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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지혜: 정의와 사랑을 위하여!(잠 8:1-21; 벧전 2:11-17; 마 6:19-24)성령강림후 여덟째주일(8월4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8.02 18:23

1. 삼위일체 교회력과 그리스도론적 교회력

<그리스도 중심 교회력>

주일낮 예배 말씀은 교회력(敎會歷, Annus Ecclesiasticus)에서 주어진 세 본문 말씀을(시편은 교독문으로) 중심으로 선포합니다. 교회력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 안에서 완성되어진 우리의 구원역사를 매년 재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삼위일체 교회력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일 년 단위로 축약(縮約)하여, 그 생애를 7절기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 절기들의 내용과 흐름은 ‘창조절-대림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 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는 창조절이 한 해의 첫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교회력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주후 4세기 말에 완성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부활절을 전후로 해서, 사순절과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성령강림절)이 발전하게 되었으며, 4세기에 이르러 하나님을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시작과 관련된 주현절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주현절은 4세기 말에 성탄절과 나눠지고, 그 후에 마지막으로 대림절(대강절)이 생겨나, 주후 4세기 말에는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회력의 기본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 교회력을 따르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교회력은 한 해가 성령강림절로 끝나고, 새로운 한 해가 9월 첫 주 창조절기로 시작됩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교회력의 일곱 절기를 세 단계로 구분하면 이렇습니다. ‘성부의 절기(창조절-대림절), 성자의 절기(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주일 전후), 그리고 성령의 절기(부활절-성령강림절)’

우리 기장 교단이 채택한 삼위일체 교회력은 고대 비잔틴교회의 전통을 살려 사도신경(사도신조, Symbolum Apostolicum, 초대교회 즉, 2세기의 교회에서 정리된 세례의 믿음 고백 형식이 3세기 이래로 발전하여 사도신경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4세기가 되어 처음으로 사도신경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사도적 기원과 설화가 나타났으며, 5세기 들어서야 현재의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10세기에 오토 대제에 의해 완결된 형태로 완성되었으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과 함께 서방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Symbolum Nicaeno-Constatinopolitanum, 니케아 신경을 기초로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채택된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신경으로, ‘사도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함께 서방교회의 3대 신경으로 불립니다.)의 삼위일체 구조를 따라 형성된 것입니다. 가깝게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1960년대)와 캐나다연합교회(1969년)를 거쳐 우리 교단에 이른 것입니다. 기장 교단은 1978년 총회에서 교단 새 역사 25주년을 기념하며 이 삼위일체 교회력을 채택하였습니다.

12월 대림절을 한해의 시작으로 보는 그리스도 중심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부터 승천까지를 ‘축제 기간’으로, 그 외의 반년은 ‘비축제 기간’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통적인 통상 축제력은 주로 미국 장로교회와 한국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과 감리교단 등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씀목회연구원 원장이신 최부옥 원장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교단이 세계교회의 JPIC(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하나님의 선교신학적 입장에서 창조절기를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저들 비축제 기간에는 창조절기가 없다), 그리고 삼위일체 신앙고백을 따라서 전체 교회력 구조를 성부의 계절, 성자의 계절, 성령의 계절로 균형을 맞추어 시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삼위일체론적(三位一體論的) 교회력은 훨씬 더 성서적인 구조를 담아내고 있다. 특히 교회 분열과 민족의 분단의 아픔을 극심하게 겪고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교회나 민족의 연합과 일치와 하나 됨이 절실한 한국교회의 입장에서는 이 삼위일체론적 신론과 교회론의 강조는 그 어떤 타 교회력보다 요긴한 교회력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 주셨지만, 그러나 본질상 그는 언제나 서로 하나 되어 협력과 일치의 모습으로 이 세상 역사를 이끌어 주시고 있고, 세상과 인간의 구원도 더불어 견인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건강한 삼위일체론적 설교의 회복이야말로, 강단의 편식과 인본주의적 설교의 함정을 극복할 확실한 대안이 될 것이다.”(말씀목회연구원 홈페이지 참조 http://wpci.kr/)

아무튼 8월 마지막 주까지 이어지는 성령강림절기에 이어지는 말씀은 교회 공동체, 혹은 성도들로 하여금 ‘참 지혜’를 가지고 살라. 또 ‘참 사랑’, ‘참 자유’와 ‘참된 겸손’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살라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참 지혜’에 관한 말씀인데, 그것은 곧, 사랑과 정의를 깨닫고, 실천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2. 사랑과 정의

동서양의 고전은 물론이고, 성서 말씀도 핵심을 요약하라고 하면, ‘정의’와 ‘사랑’입니다. 동서양 모든 인문학의 핵심 주제이자, 모든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이며 인간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삶의 원리입니다. 구약이 정의의 하나님을 말한다면, 신약은 사랑의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 있죠? 그렇다면 동양사상은 어떨까요? 공맹의 도가 바로 사랑과 정의, 곧 인(仁, 남을 사랑하고 어질게 행동하는 일)과 의(義, 사람으로서 행하여야할 바른 도리)입니다.

논어 안연 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공자의 제자인 번지(樊遲)가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樊遲問仁 子曰 愛人).” 여기서 인이 사랑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공자를 계승한 맹자는 인(사랑)을 가장 우위에 둔 공자를 계승하면서, 의(義)를 인과 대등한 수준으로 높입니다. 맹자 첫 머리에 있는 양혜왕 상 1장에 있는 글입니다.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다. (그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왕이 기뻐하며 말했다. ‘선생께서 [추나라에서 위(魏)나라의 수도인 대량까지] 천 리를 멀다 하지 않으시고 오셨으니, 또한 장차 내 나라에 어떤 이익을 주실 수 있겠는지요?’ 맹자가 말하였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孟子見梁惠王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對曰 “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이익을 묻는 양혜왕에게 인과 의를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인은 사랑, 의는 정의입니다.

3. 정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먼저 정의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잠 8:1)” 지금 지혜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명철이 소리를 높여 우리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잠언은 지혜, 곧 슬기로운 삶을 사는 능력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상생활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는지를 하나님의 교훈을 통해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 지혜가 지니고 있는 탁월성과 생명과 은총으로 이끄는 지혜의 유익을 설명하고 있는 잠언 8장은 금은보화를 얻는 것보다, 지혜를 얻는 것이 더 낫기 때문에 지혜 찾기에 전력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볼까요? 명철하라고 권면합니다.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잠 8:2-5)

반복해서 지혜와 명철의 훈계를 받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에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이는 다 총명 있는 자가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가 정직하게 여기는 바니라.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잠 8:6-11)

그리고 이 지혜와 명철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곧, 악을 미워하고 공의로운 통치,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는 세상을 말합니다.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내게는 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잠 8:12-16)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나는 정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잠 8:20-21).” 정의의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은 재물도 얻어 곳간도 채울 것이라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도 그러하니라.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순은보다 나으니라(잠 8:17-19).”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의의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인류의 역사에 정의는 크게 세 범주로 나뉘어 논의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공리주의(목적론)’와 ‘의무론’, 그리고 ‘상호성에 뿌리를 둔 정의’입니다. 공리주의는 정의를 목표 실현에 둡니다. 따라서 목적론이라고 합니다. 그 목적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목적은 사회적 합의, 곧 원칙과 규칙, 제도 등을 통해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무론은 사회적 합의에 따른 목표 달성과는 달리, 옳은 것, 곧 선한 것이 원칙과 규칙, 제도를 넘어 존재하기에 이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의론입니다. 칸트의 저 유명한, “너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인격을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고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가 바로 그것이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황금율이 의무론적 정언명령이 됩니다.

그렇다면 상호성에 뿌리를 둔 정의는 무엇인가요? 이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집중합니다. 사회적 합의나, 선한 것 등은 관계에서 드러난다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이때의 정의는 존 롤즈의 정의론과 같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 오랜 세월에 걸쳐 공평하게 작용하는 사회적 협력 시스템”이며, 이것은 ‘공정으로서 정의’인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성서의 정의는 세 번째 정의와 비슷합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는 사랑에 기초한 공동체적 합의를 통해, 정의가 공평하게 작용하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4. 형제를 사랑하며

두 번째로 참 지혜는 사랑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 베드로 사도는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할 의무에 관해 개인생활, 사회생활로 구분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개인생활, 그리고 제도와 왕, 총독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성서 말씀은 그 말씀이 선포된 배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이, 단지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거의 대부분 성서의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전서의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아마도 로마의 대화재 사건(A.D. 64년) 이후,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막 시작되는 시기에 쓰여 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베드로는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의 성경적인 관점을 이야기 하며, 이들이 흔들림 없이 믿음을 굳건히 지키기를 기대했습니다.

사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공통적으로 가진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비밀리에 남녀가 모여서, 인간(예수)의 피를 마시고, 로마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신앙이 없는 반국가 단체로, 이상한 사이비(似而非) 집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비방과 욕설과 모략 등 ‘말(言)로 박해’를 하였습니다.

반면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는 말의 박해를 넘어, ‘칼의 박해’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가두고, 죽이는 처절한 박해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세상의 권세와 하나님의 권세가 정면으로 충돌하기에 저항하라는 말씀이 나오지만, 아직 박해 초기인 베드로전서 상황에서는 세상 권세를 긍정하며 국가 권력에 복종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본문 말씀을 볼까요?

먼저 개인생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1-12)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이야기 합니다(벧전 1:1; 1:17; 2:11). 난민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달프고 힘든 생활입니다.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해, 때로는 육체의 정욕대로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로마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행실을 선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회생활로 나아갑니다. 공동번역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여러분은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복종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황제는 주권자이니 그에게 복종하고, 총독은 황제의 임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악인을 처벌하고 선인을 표창하는 사람이니 그에게도 복종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벧전 2:13-15)

무슨 말씀인가요? 해답이 마지막에 나와 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여러분은 자유인답게 사십시오. 그러나 악을 행하는 구실로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섬기는 종입니다.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황제를 존경하십시오(벧전 2:16-17).”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가 있지만, 오직 사랑을 위하여 하나님의 종과 같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아직 박해가 심하지 않은 로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는 일단 로마의 정치 체제에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황제를 존경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유를 구속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을 위하여 종과 같이 낮아지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인들도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정의를 행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볼까요?

5.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1-24)

그렇습니다. 우리의 참 지혜는 정의를 실천하며, 사랑을 행하는 삶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의 눈이 늘 말씀의 빛에 서서, 밝게 빛나게 하여야 합니다. 때로는 세상의 재물 때문에 우리의 눈이 ‘혹’해서 넘어갈 때가 있겠지만, 늘 마음을 지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사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혹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참 지혜인 사랑과 정의로운 삶을 살게 되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아들일 때 염소의 자리가 아니라, 양의 자리, 의로운 자들의 자리에 들어갈 것입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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