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참 사랑: 선으로 악을 이기며, 원수까지 사랑하라!
(레 19:9-18 롬 12:9-21 눅 6:32-38)
성령강림후 아홉째주일(8월11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8.09 16:57

1. 아오안

지금 기독교는 사람들의 ‘아오안’입니다. ‘Out of 안중’의 약자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혹은 ‘안중(眼中)에도 없다’라는 말입니다. 왜 기독교가 아오안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기독교인들이 상식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제대로 된 ‘신학’이 없기에 기독교인들이 아오안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제대로 된 신학이 없다는 말은 신학에 인문학적인 기반, 곧 문학, 역사, 철학(문사철)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문학은 먼저 읽기와 쓰기입니다. 읽기야 고전이 되는 문학, 역사, 철학서적을 읽는 것이고, 쓰기가 중요한데, 서양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인문주의적 글쓰기’의 전형이 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법이자, 칼빈이 세네카의 원전을 해석했던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문학 책을 쓰기 위한 방법으로도 매우 뛰어난 방법입니다.

먼저, 문헌학적 설명으로 글을 시작하고, 둘째, 오직 문법과 논리에 의지해 글을 전개하며, 셋째 수사학적 표현을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고대 작가들이 남긴 고전적 지식들을 끌어다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칼빈을 비롯한 당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이 이 저술 방법을 따랐다는 사실은 그들이 철학뿐 아니라, 문헌학, 논리학, 수사학 같은 제반 인문학을 모두 중요시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오늘날 칼빈을 교리적으로만 알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칼빈이 얼마나 위대한 인문학자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거기에 한국교회의 위기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철학자 김용규 선생은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신학과 인문학의 대화』 (IVP, 201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어떤 학문보다 드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다른 어떤 학문보다 폭넓은 가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학문이 그 바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나는 적어도 이 점에서는 우리가 기독교 신학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자부심은 지난 2천 년 동안 사도들과 순교자들 그리고 위대한 신학자들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기 위해 목숨 바쳐 지켜 온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교회와 교인들이 인문학적 기반이 없어 상식이 무너지고, 제대로된 신학이 없어 세상으로부터 ‘아오안’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기독교가 사람들의 ‘아오안’이 된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이며, 말로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바로 이러한 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령 받은 교회 공동체에, 혹은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요구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참사랑!

따라서 오늘 말씀은 사랑의 정도와 강도를 세 본문 말씀으로 단계적으로 보여줍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은 단순히 ‘이웃 사랑’입니다. 그러나 서신서인 로마서 말씀으로 나가게 되면, ‘원수를 선대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고, 마지막 복음서의 말씀은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그럼 사랑의 단계를 살펴볼까요? 먼저 이웃 사랑입니다.

2.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구약의 본문 레위기 19장 말씀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규례에 대한 소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거룩을 요청하고(레 19:1-8), 사람들과의 관계(레 19:9-18)에서는 윤리와 도덕적 수준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핵심은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9-10)

먼저,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곡식과 이삭, 포도 열매 등 먹을 것을 베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조금 더 적극적인 의미로 확장이 됩니다.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1-14)

조금 눈여겨 볼 것은 재판에서의 정의입니다. 오직 공의로 재판하라는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불의를 눈감아 줘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해서도 안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5-16)

그리고 결론을 말합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7-18).” 참 사랑의 근본, 혹은 시작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 볼까요?

3.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에서 사랑의 단계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으로 나아갑니다. 또한 ‘원수를 갚지 말고, 먹이고, 마시게 하라’고 까지 합니다. 사실 로마서는 1장부터 11장까지는 ‘의인’론에 대한 말씀이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성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으로 치면, 출애굽기(구원)와 레위기(성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화의 내용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지 성도들의 의무를 언급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자세(롬 12:1-2), 두 번째로 교회에 대한 성도의 자세(롬 12:3-13), 마지막으로 이웃에 대한 성도의 자세(롬 12:14-18)입니다. 본문 말씀은 교회와 이웃에 대한 성도의 자세가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그 자세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먼저 교인들에 대한 성도들의 사랑의 자세입니다.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9-13)

그리고 이웃에 대한 성도들의 사랑의 자세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4-18)

관심을 가지고 봐야 될 말씀이 나옵니다. 바로 원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들어볼까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9-21)

사도 바울은 원수를 사랑할 때 나타나는 놀라운 효과를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래 머리 위에 숯을 얹는 행위는 죄를 강제로 자백받기 위한 고문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양심을 일깨우는 사랑의 행위로 재해석하였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원수 속에 꽁꽁 얼어붙다시피 한 선한 마음, 곧 양심이, 사랑을 받음으로써 제대로 작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양심의 작동은 원수 간의 증오의 관계를 대화와 화해의 관계로 바꿉니다. 그래서 악순환은 선순환이 되고, 적대적 공생관계가 우호적 상생 관계로 아름답게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수 사랑에 관해 한완상 전 부총리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악이 우리 속에도 존재하듯이, 원수 속에도 선이 존재한다는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냉전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확신하듯이, 우리만 선이고 원수는 악이라면,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악을 사랑하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원수와 선한 관계, 곧 평화의 관계를 만들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복음서의 본문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우리의 사랑이 확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4.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눅 6:32-34)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선대하는 이를 선대하는 일, 받기를 바라고 꾸어 주는 일은 죄인들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더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볼까요?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6-38)

사랑함으로 사랑받는다는 놀라운 진리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참사랑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며, 마침내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5. 결론

『다시 프로테스탄트: 한국교회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복있는사람, 2012)에서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근대화 1기의 파트너로서 산업사회로, 도시화로, 민주화로 숨 가쁘게 달려온 개신교가 용도폐기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공룡이 되고자 한 한국 교회가 거대한 몸통, 작은 두뇌를 갖고 기후변화에 취약해 멸종했던 공룡의 전철을 밟을 수 있음을 경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개신교가 개신교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한국교회는 ‘중세적 승리주의’로 회귀해 사랑, 평화, 화해, 용서, 희생, 회개, 낮아짐보다는 전쟁, 승리, 정복, 영광, 권세를 지향하며 전도와 선교가 아니고는 세상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법을 잃어 버렸다고 지적합니다.

성장주의와 승리주의로 한 방만을 노리는 한국 개신교회와 일상에서 윤리를 잃어버린 목회자와 성도들이 책 제목처럼 ‘다시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깨워,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야만 미래의 희망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장주의의 바벨탑과 십자군의 승리주의가 예수의 십자가의 자기희생으로 바뀌지 않는 한, 한국 개신교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2000년 동안 형성된 기독교 신학은 성서의 계시와 시대의 인문학, 신앙과 이성,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즉 서로 이질적이고 때로는 상반되는 두 정신이 만나 빚어낸 거대하고 아름다운 정신적인 구조물입니다. 용광로라 할 수 있겠지요. 앞서 소개한 김용규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 기독교는 거대한 용광로입니다. 교리사가 증언하듯이, 기독교는 처음부터 물과 기름 같은 히브리인의 계시와 그리스 철학이 만나 서로 융합함으로써 시작했지요. 이후에도 시대마다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사상과 사조들의 숱한 도전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것들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아 마침내는 자기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스스로 풍성하고 강해지는 길을 걸어 왔습니다. 큰 틀에서 보면 교회의 발자취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교회사가 증언하듯이, 초대교회는 유대교의 ‘혈통적 인종주의’와 그리스의 ‘문화적 인종주의’를 극복하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야말로 모든 것을 통합하고 융합을 이뤄낼 수 있는 논리, 지혜경험, 지식이 축적된 결정체라는 것입니다. 들어볼까요?

“기독교 신학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신앙과 이성, 성서의 계시와 인문학이 빚어낸 아름답고 거대한 정신적 구조물입니다. 기독교가 2천 년 동안이나 쌓아 온 풍성하고 강건하며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학문이지요.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 나라와 우리 세계를 연결하는 든든한 다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학문을 이어 주는 건실한 교량이지요. 이 점에서는 인류 문명 가운데 이만한 정신적 유산을 찾아보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김용규 선생은 삼단 케이크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가장 아래에 신본적 가치, 그 위에 인본주의적 가치, 가장 위엔 포스트모더니즘적 가치가 올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연결된다고 봅니다. 성부의 창조적 장소라는 바탕에,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성자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다양한 은사와 사역!

사실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손으로 잡아 그것을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과 사회에 새로운 삶의 비전으로 던져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했던 이방인, 여성, 노예, 어린아이 등을 구분 없이 받아들여 환대하고 포용함으로써 그들에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비전을 제시했듯이, 교회는 시대마다 그런 역할을 해 왔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늘 그 시대 사람들의 개인적 또는 공동체적 삶을 억압하고 저해하는 장벽들을 뛰어넘을 새로운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성장해왔습니다. 한국교회도 사역의 방점을 여기에 둔다면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참 사람!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