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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탄생성의 교육사상과 양명의 치량지(致良知)의 교육(1)한나 아렌트의 탄생성(natality)의 교육학과 왕양명의 치량지(致良知) (6)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 승인 2019.08.07 17:41

지금까지 위에서 어떻게 아렌트와 양명이 인간 ‘활동적 삶’(vita activa, 行)의 난점을 치유하기 위해서 ‘정신적 삶’(vita contemplativa, 知)을 다시 돌아보고, 그 활동적 삶의 출발점과 기초를 다시 발견함을 통해서 새롭게 그 활동이 온전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감각’(taste/知)과 ‘감정’(sensation/七情)과 ‘공통감’(common sense․imagination/四端)으로 표현되는 판단력과 양지의 발견이었으며, 이것으로써 이들은 知와 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다시 보았고, 우리가 사적 욕망과 과도한 목적의식에서 벗어나서 다시 세상과 이웃과 자연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인간의 삶이란, 정신적 삶이라고 해도, 다양성과 객관과 공공의 영역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다시 발견한 것이다.

아렌트의 ‘판단력 확장’(the enlargement/extension of the mind)과 문화

이 발견에 근거해서 이들은 ‘판단력의 확장’(the enlargement of the mind)과 ‘양지의 확충’(致良知)에 대해서 줄기차게 말한다. 아렌트는 그녀의 『정신의 삶』에서 판단력 부분을 마무리하고 가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이 판단력의 확장 문제가 그녀에게서 더 세밀히 탐구되었는가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저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저서라고 말한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Between Past and Future』를 보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인간 판단력의 능력과 관련시키면서 어떻게 인간 정신의 본래적인 능력을 잘 확장시키고 키움으로써 이 세계를 보존하고, 문화를 일구어내고, 진리가 담보될 수 있는 세상이 되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그녀의 깊은 성찰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녀의 『정신의 삶』에서도 전(全) 부분에 걸쳐서 판단력에 대한 그녀의 이해들을 볼 수 있는데, 이 부분들에서 그녀의 교육적 사고들을 핵심적으로 알아 볼 수 있다.

아렌트에 따르면, 우리의 확장된 의식(판단력)은 그 ‘사심 없음’(disinterestedness)으로 인해서 이 세상을 어떤 유용함이나 개인의 이해관계, 조작, 또는 좁은 의미의 도덕적 분별도 넘어서서 그 자체로 나타나는 현현의 美로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바로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힘이 되며, 그래서 문화를 생산하고 보존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1) 근대이후로 들어와서 문화와 예술이 철저히 개인의 욕구를 위해서 사용되고(the educated philistine), 20세기 대중 사회에 와서는 끊임없이 조작되고 소비되지만, 이러한 실리주의와 소비주의를 넘어서서 우리가 사는 장소와 시간에 세계성을 주고 지속성을 주어서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주는 문화와 예술을 돌볼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믿음이다. 이들의 판단력을 아렌트는 참으로 귀하게 보았다.

이들에게는 세계가 우선이지 결코 인간이나 개인의 의도와 목적이 우선이 아니다. 자아가 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세상을 항상 염두에 둔다. 그래서 이들이야말로 판단을 위해서 가장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데, 아렌트는 이렇게 사심이 없고, 보는 것 그 자체만을 위해서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모든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the freest of all pursuits)이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은 문화와 마찬가지로 로마적 기원을 갖는 ‘휴머니스트’(humanist)의 참된 모습이라고 설명한다.(2) 아렌트에 따르면 문화의 핵심적인 일이란 이 판단력(취미)을 분류하는 일이고, 그러한 취미란 한 개인의 ‘자질’(quality)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밝힌다. 이 휴매니스트와 문화인들의 판단력에 의해서 세계는 보존되고, 문화가 생산되므로 이들의 육성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인간의 정치적 과제가 된다는 것이다.(3)

아렌트는 그녀의 다른 논문 <진리와 정치>(Truth and Politics)에서 세상의 “사실적 진실"(factual truth)라는 것도 결국에는 정치적으로, 인간의 판단에 의해서 증명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이 진리의 확실성에 대한 증명을 사심 없이,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의 존재가 특히 중요함을 역설한다. 그녀는 정치란 이 진리의 담보 위에서만 온전히 기능한다고 보는데, 이러한 역할을 하는 철학자, 과학자, 예술가, 역사가, 법관, 저널리스트 등의 존재가 어떠해야 하고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밝혀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법부와 고등교육기관의 역사가, 철학자 등의 휴매니스트들의 역할을 요청한다. 이들이야말로 가장 사심 없이, 자유롭게 정치 밖에서 진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보는데, 하지만 현실은 한국 사회와 대학에서도 드러나듯이  그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와 연결되어서 인문학과 교양교육의 천시는 그 현실을 잘 지시해 준다.(4)

양명의 ‘치량지’(致良知)과 발본색원(拔本塞源)

한편 양명도 인간 정신력의 기초적 토대인 양지를 발견하고서 온 힘을 다해 그 양지의 확충을 주창한다. 그는 자신의 치량지란 당시의 일반적인 공부법처럼 그저 바깥의 사물에 대한 지식을 확충하려는 ‘치지’(致知)가 아니라 ‘치량지’(致/良/知) 인데, 즉 그것이란 단순한 외부적 지식의 축적보다는 그 뿌리를 다듬으려는 것이고, 이와 더불어 단순히 지적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도덕과 행위에 몰두하는 것임을 말한다고 강조한다.

양명은 그의 말년의 대표적 명문(名文)인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 Pulling up the Root and Stopping up the Source)에서 어떻게 전통의 성인지도(聖人之道, To become a sage)의 학문이 우리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선한 본성을 키우는 공부가 아니라 단지 표피적이고, 공허하며, 단편적인 지식들에 대한 엄청난 기억과 암송, 화려한 글쓰기나 주석 등의 지식을 늘리는 공부로 전락해 버렸는지를 밝혀낸다. 그런 이유로 세상에는 이기주의와 영달의 추구가 난무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을 못하고 자기 혼자서 모든 일을 하려고 하고, 온갖 세력을 다 가지겠다고 다투는 도탄으로 빠져버렸다고 한다. 양명을 그것을 감동스러운 인류 문명사 이야기로 풀어낸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자신의 ‘선한 본성’(양지)을 기르는 ‘치량지’의 공부 방법은 덕행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 덕행이라는 것은 가장 가까운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仁)로부터 시작되어서 넓혀지는 것인바, ‘효친’(孝親)이 그에게도 인(仁) 실천의 기본이 된다.(5) 양명에 따르면 효친과 친구사이에 신뢰를 지키는 것(붕우유신)과 인간관계를 바로잡는 것이 공부의 기본이고, 이것은 누구나의 본성 속에 놓여있는 가르침이므로 그렇게 밖에서 배우기 위해 정신없이 쫒아 다닐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공부란 “축적”이 아니라 오히려 (이기심을) “줄이는 것”(只求日減 不求日增)이고, 그래서 이러한 공부는 너무나 즐겁고, 자유로운 것이며, 단순하고 쉽다고 말한다.

그래서 양명은 이렇게 (도덕적) 행위에 힘쓰고, 또한 그 행위를 가장 기초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인간 마음의 출발점인 양지에 힘쓰는 치량지의 공부법이야말로 도탄에 빠진 나라와 사회를 구하기 위한 ‘발본색원’(拔本塞源), 근본과 원천에서부터 악의 뿌리를 찾아내서 고치는 방법이 된다고 역설하며 제안한다. 그것은 단순한 도덕교육의 강조가 아니라 인간의 교육을 참으로 다시 누구나의 본래적인 기초력과 가능성에 근거해서 시작하자는 것이고, 앞에서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교육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누구나의 건강한 판단력과 그것에 근거해서 서로 소통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는 강조이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생각하지 않아도 알고, 배우지 않아도 능한 것으로 이른바 양지이다. 양지가 사람 마음에 있는 것은 성인과 어리석은 자의 차이가 없으며, 천하고금이 모두 같다. 세상의 군자들이 오직 이 양지를 확충하는 데에만 힘쓴다면, 스스로 옳고 그른 판단을 공평하게 할 수 있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함께 할 수 있으며, 남을 자기처럼 여기고 나라를 자기 집안처럼 여기어, 천지만물이 한 몸이 될 수 있다.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기를 구할지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6)

 

“나는 이제 양지를 믿게 되었다. 나에게서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어서 다시는 약간이라도 덮어 감추려 들지 않게 되었다. 나는 이제 솔직하고 과감한 ‘광자’(狂者)와 같은 심경을 지니게 되었으니,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나의 행동과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7)

지극한 정치활동으로서의 아렌트와 양명의 아동교육

이상과 같은 아렌트의 ‘확장된 판단력’이나 ‘양지의 확충’에 대한 이상은 어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렌트는 “교육의 본질은 탄생성이다”(the essence of education is natlaity)라고 하면서 탄생으로 계속해서 이 세상에 새로운 존재가 오는 것이므로 교육은 인간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일 중 하나라고 지적하였다.(8) 교육문제가 가장 핵심적인 정치문제가 될 정도로 점점 더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그녀는 종종 그녀만의 독특한 교육에 대한 사고를 발표한다. 양명도 학자로, 행정가로, 군인으로 매우 분주한 삶을 살았지만, 그 일들을 하면서 동시에 그 임지에 초등학교를 설립한다거나 향약을 만들어서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노력하였다. 『전습록傳習錄』에도 실려 있는 글로서 그가 유백송 등의 선생들에게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한 지침들로 준 글들을 보면 그가 아린 아동의 교육에서 무엇을 제일 중시했는가가 잘 나타난다. 그의 치량지의 교육사상을 말한다.

아렌트와 양명이 이렇게 인간 활동적 삶과 인식의 근저로 내려가서 그 출발점을 교육과 문화 등에서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그들 사고의 핵심적인 관건인 정치적 사고 안에 ‘사회문화적’이고 장기간의 인간 개개인의 일인 ‘교육’의 일을 그들 고유한 정치의 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는 더 이상 ‘정치와 문화’, ‘정치와 교육’, 또는 ‘(종교적) 궁극성의 물음과 정치, 교육, 문화’ 등의 일이 서로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매우 통합적으로 건강한 인간 공동체의 삶을 위해서 함께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이 그들 사고의 최고의 정점이라고 여겨진다. 이들이 비록 좁은 의미의 아동 교육가는 아니었지만, 치열하게 인간 활동과 인식의 근저와 시작점을 물었고, 그것을 특히 교육과 그 중에서도 한 인간의 성장과 삶에서 기초와 토대를 놓는 ‘어린 시절’의 교육에서 찾았다는 것은 그 교육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혁명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일로 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두 사상가가 일생동안 넘어서고자 씨름했던 정치적, 사회적, 지적 전체주의란 궁극적으로는 바로 시대의 교육적 전체주의와 실리주의를 넘어서는 일을 통해서 가능해지리라고 통찰했음을 밝히는 것이다.

본 연구가 두 사상가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아동)교육의 관점에서 살펴보려는 것도 유사한 의미에서이다. 통합적이고, 인간 인식의 근저를 탐구하는 교육방식과 인간 공공적 삶을 위한 교육사상이야말로 오늘 우리 시대를 위한 발본색원의 일이라고 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적나라하게 목도하고 있는 ‘교육적 전체주의’와 속물주의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부터 다시 지금까지 아렌트나 양명이 밝힌 ‘판단력’ 또는 ‘양지’의 특성을 크게 세 가지로 다시 정리하면서 그 교육적 의미를 살필 것이다. 즉 ‘판단력(탄생성) 확장’과 ‘양지 확충’의 아동교육학적 의미를 밝혀보려는 것이다.

미주

(미주 1) Hannah Arendt, ‘The Crisis in Culture’, Between Past and Future (New York: Penguin book, 1993), 197-226; 이은선, 「한나 아렌트 사상에서 본 교육에서의 전통과 현대」, 『교육철학』 제30집 (교육철학회 2003.8), 1485ff.
(미주 2) Ibid., 219, 224.
(미주 3) 지난 박근혜 정부 아래서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이나 이번 아베정부에 의한 평화의 소녀상 전시 방해가 어떻게 문화와 예술이 사심 있는 정치에 의해서 왜곡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미주 4) Arendt, ‘Truth and Politics’, Between Past and Future, 259ff.
(미주 5) 『傳習錄』 中, 318; 이은선, 「왕양명 공부법에 대한 오늘의 성찰」, 졸저, 『유교, 기독교 그리고 페미니즘』 (서울: 지식산업사, 2003), 357ff.
(미주 6) 『傳習錄』中 179조 “是非之心,不慮而知,不學而能,所謂「良知」也. 良知之在人心,無間於聖愚,天下古今之所同也,世之君子, 惟務其良知,則自能公是非,同好惡,視人猶己,視國猶家,而以天地萬物爲一體,求天下無冶,,不可得矣。”
(미주 7) 『傳習錄』 下 312조 “我今信得這良知, 眞是眞非, 信手行去, 更不著些覆藏。我今繞做得箇狂者的胸次。使天下之人, 都說我行不掩言也罷.”
(미주 8) Arendt, "The Crisis in Education", Between Past and Future, 185.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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