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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길”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8.08 16:56
13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거기에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이 소문이 퍼지니, 무리가 여러 동네에서 몰려 나와서, 걸어서 예수를 따라왔다. 1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마태복음 14:13~14/새번역)

세례자 요한의 참수형 소식, 사촌 형제이자 하나님의 부르심을 쫓는 길벗이 억울하게 살해당한 소식을 전해 들으십니다. 사랑하는 이를 빼앗긴 일이자, 자신의 미래를 예시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 소식을 접하시고는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가십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 무겁고 아픈 마음, 홀로 거하고 싶으시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주님을 큰 무리가 따라옵니다. 홀로 거할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힘겨운 마음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그들을 내치지 않으십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십니다.

처음 이 장면을 묵상할 때는 무리가 야속해 보이기도 했고, 주님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그 사랑이 헤아릴 수 없이 깊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서로를 더 깊게 만나게 하는 아픔과 슬픔이 보였습니다.

▲ Oswaldo Guayasamín(Ecuadorian, 1916~1999), “El Descendimiento”(1962)

배를 타고 가시는 주님을 걸어서라도 쫓아와야 했던 사람들의 간절함에 사랑으로 반응하십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 슬픔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 인해 더 사랑하신 것은 아닐지. 사촌 형제이자 영적 길벗을 잃은 그 아픔이 무리의 아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한 것은 아닐까요. 너무나 힘겨울 때, 견디기 힘든 아픔이 오히려 타자의 아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하기도 합니다.

상처는 온 신경을 일깨웁니다. 아주 작은 상처도 일상을 흔들 수 있습니다. 상처를 보호하고 치유하기 위해 온 생명이 깨어나 집중합니다. 상처는 잠들어 있던 생명력을 일깨워 활성화합니다. 온 몸의 생명력이 상처를 치유하지만, 동시에 상처가 온 몸의 생명력을 살아나게도 합니다. 몸이 상처를 치유하기도 하지만, 상처가 몸을 살아나게도 합니다.

상처는 몸과 몸도 연결해줍니다. 마음과 마음도 연결해 줍니다. 서로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게 하고, 상대를 위로하고 살려내느라 자신의 상처를 잊게도 합니다. 상대의 상처가 자신의 상처를 잊고 사랑에 몰입하게도 합니다. 상처가 관계를 살려내기도 하고, 상처가 사랑을 살려내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상흔이 우리를 살려내듯이 상처에서 사랑의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물론 상처는 공감하게도 하지만 날이 서게도 합니다. 중대한 판결을 내려야 하는 사람들이 점심 식사 직전에는 대부분 냉혹하고 부정적인 결정을 내리고,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훨씬 너그럽고 긍정적인 판결을 내린다고 합니다. 인간은 그리 객관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배고픔이라는 작은 요소에조차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니 상처는 오죽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상처가 분노의 씨앗이 아니라 공감의 씨앗이 될지가 관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미 상처를 통한 공감의 길을 보여주시고 열어주시지 않았습니까.

돌이 부서지고 부서지고 부서진 후 고운 흙이 될 때, 벌레들도, 씨앗들도 다 품어 안습니다. 벌레도, 씨앗들도 품어 키워주는 품이 됩니다. 억울하고 부조리하게 당한 상실을 정당화하고자 함은 결코 압니다. 하나님께선 그런 일을 일부러 당하게 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찢긴 상처조차도 사랑의 텃밭으로 삼게 하시는 하나님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 거할 때, 상처는 빛이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 상흔을 가만히 만질 때, 상처는 길이 됩니다. 상대를 살리느라 자신의 상처를 잊게 하는 길, 상대를 위해 기도하느라 제 기도가 조금씩 가벼워지는 길이 됩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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