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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이 아닌 전능, 아니 함이 없는 전능”블라디미르 쿠쉬의 “Dream Catcher”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8.03 18:23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십대 때부터 수없이 부르던 찬양의 첫 구절이다. 지금도 이 도입부를 노래하면 가슴속에 묘한 감흥이 일어난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십대 때 하나님을 바라보며 품었던 신뢰와 갈망과 눈물의 여운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픔과 혼돈 역시 섞여있다. 하나님께서 그 이후 수십 년 세월 속에서 전능하신 모습이었나 싶기 때문이다. 절박하게, 처절하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다렸던 순간들, 그 중에 해피엔딩은 얼마나 될지. 적지 않은 순간들이 상처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전능하심을 찬양할 때 그 뭉클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빛과 어둠이, 미소와 눈물이, 사랑과 미움이 뒤엉킨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전능하실까? 전능하고 선한 하나님의 세계에 어떻게 악이 존재할까, 라는 신정론의 난제. 그것은 강의실과 책 속에서 머리로 헤아릴 때도 쉽지 않았다. 여러 대답들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신정론이 실존적 물음이 되었을 때는 더욱 난해했다. 사실 악의 칼날이 영혼에 남긴 트라우마를 어떤 대답이 지울 수 있겠는가. 그럴 때 전능하심은 난제일뿐 아니라 상처가 되기 쉽다. 전능하심은 서운함을 넘어 분노와 미움을 부추길 수도 있다. 믿고 의지한 마음이 클수록 더 서운하고 더 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전능한 존재다. 먹을 것, 입을 것, 놀 것… 필요한 모든 것을 주는 존재다. 부모는 절대 의존의 대상으로서 하나님과 맺을 관계의 원형이 된다. 부모가 어떤 모습이었느냐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하나님처럼 보이던 부모가 추락하는 데는 긴 세월이 걸리지 않는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전능은 고사하고 그리 완벽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모습을 알게 된다. 사랑하고 기대했던 만큼 더 실망스럽고 미울 수 있다.

반전의 여지는 있다. 전능해 보이던 부모가 무능한 미움의 대상으로 보였다가 다시 존경스러운 사랑의 대상이 되는 반전이다. 나이를 먹고 생존의 전쟁터에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늙어가면서 다시 반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약하고 실망스러워 보이던 부모가 인간적 한계 안에서 얼마나 힘겹게 자신을 사랑했는지 깨닫는다면, 반전의 반전이 가능하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이런 반전이 가능할까? 부모와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원형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블라디미르 쿠쉬의 “Dream Catcher”에 그런 반전이 비춰온다.

▲ Vladimir Kush, “Dream Catcher”, 85×65 cm/U.H.M. Gallery 단해기념관 소장

블라디미르 쿠쉬의 “Dream Catcher”는 제목 그대로 아메리카 원주민의 드림캐처(Dreamcatcher)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드림캐처는 원형의 그물망에 깃털과 구슬 등으로 꾸며서 잠자리 머리맡에 걸어 놓는다. 그렇게 하면 악몽은 막아주고 좋은 꿈을 꾸게 해준다고 믿었다. 쿠쉬도 하늘에 하얀 망을 펼쳐 그렸다. 하얀 드림캐처가 잠든 여인에게 달려드는 벌레들을 막아주고 있다. 드림캐처의 보호 속에서 여인은 평화롭게 잠들어있다. 잠든 여인의 모습은 그대로 산을 닮았다. 깊이 잠들어 산과 하나가 된 모습이다. 생명을 낳아 젖을 먹이며 기르는 여인의 몸이 산과 하나가 된다. 나무, 풀, 동물을 품어 기르는 산과 한 몸이 된다.

자연과 하나가 된 인간의 모습이지만, 단순히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 작품의 면모를 명확히 보여준다. 초현실주의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다다이즘에서 태동했다.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연약한지 목격한다. 그로인해 반이성, 반도덕, 반예술의 다다이즘이 일어난다. 초현실주의는 이를 새롭게 변화시키면서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잠재의식과 무의식에 관심을 갖는다. 이성과 합리성으로 대표되는 서구문명에 반기를 들고 꿈과 무의식을 통해 자유로운 상상력의 세계를 그려낸 것이다.

쿠쉬는 “Dream Catcher”에서 여인의 머리를 그리지 않았다. 이성, 합리성을 상징하는 머리가 없다. 대상을 보고 판단하는 눈, 시선도 없다. 보고 듣고 맛보는 분별지에서 시작되는 차별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게다가 문명의 옷을 벗고 알몸으로 산과 하나가 된다. 드림캐처를 걸었다는 사실, 그것은 이 여인이 꿈을 꾸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그 꿈을 보호해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어떤 생명도 다 품어 기르는 산이 되는 꿈이 아닐까. 이성과 합리성을 내려놓고 알몸으로 자연과 하나가 될 때, 어찌 두렵지 않을까. 그 두려운 악몽으로부터 드림캐처가 보호해준다. 무의식과 꿈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초현실주의에도 드림캐처가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었을지.

▲ Vladimir Kush, “Dreamcatcher” 밑부분

특히 여인이 누운 자리가 인상적이다. 그곳을 자연 혹은 땅으로만 묘사하지 않았다. 산과 자연과 하나가 된 여인을 그리고자 했다면, 여인의 몸 그대로를 땅으로 묘사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여인의 몸 밑에 어두운 숲이 가득하다. 숲 밑에, 숲 속에 무엇인가 숨어있는 듯한 여지를 남긴다. 여인의 몸이 곧 땅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인의 몸과 자연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간격이 드러난다.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어두운 숲에 누운 모습, 그것은 무의식에 자신을 맡기는 몸짓으로 다가온다. 무의식의 심연에서 솟아난 꿈에 자신을 열어 맡기듯 흑암의 신비에서 자라난 숲에 누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쿠쉬의 “Dream Catcher”는 이처럼 초현실주의 예술의 의도와 지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성과 합리성을 거부하고 무의식과 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 한 초현실주의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 El Shaddai)을 묵상하면서 다른 측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창세기 17:1,2/새번역)

성경에서 하나님 이름에 ‘전능한’(샤다이 Shaddai)이 처음 붙는 장면이다. 찬양에서, 설교에서, 신학에서 너무 익숙하게 붙는 형용사, ‘전능한’, 그런데 히브리어 ‘샤다이’가 곧 ‘전능한’은 아니다. 제롬(Jerome)이 엘 샤다이를 불가타역으로 옮길 때 전능한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그 이후 엘 샤다이를 전능한 하나님으로 번역해왔다. 샤다이가 ‘압도하다’는 뜻의 리슈도드(leshdod)와 관련 있다고 보면 가능하다. 군주적 하나님 이미지가 이런 관련성으로 기울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샤다이는 젖가슴 또는 산을 뜻하는 샤드(shad)에서 왔다고 볼 수도 있다.

‘젖가슴이신, 산이신 하나님’과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는 어떤 뜻일까? 전능하신 하나님보다는 젖가슴과 산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아브라함에게 처음 일러주신 엘 샤다이의 이름은 그 이후 야곱과 요셉에 이르는 창세기의 맥락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창세기 17:1,2과 유사한 맥락이다. 생육하고 번성하게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다. 이 흐름에서 본다면, 어떤 해석이 더 어울릴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는 하나님은 파괴하고 압도한다는 어원의 전능한 하나님보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먹이고 살리시는 젖가슴의 하나님이 훨씬 잘 어울린다.

젖가슴과 산이라는 은유가 처음에는 잘 연결되지 않았다. 산 같은 하나님은 분명 관련이 있다. 모세뿐 아니라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가 산이다. 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한다. 예수님께서도 산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기도하시며 골고다에서 못 박히신다.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중요한 공간을 상징한다. 왜 산일까? 단순히 높아서, 하늘에 가까워서 정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샤드(shad)는 산뿐 아니라 젖가슴의 의미도 지녔다. 젖가슴이면서 산이다. 쿠쉬의 작품이 보여주는 그대로다. “Dream Catcher”에서 산은 젖가슴이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산은 이 땅의 산과 다르다. 주역에서 산을 뜻하는 간(艮:☶)괘는 두 개의 음 위에 양이 덮고 있는 모습이다. 간괘는 위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양으로 강하고 단단해보인다. 그러나 그 아래, 그 속에는 부드러운 음이 가득하다. 단단한 땅 아래 부드러운 흙이 가득한 모습이랄까, 겉으로는 험하고 거칠어 보여도, 그 속은 풀과 나무와 짐승들을 다 품어 키우는 모습이랄까. 그러나 팔레스틴의 산은 메마르고 헐벗은 광야의 모습이다.

광야에 솟아오른 산, 그것은 쿠쉬의 그림에서처럼 헐벗은 여인의 가슴과 닮았다. 그 꼭대기에서 믿음의 선조들은 영혼의 젖을 먹고 살아왔다. 계시를 받고, 하나님을 만나왔다. 하나님의 임재가, 말씀이 흘러나오는 젖가슴, 젖가슴이신 하나님과 너무 잘 어울린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모습인가? 거칠고 험한 광야에서 하늘의 젖을 먹여 살리고 번성케 하신 젖가슴의 하나님이 아닌가.

골고다 언덕은 사랑의 젖가슴, 생명의 젖줄기를 보여주는 절정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은 산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절정이다. 역설과 신비의 절정이다. 쿠쉬가 골고다 언덕을 염두해 두고 그린 「Rain」이란 작품이 그 풍경을 은유로 보여준다.

▲ Vladimir Kush, “Rain”, 100×100cm

하늘이 비로 내려 땅을 만나는 합일의 풍경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내려와 땅 위에 하늘 뜻을 이루는 모습을 표현한 은유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산 정상에서 땅을 만나고 그 합일 속에서 사람들은 춤을 춘다. 천지인 합일의 춤이다. 이 작품을 가만히 바라보면, 사람들이 기뻐 춤을 추는지, 슬퍼 춤을 추는지 애매하다. 관람객은 기뻐 보인다는 분에서 슬퍼 보인다는 분으로 각기 다르다. 골고다 언덕도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지만 동시에 제일 아프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황폐하게 메마른 젖가슴에서 마지막 남은 생명 한 방울까지 고통 가운데 짜 먹이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닌가.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4:12,13/새번역)

큰 인기를 누리는 부분은 13절이다. 능력을 주셔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욕망을 자극한다. 그런데 12절은 그런 욕망과 결이 다르다. 욕망하는 모든 것을 다 한다는 뜻이 아니다. 바라지 않던 모든 일들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비결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이후, 그리도 욕망한 좋은 것들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풍요만이 아니라 비천, 굶주림, 궁핍도 "아니 원하지 않는"(無不慾) 참 자유이자 전능이다.

엘 샤다이를 만능해결사 하나님으로 볼 때는 12절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젖가슴이신 하나님,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도 함께 계시며 사랑으로 품어 기르시는 하나님으로 만나면, 12절이 보이기 시작한다.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 지니는 가장 큰 힘을 지닌 존재다. 잠깐이면 하나의 왕국도 만들 수 있는 능력자 중에 능력자다. 영화 알라딘에서 알라딘이 지니에게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는다. 지니의 대답은 "자유"다. 그 좁은 램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 그제야 지니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자, 그러나 누군가가 램프를 닦아서 불러내야만 나올 수 있다. 그 누군가의 세 가지 소원에만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할 수 없다. 지니는 그 놀라운 능력을 지닌 대신 램프에 갇혀 노예로만 살 수 있다.

권력은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라던가. 그런데 정말 그런 힘이 존재할까? 얼마나 큰 힘을 가지면 그럴 수 있을까? 그런 힘을 지니면, 그것을 지키느라 해야만 하는 일에 묶이지 않던가. 특히나 큰 힘을 지니면, 욕망의 지배를 면하기 어렵다. 지니가 램프의 주인이 원하는 소원에 묶인 노예이듯, 권력은 욕망의 노예로 묶는 쇠사슬이기 쉽다.

어떤 능력이 있는가? 출중한 능력이 있는가? 그 능력이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옥죄는가?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 그 소유 역시 자유롭게 하는가, 옥죄는가? 그리도 간절히 원하는 능력이 어쩌면 램프의 감옥은 아닌가? 램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요술, 아니 램프에 묶어버리는 요술이 왜 필요한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욕망을 부추기고 집착과 분노에 갇히게 하는가,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도 받아들이며 자유로이 사랑하게 하는가? 하나님도, 신앙도 욕망이라는 램프에 가둔다면, 아무리 전능하고 아무리 넓어도 욕망의 램프는 감옥이고 하나님은 지니일 뿐이다.

無不爲者 無不能成也 無不慾者 無不能得也 《설원說苑》
아니 함이 없는 자는 능히 이루지 못할 게 없고
아니 원함이 없는 자는 능히 얻지 못할 게 없다

모든 것을 다 하는 자는 능히 이루지 못할 게 없고, 모든 것을 원하는 자는 능히 얻지 못할게 없다고 풀이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르게 풀이한다. “아니 함이 없는 자는 능히 이루지 못할 게 없고, 아니 원함이 없는 자는 능히 얻지 못할 게 없다.” 아니 함이 없음, 아니 원함이 없음은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유다. 애써 바라며 이루려 하지 않은 것도 받아들인다. 어쩌면 피했으면 하는 것도 아니 원하지 않는다. 가난도, 슬픔도, 실패도, 상처도 아니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빌립보서 4:12,13절과 통한다. 기꺼이 모든 것을 바라고 행하는 자유다. 자유는 욕망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만능이기 보다 바라지 않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이 아닌가. 특히나 하나님 주시는 능력은 모든 것을 품어안는 이유, 곧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 아니 원하던 모든 것까지.

엘 샤다이, 젖가슴 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새롭게 보여준다.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세계에 어찌 악이 있는지, 전능하신데 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는지, 의아하고 때론 서운하다 못해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전능한 하나님이 맞다고 해도 그것은 엘 샤다이의 전능함이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만능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 무엇도 다 감당할 수 있는 어머니/어버이 된 전능이다.

불가능해도 행하는 자유이자 가능해도 내려놓는 사랑의 전능이다. 하나님이지만 무력해질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고, 버림 받을 수도 있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전능은 그제야 제자리를 찾는다. 실패 속에서도 위로와 힘이 되는 품으로 회복된다. 아니 함이 없는 자유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하게 할 능력의 원천이 된다. 그제야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욕망의 대상이나 서운함과 분노의 대상에서 풀려난다. 만능이 아닌 전능으로, 아니 함이 없는 전능으로,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의 능력으로.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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