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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복선, 십자가”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8.05 18:48
1 그 무렵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자기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2 “이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3 헤롯은 일찍이,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 때문에 요한을 붙잡아다가 묶어서,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그것은, 요한이 헤롯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그래서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민중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서, 헤롯을 즐겁게 해주었다. 7 그리하여 헤롯은 그 소녀에게,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맹세로써 약속하였다. 8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이리로 가져다 주십시오.” 9 왕은 마음이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를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고 있는 앞이므로, 그렇게 해 주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10 그래서 그는 사람을 보내서,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가져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장사 지내고 나서, 예수께 가서 알려드렸다.(마태복음 14:1~12/새번역)

예술과 문학이 이 본문에서 주로 관심을 기울인 대상은 예수님도, 세례 요한도 아니었습니다. 정치권력에 의한 살해나 순교적 삶에는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길을 함께 따를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스포트라이트는 헤로디아의 딸이 받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나온 그녀의 이름 살로메, 그 이름의 예술, 문학 작품이 주목 받습니다.

▲ Henri Regnault, “Salomé”(1870)

특히 18, 19세기부터 살로메는 문학과 예술에서 팜므파탈의 전형, 요녀와 악녀의 원형으로 묘사되며 주목 받았습니다. 여성의 지위와 참여가 높아져가는 분위기에서 남성이 느낀 불안의 반영일 수 있습니다. 남성을 파멸시키는 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요녀, 요부, 악녀로 주목합니다.

이 본문 내부에서도 세례자 요한을 죽인 사람은 헤롯이지만, 그 이유를 살로메에게 돌립니다. 저항할 수 없는 성적 매력으로 헤롯을 유혹한 악녀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핑계가 아닌가요. 두려웠지만 죽이고 싶었던 욕망이 어린 소녀를 핑계 삼은 게 아닌가요. 가해자 헤롯이 살로메를 핑계 삼아 피해자인 채 합니다.

예술이, 문학이 그려주지 않는다 해도 주목해야할 세례자 요한, 그는 세례와 회개를 통해 개혁을 일으킨 예언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회개 운동에 동참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해나가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개혁은 정치종교권력에 대한 저항이었고, 그래서 정치권력에 살해를 당합니다. 예수님 역시 정치범을 처형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당시,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회개하는 삶,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피할 수 없는 저항이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그 길을 걷다가 살해를 당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께 벌어질 일을 예견하는 복선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면, 요한에게 일어난 일이 주님께 복선이 되듯, 주님께 일어난 일이 그 길을 따르는 모두에게 복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순교의 길을 가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시보다 훨씬 더 하나님 나라에 가까워졌습니까? 얼마나 가까워졌느냐에 따라 정도는 다르겠지만, 여전히 주님 뜻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길은 권력과 욕망에 대한 저항입니다. 그래서 살해를 당할 만큼은 아니어도, 분명 주님 당하신 고난이 신앙인들에게도 복선이 됩니다. 주님을 믿기 때문에 얼마나 복을 받았는가에는 큰 관심이 쏠립니다. 그에 비해 십자가 고난에는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삶의 복선일 때, 부활의 복선도 됩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복선이기 때문입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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