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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정신의 삶’(vita contemplativa)과 양명의 ‘치량지’(致良知) (2)한나 아렌트의 탄생성(natality)의 교육학과 왕양명의 치량지(致良知) (4)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 승인 2019.07.24 19:29

아렌트의 ‘판단력’(judging)과 양명의 ‘양지’(良知)

지난 편에서 아렌트와 양명이 인간 정신의 ‘판단력’과 ‘양지’를 발견하기까지 어떠한 고통  속에서 인간 공동체적 삶의 난점을 치유하기 위해서 씨름했는지를 보았다. 그때까지 이들은 모두 인간의 활동적 삶(vita activa/心)과 행위(action/行)에 관심하면서 인간 정신의 의지(willing/意)에 희망을 걸었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다시 그 인간 의지의 신뢰된 행위능력이란 항상 실망을 가져올 수 있음을 보았다.

이렇게 해서 우주적 비관주의가 자리를 잡고, 악의 절대성과 근본성이 드높게 주창되어질 때 그러나 그들은 그 상황 속에서 또 다시 한번 새롭게 우주적 비관주의를 실천적으로 극복할 대안을 발견한다. 그것은 인간 정신과 心의 의지에서 한 단계 더 깊이 내려가서 그 의지를 더욱 기초적으로 발동시키는 선천적인 직관력으로서의 ‘양지’ 또는 ‘판단력’을 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판단력과 양지란 인간 의지가 지향하는 바의 대상을 제공해 주고, 그것을 통해서 ‘객관’과 ‘세상’을 다시 주관과 인간의 조건으로 인식하도록 함으로써 참된 도덕성과 간주간성(intersubjectivity)의 기원이 되는 것임을 파악한 것을 말한다.

“악은 절대로 근본적(radical)이지 않고 다만 극단적(extreme)일 뿐이라는 것과, 그것은 어떤 깊이도 악마적인 차원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참으로 나의 의견입니다. 그 악은 번창할 수 있고 세상을 황폐화시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표면의 곰팡이처럼 퍼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고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thought-defying)입니다. 왜냐하면 사고란 어떤 깊이에 도달하고 근본에 이르려고 하는 것인데, 악과 관련해서는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there is nothing) 사고는 매우 당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악의 ‘평범성’입니다. 오직 선만이 깊이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근본적일 수 있습니다.(Only the good has depth and can be radical)”(1)

 

“성인의 (양)지는 맑은 하늘의 해와 같고, 현인의 것은 뜬구름이 낀 하늘의 해와 같으며, 어리석은 사람의 것은 어둡고 음산한 날의 것과 같다. 비록 밝고 어두움에 있어서는 서로 같지 않지만, 그들 모두가 다 검고 흰 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비록 캄캄한 밤중이라 하더라도 어렴풋하나마 검고 흰 것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은, 해의 남은 빛이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곤경에 처해 배우고 공부하는 일이란 바로 이 빛의 흔적을 따라 그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일을 자세히 살피는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2)

이상에서 밝힌 것처럼 행위의 원천이었던 의지, 그렇다면 그 의지를 그보다 앞서서 작동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아렌트와 양명 모두에게 그것은 대상에 대한 ‘인식’(知)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아렌트는 그녀의 『정신의 삶』에서 “(인간) 정신적 활동에서 의심할 여지없는 ‘보는 것’의 우선성”(the unquestioned priority of vision for mental activities)에 대해서 말하고, “현상적 세계의 절대적 우위성”(the absolute primacy of the world of appearances)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것은 그녀가 인간의 정치적 삶에서 어떻게 ‘사실적 진리’(factual truth)가 인간 공동의 삶에서 기초적 진실이 되는지를 밝혀주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3) 양명도 다음의 구절 속에서 인간의 몸과 정신, 판단력, 의지, 행위가 어떻게 서로 상관되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마음(心)은 몸의 주재이다. 그리고 그 마음의 텅 비어 있으면서도 밝게 깨닫는 것이 본연의 양지이다. 그 텅 비어 있으면서도 밝게 깨달은 양지가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이 뜻(意)이다. 앎(知)이 있은 연후에야 뜻이 있는 것이다. 앎이 없으면 뜻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앎이란 뜻의 본체가 아니겠는가?”(4)

아렌트에게서의 악의 평범성

아렌트는 그녀의 아이히만 경험에서 인간의 악한 행위가 ‘의도’(volition)나 ‘지능’(intelligence) 여부에 상관없이 ‘생각 없음’(thoughtlessness, the absence of thinking)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아이히만이 전혀 “바보스럽지”(stupid) 않았다는 것을 통해서, 아렌트는, 이 생각 없음을 칸트의 ‘사고(성찰)하는 능력’(the faculty of thinking/Vernunft(reason))과 ‘인지하는 능력’(the faculty of cognition/ Verstand(intellect)) 사이의 구분을 따라서 먼저 “의미를 찾는 물음”(the quest for meaning), 사실적 진리(truth)가 아닌 의미(meaning)을 찾는 생각하는 능력(reasoning)의 부재로 해석한다.(5) 사고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지(cognition)나 지능(intellect)이 가르쳐주는 사실적 진리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그 속에 담긴 뜻(meaning)을 찾는 행위라고 하는데, 이 뜻을 찾는 행위, 다른 말로 하면 사물과 일에서 무엇이 진정한 것인지를 가려내는 행위가 사유의 핵심으로 이해된다.

▲ 독일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Getty Image

그런 의미에서 아렌트의 사유에의 집중은 먼저 인간의 도덕적인 앎과 판단 능력에로 향해지고, 칸트에게서의 ‘실천이성’이나 ‘양심’(conscience)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서 탐구된다. 아렌트에 의하면 “(우리의) 생각하는 자아는 참으로 칸트가 말한 ‘물자체’ 이다.”(6) 이것은 그러나 단순한 ‘나’(self)가 아닌 “활동자체”(sheer activity)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고(ageless), 性의 구별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며(sexless),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보이는 것으로부터 무엇이 진정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구별하는 “사고활동(activity of thinking)의 경험이야말로 (참된) ‘영성’에 대한 우리 이해의 원초적 기원(the aboriginal source of our notion of spirituality)이 되는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한다.(7)

양명의 양지와 맹자의 성선(性善)

이러한 인간 사고의 핵심에 대한 이해가 양명에게서는 훨씬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으로 나타난다. 맹자의 유명한 이야기, 한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중의 이익이나 칭찬 등에 대한 고려 없이 즉각적으로 그 아이를 구하려고 뛰어들 것이라는 이야기에서 인간 본성의 본래적 선함과 능력을 서술하기 위해 쓰였던 ‘양지’(선한 지식)와 ‘양능’(선한 능력) 개념을 양명은 마치 신의 계시처럼 떠올리면서, 그 자신이 인간 마음의 천리로서 파악한 것의 가장 적절한 이름으로 발견한다. 양명은 그것을 우리 마음의 “도”(the Way)로서, 마음의 “영단”(靈丹)으로서, 마치 항해자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지남침”(指南針)과 “시금석”(試金石)으로서 파악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양지야말로 너 자신의 준칙이 되는 것이다. 만일 네 뜻에 품고 있는 일이 옳으면, 그것이 옳다고 알고, 그르면 그르다고 앎으로써 조금도 속여 넘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속이려들지 말고, 다만 하나하나 그것에 따라서 행동하면 선은 곧 보존되고 악은 곧 제거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가 되면 얼마나 안전 되고 또한 기쁘겠느냐? 이것이 바로 ‘격물’의 참된 묘결이며, ‘앎에 이르는’(致知) 참된 효과인 것이다.”(8)

아렌트(칸트)의 미감적 판단력과 양명에게서의 칠정(七情)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칸트는 인간의 정신적 삶에서 의지와 더욱 연관되는 ‘실천이성’이란 특수를 이미 주어져 있는 보편(규칙이나 원리, 법칙)에 관련시키는 ‘규범적’(regulative) 인식작용인데 반해서, ‘판단력’이란 오직 특수만이 주어져 있고, 그 특수에 대해서 보편을 찾아내야 하는 ‘반성적’(reflexive) 인식작용임을 밝혀주었다.(9)

이것은 인간의 인식 활동을 더욱 더 그 직접적인 출발에서부터 이해하려는 시도인데, 칸트에 따르면 이 개별적인 대상의 직접적인 파악에 있어서도 인간은 본래부터 선험적인 인식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란 대표적으로 미감적 판단력의 ‘합목적성’의 구조라고 한다. 일명 ‘취미판단’(the faculty of taste)으로도 불리어지는 이 직접적이고도, 직관 반성적이고, 실천이성보다도 훨씬 더 활동적인-왜냐하면 매 순간의 개별대상에 대한 즉각적인 판단이므로-판단력에 대해서 아렌트는 매우 주목한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실천이성에 대한 신뢰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인간 공동생활을 위한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즉, (미감적) 판단력의 정치적 속성을 알아낸 것을 말한다.

이 ‘판단력비판’을 양명의 유교적인 맥락에서 보면 ‘칠정’(七情/ 憙, 怒, 哀, 樂, 愛, 惡, 欲)에 대한 검토와 다르지 않다. 칸트의 판단력비판이 주로 인간적 쾌/불쾌 감정의 출현에 관한 탐구이라면, 유교적 성인지도(聖人之道, To become a sage)의 공부는 우리 마음의 칠정(일곱가지 감정)이 어떤 대상에 의해서 촉발되었을 때 어떻게 그 감정이 정도에 맞게 순수하게 발현되고, 자연스럽게 ‘사단’(四端, four beginnings of virtue)으로 연결되어 도덕적 행위가 나올 수 있을까라는 탐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판단력비판’이나 ‘사단칠정론’의 논의는 모두 바로 인간 인식의 기초점(감정)을 잘 다듬어서 올바른 선택을 통해 행위(실천이성)가 가능해지도록 하겠는가의 노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양명은 인간의 양지란 ‘知’(사고)이기도 하지만, ‘감정’(好惡)으로도 표현되며, 우리 마음의 본체를 ‘기쁨’(樂)이나 ‘즐거움’(憙)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말하기를, “양지란 옳고 그름을 아는 것과 다르지 않고, 그 옳고 그름을 안다는 것은 (옳은 것을) 좋아하고 (그른 것을) 싫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옳은 것을) 좋아하고 (그른 것을) 싫어하는 것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며,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은 모든 일과 그들의 변화를 포괄하는 것이다.”(10)

그는 또 말하기를,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좋아함, 싫어함, 욕구하는 것을 ‘일곱 가지 감정’(七情)이라고 한다. 그 일곱 가지 감정이란 모두 사람의 마음에는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양지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한다. ... ‘일곱 가지 감정’도 그 자연스러운 운행을 따르기만 하면 모두가 양지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선과 악을 구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안된다. ‘일곱 가지 감정’에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욕망이라 부를 수 있으며, 모두 양지를 가리는 것이 된다.”(11)고 밝힌다.

판단력과 양지의 다면적 성격

이 인용문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양지의 작용에는 대상에 대한 ‘감각들’(senses)이 들어가고, ‘감정’(love/hate, feelings)으로도 표현되며, 그것이 다시 행위를 위한 ‘판단’(judging)이 되는 것처럼, 아렌트가 주목하는 (미감적) 판단력에서도 이러한 다면적인 인식작용들이 모두 포괄되어 있다.(12) 결국 아렌트와 양명은 이러한 ‘미감적 판단력’과 ‘양지’에 주목함으로써 인간 행위의 뿌리와 인식의 출발점에 내려가서 인간 공동체의 삶을 치유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行이 가능해지고, 지행합일이 가능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찾기를 원한 것이다.

아렌트는 칸트가 인간의 판단력을 인간 감각 중 가장 내밀하고, 즉각적인 선호가 나오는 ‘미각’(taste)과 관계시킨 것에 주목한다. 인간의 ‘오각’(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중에서도 그 감각의 반응이 가장 개인적이고(private), 즉각적이며(immediate), 압도적이어서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미각’(taste)을 들어서, 그는 인간의 판단이란 그렇게 각 개별자에 대해서 각 개인별로 고유하며, 또한 이 미각과의 유비를 통해서 인간의 판단능력이 누구에게나 선험적으로 직관과 같은 능력으로 내재해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한다.(13) 양명도 양지를 우리 마음의 본체로서 누구에게나 천리로서 작용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미주

(미주 1) The Arendt-Scholem Exchange, Elisabeth Young-Bruehl, Hannah Arendt for Love of the World,(New He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82), 369에서 재인용.
(미주 2) 『傳習錄』下 289조, “聖人之知,如靑天之日,賢人如浮雲天日,愚人如陰? 天日,雖有昏明不同,其能辨黑白則一。雖昏黑夜裏,亦影影見得黑白,就是日之餘光未盡處。因學功夫,亦只從這點明處精察去耳。”
(미주 3) Hannah Arendt, ‘Truth and Politics’, (New York: Penguin book, 1993), 227-264.
(미주 4) 『傳習錄』中 137조 “心者,身之主也,而心之虛靈明覺,卽所謂本然之良知也。其虛靈明覺之良知, 應感而動者,謂之意。有知而後有意,無知則無意矣。知非意之體乎?”
(미주 5) Hannah Arendt, The Life of the Mind, One-Volume Edition (San Diego, New York and London: HBJ Book,  1978), One/Thinking, 15.
(미주 6) Ibid., 42.
(미주 7) Ibid., 44.
(미주 8) 『傳習錄』下 205조 “爾那一點良知,是爾自家底準則。爾意念著扈,他是便知是,非便知非,更瞞地一些不得。爾只不要欺他,實實落落, 依著他做去,善便存,惡便去,他這裡何等穩當快樂? 此便是『格物』的眞訣,『致知』的實功。”
(미주 9) I. 칸트, 『판단력비판』, 이석윤 역 (서울: 박영사 2003), 31.
(미주 10) 『傳習錄』 下 288조 “良知只是箇是非之心.. 是非只是箇好惡,只好惡就盡了是非,只是非就盡了萬事萬變。”; Instruction for Practical Living and other Neo-Confucian Writings, trans. by Wing-tsit Chan, Columbia University Press, 28 참조.
(미주 11) 『傳習錄』下 290조 “喜、怒、哀、懼、愛、惡、欲,謂之七情,七者俱是人心台有的. 但要認得良知明白。... 七情順其自然之流行,皆是良知之用,不可分別善惡. 但不可有所著。七情有著,俱謂之欲,俱爲良知之蔽。”
(미주 12) 한나 아렌트, 『칸트 정치철학 강의』, 김선욱 옮김(서울: 푸른숲 2000), 14.
(미주 13) Hannah Arendt, The Life of the Mind, Two/Willing, Appendix/Judging, p. 264.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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