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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찾지 못한 두 개의 단상(斷想)영화 <기생충>이 선사한 불편함과 불쾌함
강석훈(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 승인 2019.08.11 01:04

개봉을 기다렸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당일은 아니었지만 개봉 후 며칠이 되지 않아 기대를 가지고 영화관을 찾았다.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마더', '설국열차'로 이어지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좋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역시 봉테일, 자신의 장점을 잘 살리며 친절하게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봉준호의 솜씨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갈 즈음 의외의 지점에서 내 속의 불쾌감이 훅하고 올라왔다.

첫 번째 단상; 반지하의 잔혹한 추억

사람들의 발목 정도 밖에는 보이지 않기에 창문이라 부르기도 왠지 민망한 창문, 생리현상을 해결하기에도 불편한 생김새의 화장실을 보면서 '그래 저렇게 생겼었지?' 하며 추억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흐뭇한 추억은 오래 가지 않아 불쾌한 기억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그들이 반지하 바깥의 사람들과 섞이기 시작한 지점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반지하 냄새'가 '선'을 넘어 내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후각이었다. 주위에서 반지하의 냄새가 났다. 이상했지만 그랬다. 그 이후로 영화를 보는 내내 소중한 추억은 불쾌한 기억이 되었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불편함은 꽤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사람들의 생각이 그리 다르지 않았는지 영화 개봉 초기 많은 이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반지하방 추억을 이야기하는 유행이 일어났더랬다. 그리고 때 아닌 배틀이 붙었다. 자신이 살았던 반지하가 더 열악했었다는 추억의 배틀이다. 설문조사 아닌 설문조사도 진행되었다. 반지하에 살든지 옥탑방에 살아야 한다면 과연 어디에 살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내 주위에는 압도적으로 옥탑방이 많았다. 그렇게 반지하의 삶은 많은 이들의 추억이었던 것이다. 나도 질 수 없었다. 만만치 않은 경험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불편함은 가셔지지를 않았다. 오래도록 그 불쾌함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무엇일까? 무엇이 이렇게 나를 불편하게 하는 걸까? 가만히 내 속을 들여다보아야만 했다. 그 불편함의 한 가운데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이 추억으로 포장된 기억의 깊은 심연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행히 그곳에서 빠져 나왔구나는 안도감과 다시는 그곳으로(그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결연함으로 두려움을 포장하며 짐짓 그곳을 외면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었다가는 다시 그 삶이 나의 뒷덜미를 잡아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말이다.

그곳에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 도저히 그 곳을 빠져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감추고 희망이라는 희미한 놈의 발뒤꿈치를 붙잡으며 어렵사리 생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이 지금도 거기에 살고 있다.

반지하의 삶.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경쟁에서 탈락했으니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삶인 것일까? 혹시 반지하가 있으니 반지하에 사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없을까? 법으로 반지하를 만들지 못하게 하면 되는 일 아닐까? 살아본 사람들은 다 이야기한다. 사람 살만한 곳이 아니라고. 그러면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을 발전한 사회라고 배웠다. 공간이 권력이 되고 있다고들 말한다. 공간은, 특별히 주거는 인권이다. 그러니 안 될 것이 무언가. 반지하는 고사하고 쪽방이라고 불리는 주거의 막장도 대부분의 소유자가 부유한 사람들이라던데 언제까지 타인의 가난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사회를 그냥 내버려 두어야만 한다는 것인가.

예언자 이사야가 꿈꾸었다는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풀을 뜯는 세상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하에서 사는 이들, 쪽방에서 사는 이들은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정말 현실성 없는 몽상인걸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최소한의 주거에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정말 헛된 환상인걸까? 나의 첫 번째 단상은 이렇게 아직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두 번째 단상: 선에 대한 분노

불편함이 일상생활에 젖어 잊혀져갈 때 쯤 다시 한 번 영화 기생충을 보게 되었다. 잘 만들어진 영화이기는 한가보다. 처음 볼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많이 보였다. 그리고 불쾌감은 갑절을 넘어섰다. 냄새를 맡으며 느낀 불편함으로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새로이 보며 불쾌감은 다시 상승하고 있었다.

지인은 왜 약자를 악인으로 그렸는지에 대해 불편함을 표시했었다. 나는 영화에 등장하는 약자들이 악인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살아가며 저 정도의 수단을 발휘하는 것쯤을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약자들이 좀 더 약았더라면, 좀 더 뻔뻔했더라면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약자끼리 연대했더라면, 같이 편을 먹고 함께 그 부자를 털어먹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했었다.

영화 속 부자들은 세련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는 하지만 착한 사람들, 그러니까 ‘선(善)인’은 아니었다. 그들의 삶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점점 본색은 드러난다. 금지옥엽 막내아들의 생일을 망치고 피곤함이 극에 달해있을 때에도 그들은 세련됨을 잃지 않는 듯 보인다. 그것이 자신들의 삶을 지키는 수단이라도 되는 양 부랴부랴 지인들을 불러 가든파티를 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밤사이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관심도 없다. 그들의 세련됨은 자신의 선(線) 안에 존재하는 이들에게만 작동하는 것이었다. 시장을 봐오는 차안에서 연교(조여정 분)가 보인 모습은 어딜 봐도 선(善)한 사람의 모습은 아니지 않은가?

그들은 자신의 선(線)을 지키기 위해 세련됨을 포장재로 삼고 있지만 진짜 무기는 잔혹함이다. 내가 돈을 주는 사람이니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 인디언 분장쯤 시켜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오만함, 그것에 대하여 탐탁치 않아하는 기택(송강호 분)에게 “오늘 출근 처리하는 거죠?”라고 비수를 날릴 수 있는 잔혹함이 그들의 진짜 무기인 것이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냄새로 인한 불쾌함으로도 기택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지만, 두 번째 보면서 선(線)을 그어놓고 그 안에 있는 이들만을 사람으로 인정하려는 동익과 연교를 보며 나는 이미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가를 결정하고 있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섬세하고 촘촘하게 그어져 있는 보이지 않는 선(線)을 중심으로 그것을 넘지 않을 때로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불편함은 화남으로 변했고 어떻게든 그 선(線)을 넘는 자들을 응원해야 했다. 반대로 봉준호 감독을 향해 분노했다. 그 난리를 치르고도 기우(최우식 분)는 반지하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기정(박소담 분)과 생사와 행방을 알 수 없었던 기택을 생각한다면 다행이라 해야 할 것인가?

문광(이정은 분)은 어쩔 것인가? 근세(박명훈 분)는 또 무슨 죄인가? 그리 난리를 떨어놓고 기우를 겨우 제자리로 돌려놓는 그 심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는 기우를 자유롭게 놓아주지도 않는다. 끝까지 아비의 행방을 숨겨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비롭지도 않다. 아버지의 행방을 알려 주지만 오히려 그것은 기우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행위일 뿐이다. 그리고 동시에 관객인 우리도 확인한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감독은 기우가 할 수 있는 일은 몽상 안에 들어가는 일뿐이라는 것을 확인해준다. 이리도 잔인할 수가 있는가? 영화 한편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중전파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니 보기 싫으면 안보면 그만일 뿐인 말 그대로 영화 아닌가? 영화감독이 세상을 바꿀 의무를 가진 사람은 아닐 터이니 봉준호 감독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은 나의 비뚤어짐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누가 그에게 가난한 이들의 삶을 이리도 디테일하게 그려낼 권리를 주었는가? 왜 당신은 이리도 자세하게 그들의 삶을, 그들의 현재를, 그리고 그들의 미래를 그려놓았는가? 영화를 만들었다고, 캐릭터를 만들어 냈을 뿐이라고 할 텐가? 그러기에는 당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 반지하의 세상이, 그것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너무도 그럴듯했다. 그걸 보면서 나만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가 당신에게 그들을 아프게 할 권리를 주었나?

그는 세상을 특별하게 들여다보는 재주가 있다. 나는 그렇게 믿었고 그게 참 좋았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보며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실패자들의 삶을 들여다 볼 줄 아는 그의 시선이 좋았다. 그런데 ‘기생충’을 보고서는 ‘왜 그는 들여다보고만 있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아마도 내가 그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나 보다. 그라면 남들은 이야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많이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하긴 수많은 설교들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데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나는 예배 때마다 목사와 교인들이 ‘부자되세요’하고 인사하는 교회도 알고 있다.

선(線)을 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누구나 선(線)을 넘을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한다. 그래야 아무나 부자도 되고 하는 것 아닌가? 만약에 선(線)을 넘을 수 없는 세상이라면 날이 가고 해가 가도 부자는 부자이고 가난한 이들은 가난한 이들일 뿐이다. 어느 누구도 부자가 될 수는 없다. 원래 부자였던 사람이 아니라면. 자본주의가 주장하는대로 기회가 균등한 것이 자본주의의 장점이라면 그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한다. 선(線)을 넘을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보장되어야 한다.

요사이 기본소득을 공부하고 있다. 내 두 가지 단상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강석훈(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knc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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