아지니 눈물

마음 따뜻한 사람이 좋긴 하나 때론 냉정함도 필요하다. 마음이 쌀쌀하다 못해 칼날처럼 새하얗게 될 경우도 필요하다. 희다 못해 푸른 기운이 감돌 수도 있겠다. 지극히 흰 것은 푸른 기운을 자신 속에 머금고 있다.

이는 인간 현실을 냉절하게 살피라는 충고를 적시하는 내용이라 할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흐르는 눈물이라야 맑을 수 있다. 남한다고 따라 하다가는 우리의 젓 물은 언제든 탁할 것이다.

눈마쳐 입더쳐노차 네 젓 진물 네 눈물

사람이, 더구나 남녀가 눈을 맞추게 되면 사단이 날 수 있다. 성적 욕망에 휘둘려 여성의 경우 임신의 고통, 곧 입덧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입맛이 덧난 것이 바로 입덧이다. 이로 인해 남녀 모두가 걱정하고 근심하게 된다.

이들을 키운 가정 역시 우환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눈에서 나는 젖 물, 곧 걱정과 근심은 생식기로부터 비롯한 젖 물로 인한 것이니 양자는 서로 다를 바 없다. 그렇기에 눈은 함부로 마치면 아니 된다. 그것이 짐승과 다른 인간 본연의 태도이다.

짐승은 자기 본성을 따라 하기에 그릇되지 않았으나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든 인간의 경우 실성(失性)할 때 그리한다. 맛을 좇고 뜻을 버린다면 인간은 금수와 조금도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한마디로 식색욕망에 빠지지 말아야 인간이다.

그렇기에 모르는 눈과 쉽게 마주치는 것을 피할 일이다. 禮를 지키고 제도를 따르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형식 없이는 내용도 부실해질 수 있는 탓이다. 마주쳐야 될 때와 장소가 있음을 명심해야겠다. 사람이 때의 주인 것을 잊으면 아니 될 것이다.

< 3 >

마지막 시조 ‘하늘 땅 처로 갇히 달리’ 한 편이 남았다. 이 시를 통해 다석은 하늘과 땅이 같은 것 같으나 서로 다른 것임을 생각하라고 교훈한다. 무한대로서 하늘은 땅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같이 있으나 또 따로 있다. 땅은 상대세계이지만 하늘은 절대 세계에 속한다. 하지만 땅에 사는 인간이 어찌 하늘에 속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늘이 땅이면서 땅이 아니라면 말이다.

불고 맨지고 안고 업고 품에 픔어 길럿서라

땅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부르고 만지며 안고 없으면서 자기 자식들을 길러 왔다. 하지만 자식이 커지면 그를 품에서 떼어 놓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옛 사람들은 어미젖에 빨간 약을 발라 자식으로부터 이격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나온 말이 다음 둘째 연이다.

인제는 진저리친다 대면 다친다 입도 손도 살도

자식이 자라 커지면 제자식일지라도 진저리를 치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어미젖과 몸에 손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자식을 낳기 만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잘 키워야 하는 까닭이다.

요즘은 혼인 않고서도 아이를 낳아 키우는 시대가 되었으나 다석에겐 눈과 입을 마구 맞춰 배꼽 줄(태)를 생기게 하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제도와 禮가 무너진 결과라 여겼으니 시대상과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맞출 ‘때’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저리를 치는 이유는 앞서 본대로 자식을 스스로 서게 할 목적에서이다. ‘따로’의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경우 ‘따로’가 땅에서 살되 하늘에 곡한 삶의 길이겠다.

때 따러 하늘 땅 달리 올타외다 되니라

하늘, 땅이 같으면서 다르듯이 같은 일이라도 ‘때’에 따른 것인지 여부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가 있는 것이다. 때에 맞으면 옳고 맞지 않으면 그른 것이 된다. 부모 자식이 처음에는 대양(大洋)적 일치감 속에서 존재하나 자식의 독립성을 위해 이격시키는 일도 바로 인간을 하늘로 고양시킬 목적에서이다.

우리들 정신은 결국 독립, 스스로 서는 데까지 이르러야만 한다. 이제껏 몰랐던 하느님을 절대로 아는 것이 바로 그런 길이다. 하느님은 피안에 있지 않다. 세상 속에서 세상 밖을 사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젓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다. 젓 진물, 눈물, 오줌 똥 싸는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씨(싻)를 터트릴 일이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