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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불(Unquenchable Fire)명상 자전거 2
전성표 목사(이웃사랑교회) | 승인 2019.08.09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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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에 제암리 마을이 있다. 일제강점기, 1919년 4월 15일 학살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3.1운동 순국 유적지다.

1919년 3월 1일에 독립 만세 운동 한 달 후인 3월 31일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 명은 발안 장날을 이용해 제암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위협사격과 군중의 투석이 이어졌다. 일본군은 군중들에게 칼을 휘둘러 3명을 죽이고, 여러 명을 붙잡아 고문했다.

흥분한 시위 군중이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 파손하였다. 일본은 강경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마을들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주민들을 검거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가 사망했다.

이에 일본군 11명이 진압에 나섰다. 그들은 제암리 주민 가운데 15세 이상 성인 남자들을 제암리 감리교회에 모이게 하고 사격했다. 사격이 끝난 후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전성표

현장을 목격하고 이를 해외에 알린 사람은 수의사이자 선교사인 스코필드 박사다. 화성의 교회당이 불타고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상황파악을 위해 현장을 찾은 선교사들 중 한명이었다. 애초에 방문한 곳은 일본군에 의한 방화, 학살이 발생한 화성 수촌리였으나, 제암리에서도 학살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홀로 제암리를 방문했다.

그가 방문한 날은 제암리 학살 3일 후였다. 스코필드는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카메라를 들고 자전거를 기차에 싣고 수원역까지 열차를 타고 왔다. 수원에서 화성 제암리까지는 약 20km이다.

그는 경계가 삼엄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제암리와는 다른 방향인 병점 방향으로 자전거를 달려 일경을 따돌리고, 논두렁과 비탈길을 따라 정남면 문학리, 발안을 거쳐 제암리에 도착한다.

수원역 – 제암리 : 20km수원역 - 원천 - 정남면 문학리 – 발안 – 제암리 : 35kmⓒ전성표

첩경의 두 배 가까운, 거의 100리 길이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대학 2학년 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어야하는 장애인이었다. 그 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간 것이었다.

ⓒ전성표

제암리에 도착한 스코필드박사는 학살 현장을 찍었다. 그 기록을 <꺼지지 않는 불>(Unquenchable Fire)이라는 책으로 만들었고 이 책은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3.1운동 초기의 몇 안 되는 사진들은 스코필드박사가 찍은 것이 많다. 스코필드박사가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이유다.

이 공로로 스코필드박사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스코필드가 스스로 지은 한국식 이름은 석호필(石虎弼)이다. 석호필은 1920년 강도를 가장한 암살미수 사건을 겪었으며, 3.1운동의 실상을 알린 대가로 일제에 의해 사실상 추방되었다. 그의 고국 캐나다에 도착한 이후에도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석호필은 해방과 한국전쟁 후, 1960년 경, 두 개의 보육원과 한 개의 직업소년학교를 후원하며 전쟁고아를 사비로 돌보았다. 영어 성경반을 운영하면서 여러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학업을 도왔는데 그 중에는 김근태(전 복지부장관), 정운찬(전 총리), 이삼열(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사무총장) 등이 있다.

1958년 자유당이 대공 사찰 강화와 언론 통제를 내용으로 하는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2·4 보안법 파동’이 있었다. 석호필이 이승만의 독재를 비판하자, 정부는 그의 신학기 강의를 중지시키고 그가 거처하고 있는 외인숙사를 비우라고 통고하기까지 한다. 그는 이렇게 살았다.

1970년 세상을 뜬 후, 한국에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대로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됐다. 그는 현충원에 묻힌 몇 안 되는 외국인 중 한명이다. 그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이다.

(2)

일제 강점기 자전거 선수로 엄복동이 있다. 석호필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했다.(석호필이 세 살 많다.)

1918년 엄복동은 장충단 공원 자전거 경기에서 우승한다. 1919년 석호필은 불편한 팔다리로 수원에서 제암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다. 1920년 엄복동은 경복궁에서 열린 경성시민 대운동회 자전거 부분에서 우승한다.

엄복동은 영국의 러지(Rudge-Whitworth)사에서 제작한 로드자전거를 타고 달렸고, 석호필은 아마도 우리가 쌀집자전거라고 부르는 짐자전거를 타고 갔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자전거를 탔다.

ⓒ전성표

당시 로드사이클은 13kg 정도였지만 일반이 타던 짐자전거는 30kg 정도 나갔을 것이다.

엄복동은 튼튼한 허벅지와 장딴지를 가진 타고난 스프린터였고 석호필은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어야하는 장애인이었다.

엄복동의 라이딩이 승리의 질주였다면 석호필의 라이딩은 연민의 여정이었다. 엄복동은 1등을 하기 위해 달렸고 석호필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페달을 저었다.

엄복동은 자전거 대회에서 10회 이상 우승하였으나 삶의 후반에 60 인생의 절반에 가까운 24년간을 자전거 절도범으로 살았다. 그는 생전 자전거 수십 대를 훔쳐 장물로 팔았다가 실형을 선고받은 전적이 있는 상습 절도범이었다. 당시 자전거는 비쌌다. 지금으로 치면 차량절도범인 셈이다.

석호필은 제암리 학살사건의 참상을 스코필드 자신의 표현대로 '떨리는 손'으로 촬영,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 보도했고, 서대문 형무소의 수감자에 대한 고문 여부를 확인한 뒤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의 중지를 호소하였다.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글을 쓰거나 교육 장려 활동을 하며 지냈다.

엄복동은 민족 영웅으로 살다가 절도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석호필은 이방인으로 왔다가 독립운동가로 별세했다. 엄복동은 해방까지 유명한 사람이었으나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석호필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업적을 존중받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엄복동은 한국 사람이며 석호필은 캐나다인이다.

(3)

같은 학교출신이라서, 친인척이라서, 친한 사이라서, 동기라서, 감싸고돈다. 서로 끌어주고 밀어준다. “우리가 남이가?” 인맥의 시대다.

한편, 타자는 혐오한다. 고향이 다르다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우리나라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아랍에서 온 종교를 믿는다고, 나와 성적(性的) 취향이 다르다고, 멸시한다. 깔본다, 비하한다. 혐오의 시대다.

자전차왕으로, 민족의 영웅으로 살았으나 인생 후반기 생활고로 인해 자전거를 훔친 그를 동정한다. 이방인으로 조선에 세균학과 위생학 교수로 왔다가 조선민중의 고통을 보고 독립운동에 기여한 그를 존경한다.

국가와 민족을 떠나 이방인을 사랑했던 한 외국인을 떠올린다. 가끔 길가에서 오래된 짐자전거를 보면 그 무거운 자전거를 장애인의 몸으로 타고, 지금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을 시골길 100리를 순사의 눈을 피해 달린 꺼지지 않는 불꽃, 석호필을 기억한다. 다시 한번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스코필드 박사의 묘비에 새겨진 문구 ⓒ전성표

전성표 목사(이웃사랑교회)  s156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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