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짊어져야 할 고난많지 않거나 하나뿐인 주님의 일(암8:11-12; 골1:14-15, 19-20, 23-24; 눅10:38-42)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19.07.23 18:45

< 1 >

마르다와 마리아, 이 두 자매 이야기는 그리스도교 문학과 미술이 오랫동안 즐겨 채택한 모티브였지만 또한 많이 오해된 주제의 하나입니다.

후기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거장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 1518-1594)가 그린 ‘마르다와 마리아 집을 방문한 그리스도’라는 작품(1567년)에는 마르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예수님에게 무언가를 따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마르다는 음식 준비는 하지 않고 예수님과 이야기만 하고 있는 마리아를 보고 잔뜩 울화가 치밀어 있는 모습입니다. 바로크 시대 스페인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가 그린 같은 제목의 작품(1618년)도 불만스런 얼굴로 절구질을 하는 마르다를 그리고 있습니다. 언니 마르다를 뚱뚱하고 못생기고 심술궂은 천덕꾸러기 여인으로 그린 것이지요.

그와 반대로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매우 아름답고, 겸손하고, 명상적인 여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들떠서 바쁘게 움직이는 마르다와 달리 마리아는 ‘중요한 일이 뭔지를 알고, 부수적인 일은 포기할 줄 아는 현명한 여자’, ‘결단성이 있고, 비록 잠시 방탕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는 하나 주님을 알고 난 후부터는 오직 주님을 섬기는 일에만 열심이었던’ 여인, ‘존경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이 소유한 귀한 것을 아낌없이 바칠 줄 알았고, 사소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이렇게 대립적인 인간상으로 묘사하는 전통은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들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율법과 복음, 행위를 통한 구원과 말씀의 경청에서 오는 믿음을 통한 구원, 업적을 통한 칭의(稱義)와 믿음을 통한 칭의라는 대립적 상징으로 본 것이지요. 마르다는 활동적인 봉사의 삶을, 마리아는 명상적인 기도의 삶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마치 마르다는 행위를 강조하는 가톨릭교회를, 마리아는 말씀을 강조하는 개혁교회를 상징하는 것처럼 묘사한 것입니다.

▲ Jacopo Tintoretto, Jesus at the home of Martha and Mary ⓒWikipedia

그러나 16-17세기 미술작품에 등장하는 두 자매의 모습은 물론, 종교개혁자들의 해석도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마르다는 매우 적극적인 믿음의 여인입니다. 예수님의 친구이자 오빠였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요 11,1-2), 마르다는 베다니 마을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맞으러 밖으로 나가,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이라도 주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요 11,21-23)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을 신뢰한 믿음의 여인입니다. 마르다는 또한 아픈 오빠와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혀 고통 받은 여동생 마리아를(눅 8,2) 돌보면서 온 가족의 생활을 책임질 정도로 생활력이 강하고 동생을 지극히 사랑하는 여인입니다. 게다가 기쁜 마음으로 그 많은 손님들을 즐겨 대접하는 여인이지요.

그런데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마르다의 초대를 받았는데, 열심히 손님 접대를 준비하는 마르다가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던 동생 마리아를 보고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해하기 어렵지요?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하게 땀 흘리면서 일하는 마르다를 예수님이 비난하고,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예수님 발 곁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기만 하는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은 상당한 편애, 혹은 차별처럼 들려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마르다를 비난하고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일까요? 마르다는 자기를 돕지 않는 동생이 원망스러워서 그랬을까요? 종교개혁자들이 해석한 것처럼, 행동보다는 기도를, 봉사보다는 명상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셨기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만일 우리가 누가복음에 전승된 이 이야기를 그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서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의 비밀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자기 혼자서 땀을 흘리며 분주한 데 동생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것이 못마땅해서 불평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오랫동안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혀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동생이었습니다(눅 8,2). 그런 동생이 자기를 돕지 않는다고 화를 낼 언니 마르다가 아닙니다.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동생이 자기를 돕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주님의 바로 발 곁에 앉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선생의 발 곁에는 오직 첫 번째 남자 제자만이 앉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남자 제자는 물론이지만 더욱이 여자가 랍비의 발 곁에 앉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어느 랍비도 여자가 자기 발 곁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발 곁에 앉는 것을 허락하신 예수님의 태도도 파격적이었지만, 유대 전통을 파괴하는 충격적인 마리아의 행동에 마르다가 놀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순간에,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의 태도도 폄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마르다와 조용하고 소극적인 마리아의 태도를 대립시키거나, 행동과 믿음, 봉사와 예배를 분리하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누구도 자신의 행동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특정한 규정, 곧 선생의 발 곁에 오직 남자 제자만 앉을 수 있다는 전통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마리아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당시의 관습에 의해 변두리로 밀려난 여인입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눅 8,2), 스스로의 힘으로는 독립할 수도 없을 만큼 허약하고 사람들의 편견과 곱지 않은 시선에 시달린 여인이었지만,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과 함께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을 섬긴 여인입니다(눅 8,3). 예수님은 마리아를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그것은 지금 마리아가 말씀을 듣는 더 중요하고 올바른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약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봉사와 기도, 헌신과 말씀 듣기는 사실 동전의 앞뒤처럼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활동적인 봉사도 기도고, 관상적인 기도도 봉사입니다. 정교회에서는 그래서 봉사는 ‘예배 후 예배’라고 한 것입니다. 나이가 많다고, 병으로 누워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가족에게 폐만 끼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누워만 있다고 왜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이 없겠습니까?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일, 무엇으로도 빼앗길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이지요.

< 2 >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들떠 있는 때가 많습니다. 이것도 해야지, 저것도 해야지, 그런데 시간은 없지, 마음과 몸이 한없이 바쁘고 쫓기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이 밀려오는 일들과 염려에 떠밀려가는 것이 인생인지 모릅니다. 마음을 독하게 잡지 않으면, 우리가 참으로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아니, 무엇이 먼저 해야 할 일이고, 본질적인 일인지조차 판단할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일로 들떠 있어 참으로 들어야 할 말씀을 듣지 못해 망한 백성, 수많은 우상들을 섬기면서 한 분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 망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북 왕국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주전 760년 경, 유다 사막의 경계 지역에 있는 드고아 출신의 목자인 아모스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남 왕국 유다는 웃시야 왕(주전 784년-746년)이, 북 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주전 787년-746년). 아모스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목자였는데, 주님께서 그가 양떼를 몰던 곳에서 붙잡아 내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가서 예언하라는 피할 수 없는 명령에 다만 순종한 평범한 사람입니다(암 7,14-15).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 불가항력적인 권능을 가지고 자신의 삶에 개입하여, 그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변화시키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모스로 하여금, 지금까지 해 오던 모든 일을 버리고, 오직 하나의 일, 곧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일, 자기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파멸을 선포해야 하는 예언자의 삶에로 이끈 것이지요.

아모스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북 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842년에 세워진 예후 왕조의 마지막 왕,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면서 가장 큰 번영과 안정을 누리던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번영과 안정은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이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약화된 것과 남 왕국 유다와의 관계가 평화로웠고, 요단 동편으로의 영토 확장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군사적 성공과 함께 성취된 경제적 부흥은 우상숭배와 사회적 양극화, 부정부패의 심화로 이끌었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층은 ‘주의 율법을 업신여기며, 주의 율례를 지키지 않고, 거짓 신들에게 홀려서 그릇된 길로 들어섰습니다.’(암 2,4). 그들은 ‘공의를 쓰디쓴 소태처럼 만들며, 정의를 땅바닥에 팽개쳤습니다.’(암 5,7; 암 6,12). ‘법정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말하는 사람을 싫어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그들에게서 곡물세를 착취하며, 의로운 사람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법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였습니다.’(암 5,10-12).

심지어는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습니다. 전당으로 잡은 옷을 제단 옆에 펴놓고, 그 위에 눕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곤 하였습니다.’(암 2,6-8). 예언자 아모스는 이런 지도층 인사들을 ‘상아침상에 누우며 안락의자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골라 잡은 어린 양 요리를 먹고, 우리에서 송아지를 골라 잡아먹으면서,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흥얼대며, 다윗이나 된 것처럼 악기들을 만들어 내는 자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며, 가장 좋은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의 집이 망하는 것은 걱정도 하지 않는 자들,’(암 6,4-6)이라고 규탄합니다.

고위층이 부패하면, 나라걱정을 하지 않는 법이니, 백성인들 다르겠습니까! 그들도 ‘되는 줄이고, 추는 늘이면서, 가짜 저울로 속이고’, ‘신 한 켤레 값으로 빈궁한 사람들을 사고, 찌꺼기 밀까지도 팔아넘깁니다.’(암 8,5-6). 때가 악하니 신중한 사람들도 입을 다물고(암 5,13), 백성은 사마리아의 부끄러운 우상들을 의지합니다(암 8,14).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연 재앙으로, 나라의 멸망으로 구체화됩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이스라엘 민족의 파멸 원인을 단지 사회적 부정의에서만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찾지 않은데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그래서 선포합니다: ‘나 주가 이스라엘 가문에 선고한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산다.’(암 5,4-6).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밥이 없어서 사람들이 배고프고, 물이 없어서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굶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것이 예언자 아모스의 시대적 증언입니다(암 8,11).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시대라고 다를까요? 우리도 물질적 풍요의 대양에 떠있는 정신적 빈곤의 섬 위에 살고 있습니다. 오직 부자 되는 것이 잘 사는 삶의 목적이 된 세상에서, 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마음은 들 떠 있지만, 이것이 과연 진짜 잘 사는 것인지 회의가 솟구쳐 올 때가 있지요. 개인적으로는 죽음이, 국가적으로는 파멸이, 지구적으로는 기후위기가 가까이 올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 잘 사는 삶인지 묻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많지 않거나 하나뿐인 주님의 일’이 무엇인지 묻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고,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할지’ 묻게 됩니다(마 6,25-34).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어떤 삶이 주님의 뜻에 부합하고,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인지 묻게 됩니다.

< 3 >

우리 사회는 해야 할 일들이 많고 바쁜 것이 좋고, 가능한 소득이 높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가치가 많은 일과 소득에 의해 측정되는 세상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더 이상 수익이 보장된 번번한 직업이 없거나, 나이가 들어서 모든 공적인 일에서 퇴임한 어르신들, 특히 병으로 고통 받고 누워있는 있는 일 외에는 돈벌이 되는 일이 없는 이들의 삶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할 일이 없다고 해서 인생이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고, 수익과 결부되지 않는 일이라고 다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병으로 누워있으면서도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일이 아니라, 단 하나의 일이라도 주님의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초대교회에서 많지 않거나 하나뿐인 주님의 일은 ‘평화와 화해’라고 사도 바울은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이신데(골 1,15), 하나님은 그 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키셨다는 것입니다(골 1,20).

평화는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지고, 화해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일꾼이 된 그리스도인은 화해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신으로 채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골 1,24).

사도 바울은 선교하면서 수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유대사람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로 맞은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었습니다.’(고후 11,23-27). 사도 바울은 그의 몸에 남은 상처 자국을 자기 육신으로 채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이해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짊어져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직 이 세상에서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성령으로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 사이의 평화와 화해, 이웃 나라들과의 평화와 화해, 자연과의 평화와 화해, 하나님과의 평화와 화해, 이것이 우리 시대, 우리가 해야 할, ‘많지 않거나 하나뿐인 주님의 일’입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좋은 몫, 무엇에 의해서도 빼앗기지 않을 하나뿐인 주님의 일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