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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노동자 블랙리스트,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다젊은 노동운동가들의 노동운동 시작
김정택 목사 | 승인 2019.07.27 19:16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이하, 산선)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대, 젊은 세대가 끌고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내가 34세이고 양승조는 나와 나이가 같았다. 박일성은 32세다.

기독청년 젊은 노동운동가들의 합류

여기에 이민우가 가세했다. 민우는 29세다. 민우는 인천 예장교회 출신으로 인천 민주화사건으로 감옥에 갔다와서는  황주석 선배가 YH사건을 지원한 후 YH노동조합지부장 최순영 씨와 결혼했듯이 민우는 원풍모방노조 탄압대책위 간사로 활동하다 원풍노조 임원과 결혼을 했다.

마침 기독청년운동 출신들도 상당수가 노동현장으로 투신하고 있어 이들을 지원할 필요가 있었다. 이 임무 수행에는 이민우가 아주 적절했다. 우리들은 가끔씩 회의를 했지만 합법과 공개활동이 어려운 시기임을 감안하여 사람이름과 자세한 활동을 공유하는 것은 배제하였다.

양승조는 인맥으로 노출을 만나가고 있었다면 박일성은 동암노동자료실을 근거지로 하여 학출들과 교접하고 있었다. 그러한 활동과정에서 산선이 지원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지원책만 다루었다. 산선 건물에서는 조화순 목사가 있을 때부터 노동자들에게는 숙식이 무료로 제공되었다.

하기야 무료라는 말은 적절치 않을 수도 있다. 그냥 식구들이 찾아오고 쉬고 알아서 식사하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생활화되었다고나 할까? 해고되거나 아직은 직장에 못들어간 노동자들은 모이고 직장을 다니게 되면 흩어지곤 하였다.

전두환 정권의 블랙리스트가 드러나다

그런데 부평4공단 태평특수섬유에 다니던 동일방직해고자 김용자, 김옥섭이 다른 노동자와 함께 4인이 83년 10월20일자로 해고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김용자는 조화순 목사가 대단한 노동자라고 하도 얘기해서 어느 정도는 경력과 품성을 알고는 있었다.

용자는 너무나 책임감이 강해, 학출 활동가들은 저리가라야. 노동자를 조직하려고 6번이나 해고되면서도 끈질기게 현장엘 들어갔어. 버스안내양, 봉제공장시다, 합판공장 안 해본 게 없는 애야. 용자 손이 거쳐가면 방이니 그릇이니 깨끗해.

대단해 하고 그토록 칭찬을 했었다. 용자와 옥섭이는 해고가 부당함을 호소문까지 작성하여 뿌리면서 활동했다. 이번 해고가 회사와의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전두환 정권이 작성해 배포한 블랙리스트에 의한 해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 이어서 안순애, 서기화, 신정희 등도 해고 되었다. 이들도 자신들이 특별히 회사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어 해고된 것이 아니라 전에 민주노조활동을 했거나 학출이기 때문에 해고된 것을 알았다.

안순애에 대해서도 조 목사에게서 많은 얘기를 들었다.

안순애는 노동자라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 학출을 우습게 알어. 논리가 분명한게 지식인 저리 가라야.

신정희는 공덕감리교회 출신으로 기독청년운동을 통해 하나님 선교신학, 민중신학, 해방신학으로 세례를 받은 친구다. 대학출신이기도 하지만 붙임성이 있고 활달하고 투쟁력도 있어 동일방직해고자들과 잘 어울렸다. 이들 6인은 이때부터 인천산선에서 숙식을  하며 투쟁기획을 하고 여러가지 물품들을 준비했다.

인천 산선은 이들의 투쟁에 대한 지원을 하기로 하고 민우와 내가 전적으로 달라붙었다. 6인은 1983년 12월15일부터 노동부 인천지방사무소에서 복직과 블랙리스트 철폐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농성하면서 단식으로 들어갔다. 며칠도 지나지 않은 어느날 새벽, 술취한 경찰 50여명이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무차별 폭행하고 6인을 지방사무소에서 끌어내어 길거리에 내팽겨쳤다. 6인은 하도 억울해서 19일에는 노동부로 항의하러 갔다. 이번에는 근로감독관, 사복 경찰 등 20여명이 달려들어 발로 차고 주먹으로 폭행하더니 전격적으로 5명을 구속시켜버렸다.

서기화는 폭행 중에 깨진 유리에 다리의 신경과 혈관에 큰 부상을 입어 병원에 실려 갔다. 병원에서 수술하자마자 곧바로 인천교도소에 구속시켜버렸다.

공개 조직과 비공개 조직의 형성

나는 민우와 함께 뒷바라지 하기에 바빴고 서울 NCC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이 사건으로 전국의 해고노동자들이 자기들이 해고된 것이 전두환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의한 치밀하게 계획된 현장 격리조치임을 알고 투쟁대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종교계나 민주인사들도 블랙리스트에 의한 해고와 구속은 노동자의 생존을 압살하는 살인적인 인권탄압으로 규정하고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에 동참하였다.

▲ 87년 7월 인천지역 해고노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해고노동자협의회 창립대회를 열고 현장 노동자들의 지원에 나섰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드디어 1984년 1월19일에는 민주노동자 블랙리스트 철폐 대책위원회(문익환 위원장)가 결성되었다. 이는 정권을 폭압적으로 탈취하고 공포정치를 펴고 있던 전두환 정권에 대한 공개투쟁의 첫 신호탄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벌집을 잘못 건드렸다고 판단했는지 6인을 구속집행정지로 신속히 석방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들은 해고노동자 조직들을 만들어 나갔다. 인천에서도 ‘인천지역해고노동자협의회’(이하 해협)가 조직되었다. 사무처장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회계일을 맡았던 김지선 씨가 맡았다.

해고자조직은 인천 산선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해협은 노동자의 첫 공개투쟁조직이 되었다. 이때부터 노동운동은 더욱 철저히 이원화되어갔다. 해고되거나 드러난 경우는 공개투쟁조직으로 집결하였고 드러나지 않은 개인이나 조직들은 비공개 지하조직으로 전환되어 갔다. 그야말로 노동자들이 스스로 교육하고 지도하고 투쟁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산업선교가 교육하고 지도하고 지원하던 노동운동 시절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비합조직의 운동을 보았다

어느 날 나는 다시 창영감리교회 출신 전용철을 만났다. 내가 81년 인천에 와서 기독청년들을 만날 때 그때는 용철이는 고려대학 1학년생이었다. 그는 나를 YWCA사건 기독청년 영웅선배로 존경했다. 나도 그때 용철이를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듬직하고 지도력 있는 운동가가 될 것으로 짐작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기독청년 출신들을 만나는 것을 자제하고 있었다. 조화순 목사님의 입장 때문이었다. 조 목사님은 기독청년들을 자주 만나게 되면 노동자와의 관계가 깊어지기가 어렵고 현장과는 유리된 사고를 하게 된다고 선배로서, 노동자의 친구로서,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대표로서,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후로는 기독청년 출신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런데 용철이는 이제는 노동운동에 투신한 고려대생들의 선배가 되어 일군의 비합·비공개·언더 조직을 이끄는 존재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용철이 조직은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출신 조직과는 달리 지역의 교회를 다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생업으로 공장에 들어간 친구들도 합류하였다. 용철이는 때로는 조직의 모임에 은밀하게 나를 참여토록했고 때로는 조직의 은밀한 투쟁을 보고 평가하도록도 했다. 나는 용철이를 통해 비합조직들이 어떻게 조직훈련들을 하는지 겉보기로 접할 수는 있게 되었다. 이들은 학습도 하지만 강력한 투쟁조직으로서 단련하기위해서 게릴라성 투쟁도 하였다.

어느 날인가 나는 보았다. 얼굴은 복면을 하고 송림동로터리에서 주민들에게 독재타도에 대한 홍보를 하다 출동한 백골단과  대치하는 것이었다. 미리 준비한 화염병을 순간적으로 위협적으로 경찰들에게 던져 거리를 유지하더니 그러고 나서는 잽싸게 주민 속으로, 사방에 뚫린 골목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한명도 잡히지 않고 기막히게 사라져 버렸다.

나는 경찰들이 그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돌아다니는 것을 접했다.

아! 광주항쟁 때와 같았으면 나도 이들에게 가차없이 터지고 끌려 갔겠지. 그러나 그들은 그냥 쳐다보는 주민인 나에게는 접근을 하지 않는구나. 아하! 비합·비공개 조직들이 이렇게들 커가는구나!

공개활동은 이들이 성장하도록 지원을 잘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지역 시민들의 생활을 돌아보다

인천에서는 이때에 또 하나의 조직이 출범하였다. 학생운동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은 되었지만 목적에 변화가 생겼다. 군사독재인 중앙권력 타도 뿐만 아니라 지역의 시민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해결도 과제로 삼았다.

그래서 조직명칭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이라 했다. 마침 제정구 형이 정일우 신부, 김영준과 함께 판자촌 주민들을 데리고 시흥에 정착해서 복음자리라는 주민공동체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정일우 신부는 1971년 알렌스키 조직론을 훈련 받을 때 카톨릭 지도 신부였다.

김영준은 나하고 나이가 동갑인데 알렌스키 훈련 당시 내가 파견된 청계천 활빈교회에서 김진홍전 도사와 함께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제정구 형도 지역시민사회운동에 동감을 표하며 의장직을 맡았다. 인천을 대표하는 제물포고등학교 중심인물인 이호웅 선배가 부의장을 맡았다.

나도 산선을 대표하여 부의장을 맡았다. 황선진이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김정택 목사  kjt94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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