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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부셰, 루이 15세를 비판하다로코코 시대 프랑스 화가 부셰 이야기(2)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8.04 18:11
6 이스라엘 모든 고관은 각기 권세대로 피를 흘리려고 네 가운데에 있었도다 7 그들이 네 가운데에서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네 가운데에서 나그네를 학대하였으며 네 가운데에서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도다 8 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 9 네 가운데에 피를 흘리려고 이간을 붙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산 위에서 제물을 먹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음행하는 자도 있었으며 10 네 가운데에 자기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월경하는 부정한 여인과 관계하는 자도 있었으며 11 어떤 사람은 그 이웃의 아내와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그의 며느리를 더럽혀 음행하였으며 네 가운데에 어떤 사람은 그 자매 곧 아버지의 딸과 관계하였으며 12 네 가운데에 피를 흘리려고 뇌물을 받는 자도 있었으며 네가 변돈과 이자를 받았으며 이익을 탐하여 이웃을 속여 빼앗았으며 나를 잊어버렸도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에스겔 22:6-12)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부인

지난 글에 이어 부셰의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부셰의 작품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당시 프랑스 왕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부셰가 활동하던 당시 프랑스의 왕은 루이 15세였습니다. 지난 글에서 비평가들은 로코코 시기를 루이 15세의 통치 기간으로 본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만큼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던 왕이 루이 15세입니다.

▲ 모리스 켕탱 드 라 투르, <루이 15세>(1748)와 샤를 앙드레 반 루, <마리 렉쟁스카>(1747)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증손자로 1715년 갑작스런 루이 14세의 죽음과 함께 다섯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조카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가 섭정을 하게 됩니다. 루이 14세는 루이 15세에게 왕위만을 물려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의 엄청난 재정 위기까지 함께 물려주었습니다. 초기 섭정을 했던 필리프 2세는 그다지 경제에 능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섭정하는 동안 프랑스의 경제 사정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고, 결국 그는 1723년 열세 살이 된 루이 15세에게 정권을 모두 넘기고 그해에 죽음을 맞습니다.

1724년 열네 살인 루이 15세는 부르봉 공작 루이 4세에게 의존하게 되는데, 루이 4세는 오를레앙 공작 가문에 위기를 느끼고 루이 15세의 결혼을 서두릅니다. 그래서 본래 약혼자였던 당시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에스파냐 공주, 마리아나 빅토리아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루이 15세보다 일곱 살 많은, 폴란드 왕 스타슈와프 레슈친스키 1세의 딸 마리 렉쟁스카(마리아 레슈친스카)와의 결혼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1726년 재정난을 해결하지 못한 루이 4세는 실각하게 되고, 루이 15세는 자신의 가정교사였던 플뢰리 추기경에게 모든 국정을 맡깁니다. 그리고 자신은 루이 14세의 명성 뒤에 숨어 자신만의 생활을 즐깁니다.

루이 15세는 처음에 자신의 아내인 마리 렉쟁스카와의 결혼 생활에 만족한 것으로 보였으나, 점차 수많은 염문을 뿌리기 시작합니다. 그의 애첩으로 이름을 남긴 여성만 해도 16명에 달하며, 그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을 꼽으라면, 퐁파두르 부인, 오뮈르피, 두바리 부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중 퐁파두르 부인은 이미 지난주에도 언급하였습니다.

▲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1750-58)

어쩌면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유명할지도 모르는 애첩 퐁파두르 부인은 본래 잔느 앙투아네트 푸아송(Jeanne Antoinette Poisson)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사촌인 르 노르망 드 티올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가끔 보게 되었던 루이 15세의 눈에 들어 강제로 이혼을 한 후, 루이 15세의 후궁이 됩니다. 개인적으로 루이 15세가 그녀를 빼앗은 것인지, 그녀가 루이 15세를 유혹한 것인지 혼란스럽긴 합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루이 15세의 모든 국정을 도왔습니다. 그녀가 스스로 도왔던 부분도 있겠지만, 실제 루이 15세가 그녀에게 의지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녀는 인사, 외교, 군사 분야에서 두드러진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예술가들을 사랑하여 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녀는 평민이나 하급 귀족 중에서도 능력이 있는 이들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였는데, 그 덕분에 하급 귀족 출신이었던 한 젊은이가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훗날 프랑스의 황제로 등극하기도 합니다. 바로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그녀가 프랑스 왕정에 반대하던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당시 부셰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 있었던 계몽 사상가이자 철학자이며 미술 평론가인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가 달랑베르(D'Alembert, Jean Le Rond 1717-1783)와 『백과전서』 편찬 작업을 할 때, 이에 대한 지원과 보호를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였는지 프랑스 혁명은 그녀의 사망 이후에나 일어납니다. 또 프랑스 혁명 때,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1793)에게 붙여졌던 수많은 죄목은 실상 퐁파두르 부인과 그 시대 사람들이 했던 일들이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성적 윤리를 지키도록 왕실의 풍기를 바로 잡고, 검소한 삶을 살았던 여왕이라고 합니다.

앞서 루이 15세의 애첩 중 한 명으로 오뮈르피(Marie-Louise O'Murphy 1737-1814)를 꼽았는데, 그녀는 부셰와도 긴밀한 연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설적인 난봉꾼 카사노바가 정말 아름답다며 경탄했던 여자아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아이가 오뮈르피입니다. 그래서 부셰는 그 아름답다는 아이를 화폭에 담게 됩니다.

당시 오뮈르피는 15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부셰가 그린 오뮈르피의 그림을 본 한 귀족이 그 그림을 구입하였고, 그는 이 그림을 루이 15세에게 자랑하게 됩니다. 이때 루이 15세에게 그림을 자랑한 귀족이 퐁파두르 부인의 바보 동생인 아벨 푸아송(Abel-François Poisson 1727-1781)이었습니다. 그림 속의 아름다운 아이에게 반한 루이 15세는 그녀를 자신의 앞에 데려오도록 명령하였고, 실물을 본 루이 15세는 더욱 그녀에게 반하게 됩니다.

▲ 프랑수아 부셰, <오뮈르피의 초상화>(1752)

루이 15세에 의해 후궁이 된 오뮈르피는 왕과 관계를 맺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묶게 했던 사슴 정원에서 살게 됩니다. 당시 퐁파두르 부인은 왕의 사랑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몸이 허약하여 왕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루이 15세가 퐁파두르 부인을 워낙 의지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루이 15세가 다른 후궁들과 관계 맺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린 치기 때문인지 오뮈르피는 퐁파두르 부인의 자리를 탐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뒤에서 퐁파두르 부인의 험담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상대할 사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적대하려는 퐁파두르 부인은 앞서 말했듯이 국정 전반에 관여할 정도의 지식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그녀가 정치, 군사, 경제 방면에서 쓴 책만 3500권에 달했으며, 그녀는 우리가 잘 아는 계몽주의자들, 몽테스키외, 디드로, 볼테르, 달랑베르 등과 교류를 가질 정도로 박식했습니다.

오뮈르피의 싸움은 이미 시작부터 진 싸움이었습니다. 그녀의 계략을 알게 된 퐁파두르 부인은 루이 15세에게 슬쩍 이에 대해 말했고, 오뮈르피는 그해 11월 새벽 4시에 사슴 정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부셰의 초상화 한 장으로 왕의 후궁에까지 올랐다가 자신의 무리한 욕심으로 인해 2년 만에 쫓겨난 여성이 바로 오뮈르피입니다.

오뮈르피에 대해 이야기한 이유는 퐁파두르 부인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루이 15세가 그 영향력에 휘둘렸는지를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로코코 시대라는 표현을 쓰지 말고 ‘퐁파두르 시대’라는 표현을 쓰자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화로 그려낸 시대

이러한 시기에 부셰는 제우스와 관련된 신화를 종종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가 특히 많이 그렸던 소재는 ‘레다 이야기’와 ‘에우로파 이야기’입니다. 많은 화가들이 이를 소재로 삼긴 했습니다만 부셰만큼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는 또 없는 듯 합니다. 그가 그린 <레다와 백조> 작품 중 더 유명한 작품이 있는데, 너무 선정적이라 다른 작품으로 올립니다.

▲ 프랑수아 부셰, <레다와 백조>(1742)

신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레다는 스파르타 왕 틴다레오스의 아내였습니다. 바람둥이인 제우스는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하였고, 백조로 변신하여 그녀의 곁에 다가가 그녀와 관계를 맺습니다. 레다는 그날 밤 자신의 남편인 틴다레오스와도 관계를 맺었는데, 얼마 후 레다는 두 개의 알과 두 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알에서는 헬레네와 폴리데우케스가 태어났고, 아이는 카스토르와 클리타임네스트라였습니다. 이 중 헬레네는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되는 미녀로 성장합니다. 출생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폴리데우케스와 카스토르는 의좋은 형제로 수많은 영웅담의 주인공이 됩니다.

▲ 프랑수아 부셰, <에우로파의 납치>(1750)

에우로파는 페니키아 아게노르 왕의 공주로 태어났습니다. 하루는 그녀가 해변을 거닐고 있었는데, 바람둥이 제우스의 눈에 띄고 맙니다. 조심성 많은 에우로파를 유혹하기 위해 제우스는 황소로 변하여 에우로파 주변에 다가갑니다. 처음엔 주저하던 에우로파도 차츰 익숙해져 황소에게 다가가게 되었고, 황소가 들이미는 등에 올라타게 됩니다. 에우로파가 등에 올라타자 황소로 변한 제우스는 그대로 바다를 건너 크레타로 갔고, 그곳에서 에우로파와 세 아들, 미노스, 라다만티스, 사르페돈을 낳습니다. 그래서 에우로파는 크레타의 시조가 되는데, 에우로파의 이름인 Europa를 따서 현재 유럽(Europe)이라는 명칭이 생기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부셰는 왜 이리 바람둥이 신 제우스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제우스라는 신에 의해서 자행된 성폭행 사건이 부셰를 통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입니다. 어쩌면 바람둥이 신 제우스는 당시의 왕인 루이 15세를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들은 왕의 행위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림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그림의 분위기는 전혀 성폭행 사건의 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우스에 의한 겁탈이 하나의 축복처럼 느껴지는 분위기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점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한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렘브란트 반 레인, <에우로파의 납치>(1632)

렘브란트가 그린 <에우로파의 납치>는 제목 그대로 납치 사건의 현장입니다. 에우로파는 당황한 채 황소 위에 매달려 있고, 그녀의 유모는 아연실색한 모습입니다. 실제 신화 속에서 크레타로 끌려간 에우로파는 향수병에 시달렸지만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차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점은 부셰가 비판하고 있는 대상이 바람둥이 왕 루이 15세 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루이 15세와 관계 맺는 일을 인생역전의 기회라고 여겼던 당시 귀족들 전체를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요즘 시대에 여성에 대한 이런 인식은 잘못되었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루이 15세 시절에는 너무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왕을 유혹해서 우리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은 당시 귀족들 사이에 팽배했던 생각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두바리 부인(Madame du Barry 1743-1793)입니다. 이는 여성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남성도 포함한 당시 귀족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만약 부셰의 그림이 이런 성적인 소재들에만 집중해 있었다면, 저는 그가 루이 15세와 당시 귀족들의 생각을 비판했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로코코 시대 회화에 성적인 소재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정도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신화를 통해 그려낸 작품들은 성적인 소재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부셰는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 또 하나의 특이한 주제에 집중하여 여러 작품을 남겼습니다.

▲ 프랑수아 부셰, <헤라클레스와 옴팔레>(1730경)

그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인 <헤라클레스와 옴팔레>는 남녀간의 격정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화의 내용을 안다면 이 이야기는 그저 두 남녀의 격정적인 사랑 나눔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헤라클레스는 에우리토스 왕의 아들인 이피토스를 죽였다는 이유로 신들의 벌을 받아 기억을 잃고 리디아의 여왕 옴팔레의 노예가 됩니다.

헤라클레스가 왜 이피토스를 죽였는가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그 이유는 둘째치고 신들에 의해 옴팔레의 노예가 된 헤라클레스는 그녀의 궁궐에서 강도와 괴물을 막는 등 다양한 활약을 합니다. 그의 활약에 감탄하던 옴팔레 여왕은 그가 영웅 헤라클레스임을 알게 되었고, 그와 결혼을 하기에 이릅니다. 결혼 후 헤라클레스는 옴팔레의 매력에 빠져 정신을 놓고 살아가게 됩니다.

최강의 영웅이라 불린 그가 여성의 옷을 입고 물레질을 했습니다. 반대로 옴팔레는 헤라클레스의 사자 가죽옷을 입고 올리브나무 방망이를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신들이 정해놓은 노예 기간이 끝난 후에야 헤라클레스는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모습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어 옴팔레를 떠나 그리스로 돌아갑니다. 이 이야기는 여성에게 붙잡혀 사는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단골 소재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 프랑수아 부셰, <불카누스의 대장간>(1757)

이런 풍자는 <불카누스(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이라는 작품에서도 재연됩니다. 아프로디테와 헤파이스토스는 부부입니다.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이지만 추남에 절름발이였습니다. 그는 어머니 헤라에게 요구하여 가장 아름다운 여신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아프로디테였습니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못생긴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수많은 남신들, 남성들과 바람을 피웠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레스입니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불륜은 많은 작가들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면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비너스와 마르스>일 것입니다.

▲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와 마르스>(1485)

우리가 잘 아는 에로스(로마식으로 큐피트)는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사이에서 생긴 자식이기도 합니다.

다시 부셰의 작품으로 돌아와서, 부셰의 작품 속에서 아프로디테는 그저 남편의 작업실, 대장간에 방문하여 남편의 작업을 지켜보는 듯합니다만, 그녀는 그저 남편의 작업장을 구경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영웅인 아이네이아스의 무기를 헤파이스토스에게 부탁하였고 이를 받으러 왔습니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의 왕자였으나 트로이 함락 이후, 트로이를 빠져나와 이탈리아로 건너와 나라를 세웠고, 그 나라가 후에 로마가 됩니다.

아이네이아스의 영웅담은 로마의 서사시에 잘 나타나 있는데, 아프로디테는 왜 그를 위한 무기를 헤파이스토스에게 요구하고 있을까요? 아이네이아스가 아프로디테와 트로이의 왕족인 안키세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셰의 작품 속에서 헤파이스토스는 자신이 만든 칼을 아프로디테에게 건네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바람을 피워 낳은 자식을 위한 무기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역시도 앞선 헤라클레스의 이야기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매력에 빠져 결국 여성의 뜻대로 움직이는 남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부셰의 작품을 프랑스 대혁명 시기와 당시를 살았던 화가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에 대해 공부하다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역사화는 다음에 이어서 다루게 되겠지만, 신고전주의 역사화를 공부하다가 로코코를 보게 되었고, 로코코의 회화 속에서 발견한 사람이 부셰입니다.

그는 왕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으로 작품활동을 하였지만, 당시의 왕과 귀족 문화의 추잡한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작품들을 그렸습니다. 그의 용기가 대단한 것인지, 퐁파두르 부인의 배포가 대단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왕실을 비판하던 계몽주의자들을 후원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배포가 대단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부셰는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이 원하는 그림만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귀족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그려냄으로 그들의 사치와 향락 문화를 후세에 전달하였고, 신화를 통해 왕과 귀족들의 문란하고 우스꽝스러운 행태를 꼬집었습니다.

물론 그의 후기 작품들이 목가적인 작품들, 접시 그려 넣기 위한 보기 좋은 작품들로 바뀌기는 합니다만, 오히려 왕실의 후원을 받던 기간에 그런 비판적인 그림을 더 많이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신고전주의 역사화와 낭만주의 회화의 기반을 마련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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